[BOOK世通, 제주 읽기] (122) 연구모임 사회비판과 대안, 《호모포비아-그들은 왜 동성애를 두려워하는가?》, 사월의 책,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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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모임 사회비판과 대안, 《호모포비아-그들은 왜 동성애를 두려워하는가?》, 사월의 책, 2019. 출처=알라딘.

명숙이는 잘 있는지?

중학교 1학년 때 우리 반에는 약간 특이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명철(가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였는데, 반 아이들은 모두 그를 명숙이라고 불렀다. 명철이는 그냥 보통의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얼굴 생김새도 평범한 편이었고, 약간 명랑한 편이었고, 잘 웃었다. 명철이를 특이하게 보이게 했던 것은 다른 학생들에 비해 약간 넓은 골반과 달리기를 할 때 양 손을 좌우로 함께 흔드는 버릇, 그리고 다소 여성스러운 말투였다. 짓궂은 아이들은 그런 명철이를 명숙이라고 부르면서 몸짓이나 말투를 흉내 내기도 했으며 일부러 화장실을 따라가는 녀석도 있었다. 명철이는 그런 아이들의 장난을 모두 웃어 넘겼다. 명철이는 한 번도 자신에 대한 조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 나는 그가 늘 명랑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명철이의 명랑함은 단지 명랑한 마음을 드러낸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 교정에서 몇 년 전에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을 만났으나 서로 인사를 건네지 않고 지나친 적이 있다. 물론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치는 일은 일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얼마 전에 마주친 학생은 수업시간에 매우 활발하게 토론에 참여했던 친구라서 얼굴을 보는 순간 내 수업을 수강한 학생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마도 나를 의식했을 그 학생과 나는 서로 시선을 살짝 돌리면서 어색하게 지나쳤다. 체격이 좋은 편인 그 남학생은 진한 메이크업을 하고 여성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 후로도 멀리서 그 학생이 지나가는 것을 몇 번 보았지만 일부러 다가가서 아는 체를 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 학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여전히 혼란스럽다. 그 학생은 성격이 외향적이고 자신감이 넘쳤었는데, 외모를 그렇게 꾸미고 다니면서부터는 묘한 아우라가 풍겼다. 내가 볼 때마다 그 학생이 늘 혼자였기 때문인지, 그의 표정에서는 자신감과 고독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추정컨대 명철이나 그 학생은 쉽지 않은 시간들을 보냈을 것이다. 명철이가 중학교를 다니던 때는 코미디언들이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나와 흑인 흉내를 내면서 대놓고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해도 모두가 웃고 넘어갈 시절이었다. 모든 국민의 인권이 유린되는 군사독재치하에서 소수자의 인권 따위를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지금은 그나마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연예인이 대중 매체에서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대학에 성소수자 동아리도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상황이 변했다고 할 수 있으나, 혐오의 시선은 여전하다. 필자가 이 글에서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보살펴야 한다고 주장하면 당장 혐오의 댓글이 달릴 것이 뻔하다. 양성애자이자 인도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였던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다룬 영화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혐오를 넘어서

이번에 소개할 책은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등과 같은 비판철학자들로 유명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의 정기 간행 학술지 《베스텐트(Westend)》의 여섯 번째 한국판인 《호모포비아-그들은 왜 동성애를 두려워하는가?》이다. 이 간행물 시리즈를 잠깐 소개하자면,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악셀 호네트의 제자인 문성훈 교수(서울여대)가 책임편집자를 맡아서 해마다 독일판 《베스텐트》를 발췌 편집하고, 국내 저자들의 논문을 포함시켜 한국판 《베스텐트》로 출간하고 있다. 번역은 ‘연구모임 사회비판과 대안’이라는 학술활동 그룹이 맡고 있다. 동성애를 주제로 다룬 독일판 《베스텐트》는 원래는 2016년에 출간된 것으로서 한국에서는 이번에 번역되어 나온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가 동성애 문제를 다룬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악셀 호네트는 하버마스의 후계자로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을 재구성하여 ‘인정이론’을 만들었고, 이 인정이론의 핵심은 사회적인 무시와 차별, 혐오 등의 문제를 민주주의 사회 구성의 중요한 문제로 간주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호네트의 인정이론은 특히 페미니즘 이슈와 맞물려 미국의 낸시 프레이저나 주디트 버틀러 등과 논쟁하고 교류하면서 지평을 넓혀 가고 있다. 

《호모포비아-그들은 왜 동성애를 두려워하는가?》는 동성애에 관한 다섯 편의 논문을 특집으로 싣고 있다. 여기서 그 내용을 모두 요약할 수는 없으므로 인상 깊게 읽은 몇 구절만 소개해 볼까 한다. 클라우스 테벨라이트는 <‘호모포비아’-알 수 없는 그 무엇>이라는 글에서 호모포비아라는 단어에 포함된 공포(포비아)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공포를 조장하는 세력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31쪽) 동성애자들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는 세력은 나치 하에서 국가가 유대인이나 다른 집단을 억압하도록 명령했던 상황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박해함으로써 집단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푸틴의 러시아는 동성애 금지법을 만들어 국가가 적극적으로 동성애 혐오에 나서고 있다. 니나 데틀로프는 동성혼인의 법적인 허용을 요구하는 그의 글 <가족법상의 동성애자 처벌>에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1989년), 핀란드(2002년)가 처음으로 동성 커플을 위해 동반자 관계를 인정했고, 이후 네덜란드(2001년)가 동성 혼인을 인정하자,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랜드가 그 뒤를 이었으며, 계속해서 덴마크(2012년), 프랑스(2013년),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웨일스(2014년), 룩셈부르크, 아일랜드(2015년), 핀란드(2017년)에 동성 혼인을 법제화했다고 보고하고 있다.(66쪽) 이런 상황 때문에 다시 테벨라이트의 표현을 빌리면 “이제 성은 국가의 강력한 통제라는 굴레로부터 해방되어 있는 상황”(43쪽)으로 보이며 그에 따라 박해의 필요도 줄어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그는 진단한다. 

물론 이것은 북유럽과 서유럽 몇 나라의 상황일 뿐 이슬람권 국가나 동구권 국가의 사정은 푸틴의 러시아와 유사하다. 우리나라 역시 동성애 거부의 상황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관심사는 성소수자의 인권을 고려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실천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베른트 지몬의 <동성애 거부-선입견, 존중, 정치화>에서 엇비슷하게 찾아볼 수 있다. 

지몬은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은 우리의 뿌리 깊은 선입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그 거부감이 포함하고 있는 경멸의 씨앗이 동성애자에 대한 폭력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 폭력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사람이 만약 종교적 공동체나 사회 전체의 집단적 자기이해에 뿌리박고 있는 선입견을 비판하기 위해 해당 집단의 자기이해와 정체성 자체를 문제 삼아 그것을 공격할 경우 그것은 곧 ‘타자’를 경멸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무시당하는 소수자의 정체성을 옹호하기 위해 무시하는 다수자의 정체성을 무시하는 것은 동일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된다. 이런 식의 자문화중심주의를 피하기 위해 지몬은 태도와 행태를 구별할 것을 요구한다.(54쪽)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부정적인 행태로 연결시키지 않을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몬은 동성애에 대한 세상의 부정적인 선입견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동성애자는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성애자는 이성애자의 거부를 감내해야 하고, 이성애자는 사실상 동성애를 거부하면서도 동성애자를 존중하여 자신의 ‘거부’를 억제해야 한다.” (59쪽) 

지몬의 해결책은 온건하면서 현실적이다. 동성애를 거부해 온 사람들을 ‘가르쳐서’ 동성애 옹호자로 ‘변화’시키겠다는 헛된 꿈을 꿀 것이 아니라 상호존중이라는 공통의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전진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몬의 이러한 생각조차 혐오 표현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는 쉽사리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이다. 이 책의 한국판 책임편집자이자 인정이론 전공자인 문성훈 교수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혐오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그것은 타인의 동물성이나 유한성 때문에, 혹은 타인의 열등한 부분, 혹은 혐오스러운 부분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타인이 어떤 사명이나 이상에 반하기 때문에 그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취약성, 혹은 열등한 부분이나 혐오스러운 부분, 더구나 무력감 때문에 타인을 혐오한다는 점이다. 즉 타인을 혐오할 때 혐오의 원인은 혐오 대상이 아니라, 혐오하는 사람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 집단이나 사람들을 혐오하는 사람은 대개 수치심이나 열등감, 혹은 무력감에 사로잡힌 사람이기 쉽고, 혐오가 악순환을 통해 사회적으로 확산된다면, 그만큼 수치심, 열등감, 무력감에 노출된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11쪽)

문 교수는 사회적 무시를 지속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 역시 무시하게 되며 그것이 혐오로 표출된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성적 정체성, 사회적 지위, 재산의 정도, 피부 색깔, 출신 국가, 신체적 능력, 종교, 정치적 신념 등등의 이유로 무시와 차별, 억압과 배제가 일상화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내지 않는 한 혐오를 없애기는 힘들 것이다. 

중년의 나이가 되었을 명철이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수십 년간 지속되었을 무시와 혐오를 이겨내고 어딘가에서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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