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그들은 누구인가] 재일동포와 야키니쿠

재일동포와 야키니쿠

한국 불고기를 일본말로는 '야키니쿠(焼き肉)' 라고 부른다. 구운 고기라는 의미이다. '야키니쿠'란, 한국 불고기가 재일동포들에 의해 일본말 '야키니쿠'로 이름이 바뀌면서, 일본 식문화의 한 장르로서 일본사람들 입에 정착하게 된다. 이 '야키니쿠' 식문화 창시자가 우리 재일동포들이다.

또 '야키니쿠'라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재일동포, 호르몽, 쯔르하시(鶴橋), 김치, 소주이다. 재일동포들은 해방 후 일본 문화에 상당한 공헌을 한다. 한국 불고기를 '야키니쿠'란 이름으로 일본 음식문화 속에 정착 시켰다.

야구 또한 우리동포들이 일본야구에 공헌을 한다. 일본 프로야구에 선수로서 또 구단으로서 공헌을 하고 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는 한국계 선수들을 모아서 한 팀을 만들면, 뉴욕 양키스에게 이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계 선수들의 활약이 대단하다. 또 프로야구 12개 구단중에 2개 구단이 한국계
이다.

일본 연예인 속에도 상당수가 우리 한국계이다. 12월 31일날 밤 일본 NHK에서 청백전을 한다. 일본 TV프로에서 가장 큰 연예 프로그램이며, 이 빙송에 출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수는 성공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최대의 노래 중심 방송이다. 이 방송에 출연이 결정되었다고 좋아하고, 들어가지 못했다고
울고불고하는 아주 큰 영향력이 있는 일본 국가 TV방송인 것이다. 이 청백전에 우리 한국계의 연예인들을 전원 제외시킨다면 그 프로그램은 성립될 수 없다고 관계자는 말하고 있을 정도로, 일본 연예인들에는 한국계가 상당한 비율를 차지하고 있다.

▲ 쯔르하시 야키니키 골목. 수십개의 야키니키 식당이 모여있다. 여기서 맛이 없으면 곧 도퇴되고 만다. ⓒ신재경

한국에서는 불고기, 일본에서는 야키니쿠.

일본은 옛날부터 육류 특히 쇠고기를 한국만큼 잘 먹지 않았다. 일본음식에 육류가 들어가는 음식이라면, 스키야키, 샤브샤브, 규동(牛丼)정도이며, 주로 익히는 음식이다. 한국 불고기처럼 구워서 먹는 습관은 예전부터 없었다. 또 샤브샤브등의 일본 요리는 주로 빨간 육고기가 주종을 이루었고, 대창 곱창등의
소의 내장은 전부 버리고 말았다. 더욱더 생고기 육회는 아예 먹을려고도 하지 않았다. 재일동포들이 '야키니쿠' 음식점을 시작하면서, 이제까지 일본 음식 문화 속에 없었던 구워서 먹는 불고기를 정착시킨 것이다.

일본에서 야키니쿠 라는 간판을 보면, 먼저 저집은 우리 동포가 하는 집 아닐까? 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최근에 와서, 야키니쿠가 일본 식문화로 정착이 되면서, 돈을 벌려는 일본사람들이 이 비지니스에 끼어들고 있지만, 동포들이 하는 식당에 가야 진짜의 야키니쿠, 또 맛있는 야키니쿠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할 정도로 우리동포들의 전매특허이다. 한국에서 중국사람이 하는 중국집에 가야 맛있는 자장면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우리 동포가 야키니쿠 음식점을 많이 해야만 하는 것은 다른 이유도 있다. 일본이란 나라는 우리 동포들에게 직업선택의 자유를 주지 않았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국적조항이란 법률을 만들어서 공부를 잘 해도 공무원도 선생님도 될 수 없었다. 또 실력이 좋아도 좋은 회사에 취직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자연히 자영업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자영업을 생각한다면 야키니쿠 음식점도 선택의 하나가 된다. 그래서 '재일동포=야키니쿠'의 등식이 성립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 직후(한국의 해방직후)는 일본은 상당한 혼란기였다. 특히 식량이 부족했으며 일반국민들은 돈도 없었다. 이 식량이 부족한 빈곤기에 버려진 소 내장으로, 우리 동포들은 한국식 야키니쿠를 만들어 싸고 맛있게 상품화 했다. 그 맛의 기본은 한국에서 먹었던 그 맛을 일본에서 재현 한 것이다.

이 소 내장을 일본에서는 '호르몽(ホルモン)' 이라고 부른다. '호르몽' 이란 이름에는 2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버리다(ほうる, 호루) + 물건(もの, 모노)의 합성어로서 '버리는 물건' 이라는 설이다. 버리는 물건으로 만든 야키니쿠라는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소 내장을 먹으면 우리 몸속의 호르몬 바란스가 좋아지기에 호르몽이라고 불리워졌다는 설이 있다. 어느 설이 맞는 설인지 모르지만, 설과 관계 없이 맛있다. 우리 동포들이 한국맛을 기본으로 만들어낸 음식이고 단어인 것이다.

이 호르몽을 언급하려면, 오사카 쓰루하시(鶴橋)를 설명해야 된다. 오사카 쯔르하시는 일본 최대의 코리아 타운(Korea Town)이다. 해방직후 일본의 혼란기에는 쯔르하시에 암시장(야미이찌)가 있었다. 식량 등 각종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에 생필품을 사고파는 암시장이 한몫을 하는 것이며, 암시장에는 물건을 사고팔기도 하지만, 그 시장에 걸맞는 식당도 있어야 그 시장도 살고 음식점도 산다. 한국 오일장에는 맛있는 국수집과 막걸리가 어울리는 것과 같다.

▲ 지금도 있는 호르몽(ホルモン) 간판 ⓒ신재경

혼란기의 쯔르하시, 교통편은 좋아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이는 암시장. 먹을 것이 없었다. 배는 고팠다. 그러나 돈은 없었다. 어디에서 음식 냄새가 나면, 그 음식 냄새가 나는 식당쪽으로 나도 모르게 발이 가버리고 마는 그런 시절에, 그런 시장이었다. 나만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도나도 누구나 돈이 없었다.

악착같이 살아야만 되는 우리 동포 1세들. 쯔르하시 야키니쿠 식당에서는 지금까지 버렸던 소 내장을 싼 가격으로 구입해서 한국 양념으로, 싸고 맛있는 를 만들어 내었다. 싸고 맛이 있기에 돈이 없었던 대중들이 모여드는 것이다. 이런 고기를 먹을려면 김치가 좋은 반찬이 되고, 또 술은 한국 막걸리가 딱 어울리는 것이다. 소 내장의 요리에는 한국의 고추, 마늘이 들어가야 제맛이 난다. 그때까지 일본사람들은 고추와 마늘등을 먹지 않았다. 호르몽 요리를 통해서 고추와 마늘의 맛을 새삼 알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혼란기에 쯔르하시는 암시장과 야키니쿠집들로 유명해지며, 안정기로 들어서면서 암시장은 없어지지만 야키니쿠집들은 그대로 자리를 잡아, '쯔르하시'하면 '야키니쿠'가 바로 떠오른다. 지금도 쯔르하시에는 수십집의 야키니쿠집들이 있지만, 거의가 우리 동포들이 경영하는 불고기집들이다. 수십집들의 야키니쿠집들이 있기에 맛이 없으면 곧 자연도퇴되여 없어지고 만다. 지금 쯔르하시에 있는 야키니쿠집들은 맛있는 집들만 남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야키니쿠 먹으러 가자 라고 하면, 쯔르하시로 가자, 라는 말이 나온다.

다른지역 일본사람들도 오사카에 가면 쯔르하시에 가서 야키니쿠 먹으러 가자,라는 말을 할 정도로, '쯔르하시=야키니쿠'라는 등식이 정착되었다. 이 쯔르하시에서 역사와 전통 그리고 맛을 자랑하는 식당이 쯔르이치(鶴一)다. 암시장시절 제일먼저 야키니쿠 식당을 시작했으며, 지금 3대째 경영하고 있다. 3층 건물이 3건물이나 있지만, 바쁠때는 1시간 2시간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다. TV취재를 거부하기로도 유명하다. TV에서 방송이 나가면 손님들이 더 모여서 기다리는 시간이 몇시간으로 더 길어져, 오신 손님들에게 죄송함만 만들고 마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야키니쿠가 일본 식문화로 정착하기에는 그 나름데로 노력도 있었다. 옛날 야키니쿠라고 하면, 뽀얀 연기를 피워가며 그 주변만 가도 고기 냄새에 김치냄새 마늘냄새 속에 중년아저씨들이 모여 앉아 소주에 고기를 먹는 그런 풍경을 연상하기 쉽다. 이런 식당에 젊은 여자들이 가려고 하지 않는다. 또 이런 식당에 좀 앉아 있으면 냄새가 옷에 배서 그 옷은 세탁을 해야 한다.

▲ 돌하르방이 일본에 왔드니 돌할망이 되었다. 그러나, 어서 오시라고 열심히 손님을 부르고 있다. ⓒ신재경

1980년대에 들면서, '무연 로스타'라는 기계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고기 굽는 화로에 연통이 붙어 있어서 연기를 빼어내여 밖으로 배출시키는 장치이다. 이 장치 덕으로 연기가 없어지면서 식당 실내는 깨끗해 졌다. 깨끗해진 실내에 화려한 장식도 할수 있다. 이젠 젊은 여자들도 야키니쿠를 찾으며, 어린 아이를
데린 가족 회식에는 야키니쿠가 제1의 후보가 되기 시작한다. 이로서 일본 식문화의 한 장르로서 자리를 잡는다.

이때부터 일본사람들도 이 비지니스에 참여하여 성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또 외식산업으로 체인점 형식의 비지니스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체인점 형식으로 지역 혹은 전국으로 전개한 비지니스가 망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성공했다는 말은 아직 들은 적이 없다. 야키니쿠 식당이 수십집 모
여있는 쯔르하시는 지역 브랜드로 자리를 잡았고 성공했다. 일본 전국 사람들이, 오사카에 가면 쯔르하시에 가서 맛있는 야키니쿠를 배가 터지도록 먹고 와야 차비가 아깝지 않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야키니쿠 체인점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아직 없다.

역시 우리 한국요리는 어머니의 손맛이다. 어머니가 손으로 고기를 주물어야 맛이 나는 것이다. 그 손맛이 그리워서 한시간도 두시간도 줄을 서서 기다린다.

다른 하나는 메뉴의 세분화이다. 일본 사람들은 요리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커피도 브라질산 커피, 아프리카산 커피 등등의 메뉴가 있어서 입맛에 따라 주문을 하는 것이다. 닭도 우리처럼 삼계탕으로 전체를 먹는 것이 아니라 닭날개 닭가슴살 등, 여러 부위로 나누어 입맛에 따라 주문을 하는 형식이다. 이 메뉴의 세분화에 맞추어 소의 각부위별로 고기를 주문한다. 갈비 로스 혀 얼굴살 뱃살 대창 위등, 여러 부위별로 입맛에 맞추어 주문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일본의 야키니쿠와 한국의 불고기의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일본은 고기를 구워서 다래(たれ)라는 양념장에 찍어서 먹는다. 이 '다래'라는 양념장은 한국에 없는 방식이다. 다래를 처음 시작한 음식점은 쓰루하시의 쓰루이치(鶴一) 식당이다. 초기의 쓰루이치는 호르몽이다. 당시의 호르몽으로 일본사람
들 입맛에 맞게 할려면, 숨길 맛은 숨겨야 되고, 더 진하게 내어야 될 맛은 더 진하게 해야 되었기에 다래라는 양념장이 그 역활을 한 것이다. 쓰르이치에서 시작된 다래가 현재 야키니쿠의 표준이 된 것이다.

이 메뉴의 세분화와 더울어 한국과 다른 점은, 김치와 상추 등 한국에서라면 무료의 밑반찬들이 전부 메뉴에 들어가 있어서 돈을 받는다. 한국 불고기집에서 김치도 상추도 돈을 받는 다면, 그런 집은 두번다시 가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정확히도 돈을 받는다. 돈을 안 받는 것은 물 정도일 것이다.

▲ 식당 쓰루이치(鶴一) ⓒ신재경

▲ 식당 쓰루이치(鶴一) ⓒ신재경

동포들이 한국맛을 일본에 전파시키고 정착시킨 야키니쿠에 사고가 일어나고 있다. 최근에 식중독 사고가 일어나고 있다. 육회를 먹은 사람들이 식중독을 일으켜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 가게는 우리동포가 경영하는 곳이 아니라,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체인점 음식점에서 육회를 먹은 손님이 사망하는 사고이다.

필자는 쯔르하시(鶴橋)에서 25년을 살아왔다. 그동안 쯔르하시에서 야키니쿠 혹은 육회를 먹어서 식중독이 일어났다는 뉴스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오히려 'O157'이 일본에 유행하여 식중독 사고가 일어날때, 쯔르하시 부근의 동포가 많이 사는 곳에서는 O157 식중독 사고가 없었다. 그때 우리동포들은 우리가 즐겨먹는 김치나 한국음식에 마늘 고추가 많이 들어가 식중독을 예방하고 있다고, 우리들은 말하곤 했다. 아마도 일본사람들이기에 야키니쿠를 다루는 노하우가 부족하기에 그런 사고가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나 일본사람들이 경영하는 음식점에서 식중독 사고가 일어 났다고는 하지만, 야키니쿠라면 우리동포들의 전매특허이다. 야키니쿠에 대한 흉점을 만들고만 결과이다.

얼마전부터 일본 친구들이 나에게 졸라대는 것이 있다. 서울에 가서 1시간 줄서서 들어간 우리 한국 식당, 그 맛이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쯔르하시에서 야키니쿠가 아닌 맛나는 한국음식 식당을 데려다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있게 데리고 갈만 한, 그런 맛나는 야키니쿠가 아닌, 한국 식당은 쓰루하시에는 없다. 좀 지나치게 이야기 한다면, 오사카에 있는 일본 사람, 한국 안 가본 사람 없을 것이다. 또 TV 방송, 서적, 인터넷을 통해서 서울에 있는 맛나는 한국음식점 다들 알고 있고, 그런 식당에 가서 먹어 보고 있다. 그런 맛나는 한국음식 맛을 잊을 수 없어, 쯔르하시에 가면 있을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없다.
교통이 좋아져 왕래가 많아진 현대, 우리 입맛도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신재경

 

 

▲ 신재경 교수 ⓒ 제주의소리
 필자 신재경 교수는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京都創成大學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오사카 제주도연구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신 교수는 재일동포, 그 중에서도 재일제주인들의 삶에 대해 조사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재일동포들의 '밀항'을 밀도 있게 조사하면서 <제주의소리>에 '어떤 밀항이야기'를 연재해 왔다. 또 일본 프로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발휘 '신재경의 일본야구'를 써 왔다.    jejudo@nifty.com

 

<제주의소리>

<신재경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