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다른 이야기>의 글쓴이 강정홍 전 제민일보 편집국장이 지난 9월5일 75세를 일기로 세상과 작별했으나 당분간 고인의 글을 남겨두려 합니다. 글 하나하나가 제주의 가치 훼손과 정체성 위기, 난개발 등 여러가지 난제에 부닥친 지역사회에 깊은 울림을 주고,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 바랍니다. 고인의 다른 글을 보시려면 제목 상단의 <강정홍의 또다른 이야기>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편집자 주>

<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역사적 사유는 ‘자신의 숨겨진 뿌리를 향해 되돌아가는 가능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 지난 3일 69주기 4.3희생자추념식이 열린 제주4.3평화공원. 한 유족이 행방불명인표석 앞에서 눈물을 쏟고 있다. ⓒ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언제나 ‘4.3사건의 언어’에는 가슴 치는 울림이 있습니다. 그건 아픔입니다. 그래도 다시 묻습니다. “잊지 못해 외치는가? 차라리 잊기 위해 외치는가?” 아직도 저는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 부질없음입니다. 역사를 사유한다는 것은 ‘내가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직도 수준 이하입니다. 역시 4.3사건의 주제는 무겁습니다.

사람들은 망각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잊을 수만 있다면, 잊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모든 행위에는 그 자체에 망각이 내재합니다. 당신의 말처럼, 그것은 자신이 ‘지속되는 동안’에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날의 그 끔찍한 악몽’을 되살리기 싫어 4.3사건 이야기만 나오면, 아예 귀를 막아버리는 사람들의 고통도 저는 당신의 말 따라 그렇게 해석합니다.

모든 유기체의 생명에는 빛만 있는 게 아닙니다. 어두움도 함께 합니다. 잠을 자지 않고 마냥 깨어있는 것이 불가능하듯, 잊어버림 없이 항상 기억 속에서만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건 형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합니다. 급기야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역시 당신은 틀리지 않습니다. “불면과 되새김질, 그리하여 역사적 의미가 한계에 이르면, 인간이든 문화든, 살아있는 것은 모두 해를 입고 파멸하게 된다는 것!”….

지역사회의 문화적 조형력이 중요합니다

‘과거의 것’이 ‘현재의 무덤’을 파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또 다른 재앙입니다. 그래서 지역사회의 문화적 조형력이 중요합니다. 그건 단순한 조형물 따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는 지역사회의 힘입니다. ‘과거의 것’과 ‘낯선 것’을 변형시켜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대체하고, 부서진 형식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제때에 기억하는 것처럼, 제때에 잊을 줄 아는 것, ‘힘찬 본능’을 가지고, 언제 역사적으로 느껴야 하고, 언제 비역사적으로 느껴야할지 감지하는 능력도 모두가 거기서 비롯됩니다.

그렇습니다. 미래의 삶을 위해 과거를 사용하고, 이미 일어난 것에서 다시 역사를 만드는 힘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됩니다. 우리가 역사를 삶의 목적으로서 수행하는 법을 제대로 안다면, 우리들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습니다. 역사는 삶의 목적을 설정하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정립하는데 필요한 기억의 저장소입니다. 4.3사건의 기록도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과거의 사료에 대한 비판적 재구성도 중요하지만, 그것에만 전념할 뿐, 미래의 관점에서 고찰하는 실천적인 면을 소홀히 한다면, 4.3사건의 역사는 우리의 삶과는 동떨어진 단순한 역사적 기록에 지나지 않습니다.

역사의 목적은 그 종점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강조합니다. “역사의 이상(理想)은 역사적 진행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싸워서 획득되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당신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섣불리 이야기할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과거에 대해 비판적으로 대결할 수 있는 공간을 좁혀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역사의 독점’입니다. ‘역사의 권력화’입니다. 그건 좋지 않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삶에 대한 가치판단을 불가능하게 할뿐만 아니라, 현재에 미치는 과거의 영향을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역사의 타락’입니다. 저는 그걸 경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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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제주에서는 남부탐색구조부대라는 이름의 공군기지 설치 가능성이 높게 제기되고 있다. ⓒ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역사는 ‘충성과 사랑’으로 ‘자신이 태어난 곳’을 되돌아보는 자에게 속합니다

4.3사건은 분명 우리들의 역사입니다. “역사는 충성과 사랑으로 자신이 태어난 곳을 되돌아보는 자에게 속한다”는 당신의 말은 참으로 멋있습니다. “그 역사를 보존하고 존경하는 자”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당신의 말 따라 “이런 경건함으로 자신의 현존재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가 자란 이 지역의 역사는 우리 자신의 역사가 됩니다. 저 한라산과, 이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지금 제가 걷고 있는 이 들길과, 그리고 유채꽃밭…. 그 이상의 거론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릴 적 그림일기처럼…. 그래서 우리들은  이 아름다운 제주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발견합니다. “여기서 살았다!” 지금 여기서 살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여기서 살 것입니다. 그건 단순하지만, 감동적인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거창한 사업은 별반 의미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4.3사건의 교훈적 의미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제주사람’들에게, 그리고 이 아름다운 산과들에 영원토록 해야 합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강조합니다. “우리들의 역사를 위해 우리 개개인을 이 환경에, 이 산마루에 마치 나사로 고정시키듯 묶어야 한다!”는 것….  “나무가 자신의 뿌리에 대해 느끼는 쾌감, 그것의 상속인으로서, 꽃과 과실로서 과거로부터 성장하여 그로써 자신의 실존에 대해 해명을 듣고, 정당성을 얻는 행복감…” 이것이 바로 당신이 즐겨 이야기하는 ‘진정한 역사적 의미’입니다. 단순한 낭만적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태여 의미를 두자면, 경이감(驚異感)의 또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자연스러움과 순수함’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삶과 역사’의 관계가 전도되고, 혼란스럽고, 과장되고…, ‘우리들의 문제’가 얼마나 불안하게 눈앞에서 넘쳐흐르고 있는지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4.3사건의 영(靈)이 깃든 곶자왈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파헤쳐지고, 덩달아 제주의 인문환경은 날로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들리는 건 대단위 산야를 파헤치는 개발 소식뿐입니다. 심지어 군사시설까지 거론되고…. 그것도 이 ‘4월’에…. 이런 상황에선 4,3사건의 교훈적 의미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이 ‘4월’에 ‘군사시설’까지 거론되고…

미래는 우리들의 등 뒤에서 다가옵니다. 과거는 우리들의 눈앞에서 멀어져갑니다. 미래를 정면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과거를 바탕삼아 미래를 투사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경험과 한계는 오늘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이론적 정서적 실천을 통해서만 극복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언어도 그것이 사용되는 사회적 맥락과 분리되어서는 제대로 그 의미를 구현할 수 없습니다. 매해 거행되는 추념일에 중앙 고위관료의 ‘혼 없는 말’을 듣는 것이 고통인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몇몇 이론가의 행태를 보면 정말 화가 납니다.

‘우리’는 시공간적 영향 아래서 성립합니다. 우리의 역사적 사유는 이 제주에서 출발하고, 이 제주의 현실로 돌아옵니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제주사람’이 바로 그 주체입니다. 저 빛나는 한라산과 함께 그 영겁의 세월을 관통하고 있는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는’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력입니다. 그들이 ‘4.3사건의 역사성’을 얼마나 치열하게 ‘자기 것’으로 하는가의 정도에 따라 문제 해결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경험은 단지 개인의 경험에 머물지 않습니다. 지역주민은 단지 한 시대 한 사회에 정태적으로 머무는 존재가 아닙니다. ‘기억과 망각의 긴 여정을 거쳐 온 과정’의 총체를 담지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고장의 자연적 진화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종(種‘)들의 사회적 역사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는 고립된 불변의 존재가 아닙니다. 수많은 ‘삶의 관계’ 속에 놓여 있으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우리’가 만들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저편에 있는 미지의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만난 사람, 우리가 겪은 일들의 집합입니다. 그것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를 구성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당신의 말처럼 드디어 ‘대지의 침묵하는 부름’가운데 들어서게 됩니다. 그게 바로 ‘우리들이 발을 딛고 선 이 아름다운 제주의 산과 들을 우리들의 삶의 터전으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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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에 위치한 산림청 관리 국유림에 서식하는 나무들이 무참히 잘려 나간 현장. 이곳은 제주 4대 곶자왈인 한경-안덕곶자왈에 속하는 저지곶자왈이다. ⓒ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사랑’이 4.3사건의 교훈적 의미를 구현하는 것

앞서 ‘문화의 조형력’을 이야기했지만, 우리의 독특한 문화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과 자기정체성이 형성되는데 있어 역사가 갖는 선험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역사적 존재입니다. 말을 바꿔 이야기하지만, 역사에 대한 기억은 우리들의 ‘삶의 방향’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지금 ‘우리’는 역사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역사적 기억, 다시 말하면 역사에 대한 ‘제주사람’ 특유의 태도 자체에 있다는 당신의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의 역사는 항상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도출해내는 공동체의 역사 속에 편입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역사적 사유’는 치열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났고, 죽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갑니다. 제가 강조하는 ‘우리’는 ‘제주’라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상징체계입니다. ‘우리’는 주변 세상으로부터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자연은 ‘우리’에게 공간의식을 제공합니다. 저 빛나는 한라산과, 우리의 자연이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과, 우리가 그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 그 일치의 경험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 관계의 신성함을 망각하고 자연을 그저 ‘타자’로 간주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영국의 한 시인의 말을 따라 감히 묻습니다. “당신은 일찍이 사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자체에 마음을 빼앗긴 적이 있는가?”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당신 앞의 인간이든, 아니면 꽃이든, 아니면 한 알의 모래알이든 ‘그것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해본 적이 있는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존재자!’ 그것의 경험은 하나의 기적입니다. 그럴진대 ‘저 오름자락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작은 들꽃’인들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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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홍 언론인. ⓒ제주의소리
저의 장황한 이야기는 이제 하나로 이어집니다. ‘이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을 지킨다는 것’ 그리하여 ‘제주사람의 정체성을 바로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현해야 할 4.3사건의 교훈적 의미입니다. 그게 바로 ‘제주사랑’입니다. 역시 역사적 사유는 ‘자신의 숨겨진 뿌리’를 향해서 되돌아갈 가능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4월은 또 다시 흘러갑니다. / 강정홍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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