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11)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 총책 김달삼 

-김달삼의 한 많은 생애 

▲ 김달삼.

‘과연 그 장인에 그 사위/ 김달삼/ 본명 이승진/ 일본 예비 육군사관학교에서/ 하필 김익렬이 동기생이었다/ 김익렬은 제주도 9연대장/ 두 사람은 단 한 번 4·3사건 휴전담판을 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라고/ 고개 저으며/ 산에서 돌아온 김익렬은 생각했다’-시인 고은의「장인 강문석」 전문

‘그의 미남은 여성의 도구가 아니라/ 바람 치는 혁명의 도구였다/ 4·3사태 뒤/ 황해도 해주로 갔다/(중략)/ 6·25 사변 직전 태백산 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4·3사태와 함께/그의 행방은 아무도 몰랐다’ -시인 고은의 「김달삼」 전문 

‘제주도가 지난 4월 3일 미명에 한라산의 봉화로 개시된 소요로 인하여 이내 동족상잔의 비극을 거듭하면서 전도가 묘지화할 우려까지도 있는 듯이 보였으나 김봉호(金鳳昊) 신 청장의 완화정책으로 말미암아 도내 각 부락에는 점차 명랑한 빛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한편 우리 기자단 일행이 수집한 정보로 한라산 깊이 숨어 있는 소요측 동정을 살펴보면 아직도 약 1,000에 가까운 주력부대가 건재하고 있다 하며 그들은 김달삼(金達三․28)이라는 총사령장의 지휘를 받고 있으며 (1) 도민 생활의 안전을 복구시키는 당국의 적절한 시책 (2)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경찰의 무장해제 (3) 경찰관의 권력남용의 엄금 및 모모 사설단체의 숙청 등의 요구조건을 걸고 이 현실 문제의 해결이 실현되지 않는 한 최후까지 도내 전 인민의 생명 재산의 안전을 위하여 재궐기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하는데 이에 대한 책임당국의 대응책 여하가 자못 주목되며 제주도의 운명을 좌우시킬 관건이 될 것이라는 느낌을 주어 제주도를 싸돌고 있는 무거운 구름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조선일보 1948년 7월 20일 기사 

‘1. 경찰, 제주도행 다이너마이트 적재 선박 나포. 5월 31일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후 6시 사이에 추자도 경찰은 부산에서 제주도로 다이너마이트를 싣고 가던 배 1척을 나포했다. (미군정 보고, B-2) 2. 제주도 인민해방군 조직. 제주도에서 심문받던 한 포로가 폭도 집단은 인민해방군 제5연대로 재조직되었으며 김달삼이 지휘하고 있다고 진술했다. (미군정 보고, B-2)’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6월 2일~1948년 6월 3일 (No. 850, 1948. 6. 3. 보고)

김달삼(金達三, 1923 ~1950)은 제주4·3사건을 주도한 남조선로동당원이다. 대정읍 영락리 987번지에서 이평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달삼이란 이름은 그의 장인 강문석(姜文錫)이 일제강점기에 중국 상해에서 항일운동 당시 쓰던 가명이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이다. 유년시절 부모를 따라 대구로 이주, 대구심상소학교를 거쳐 도일(渡日), 교토(京都) 성봉중학교를 거쳐  중앙대학(中央大學)에서 수학하던 중 학병으로 징집되어 복지산(福知山)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5년 1월 강문석의 큰딸 강영애(姜英愛)와 결혼하였다. 강영애는 대정읍 인성리 1661번지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와 오사카시 이쿠노쿠(生野區) 저사야란 곳에 살고 있을 때였다. 조국이 광복되자 강영애를 일본에 두고 귀국하였다. 

1946년 장인 강문석의 소개로 공산당 경북대표 장적우(張赤友), 경북인민위원회 위원장 이상훈(李相薰), 동 위원회 보안부장 이재복(李在福), 농민연맹 경북위원장 장하명 등을 알게 되고 특히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과 교분이 두터웠다. 이재복은 1948년 제주4·3당시 군사부원 이중업을 대동하고 강문석과 같이 제주에 잠입, 김달삼을 집중 지도한 인물로 알려졌다. 대구10·1폭동에 가담하여 이재복의 신임을 받았다.  

1946년 말 대정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서울에서 활동하던 남로당 당수 박헌영(朴憲泳)과 비밀리에 연계되고 있었다. 이때 남로당에 입당하여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변신된 상태였다.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면서, 1947년 1월 남로당 거물급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져 체포된 상태에서 경찰서로 호송도중 도망치기도 하였다. 1947년 3·1사건을 배후에서 조종, 남로당 제주도당책이 되어 한라산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군사부 책임자가 되었다. 

그후 1948년 4월 3일을 기하여 제주도를 남로당이 장악한다는 계획 하에 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  4월 28일 구억초등학교에서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과 평화회담을 벌였으나 결렬되었고 후일 월북하였다. 8월 21일부터 황해도 해주에서 개최된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였다. 제주에서 참가한 강규찬(姜圭贊)과 고진희(高眞姬)부부, 이정숙(李貞淑), 안세훈(安世勳) 등과 함께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제주4·3투쟁보고’를 하고, 북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국가훈장 2급을 수여 받았다.

대의원들은 9월 2일 ‘조선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를 개최, 김달삼은 이때 김일성(金日成), 허헌(許憲) 등과 함께 49명으로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9월 9일 선포되었다. 

그 후 김달삼의 행적은 여러 갈래의 설이 전해진다. 강동정치학권에서 빨치산 간부교육을 받은 뒤 인민유격대 태백산 지구 총수(總帥)가 되어 남하, 유격투쟁을 벌이다가 사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 로서아에서 한국에 온 강동정치학원 원장이었던 박병율도 “강동정치학권에서 지리산 빨치산 지도자 이현상, 제주도 빨치산 지도자 김달삼 등을 포함해서 빨치산 간부들을 교우시켰다.”고 말했다. 

김달삼이 남하한 것은 1949년 8월초로 알려졌다. 직책은 인민유격대 제3병단 태백산지구 사령관, 그는 3백명의 유격대와 함께 경북 영덕과 안동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춘천발 고려】지난 8일경 홍천군 화촌면 방면에 무장 폭도 약 50명이 출현하여 우리 군경은 이를 포위 추격 중에 있거니와 19일 강원도 경찰국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금번 출현한 공비는 지난번 제주도 사건 총지휘자였던 소위 남한 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이 지휘하는 유격대라 하며, 그중 13명은 이미 사살하였다 한다.’-서울신문 1949년 9월 23일

- 진보적 학생운동과 교원세력 

해방 이후 제주도의 교육열기는 그 어느 곳보다 뜨거웠다. 진보성향이 강했다. 1946년 후반부터 학교별로 맹휴사건이 일어났으며, 1947년 2월에는 양과자 반대시위가 벌어지더니, 그 해 3월 1일에는 급기야 3·1시위사건으로 치닫게 된다.

1947년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제주농업학교 학생들은  파쇼교육을 반대하며 동맹휴학운동을 전개하였다. 농업학교 학생 맹휴문제가 잠잠해지더니 이번에는 오현중학생들이 맹휴에 돌입, 사회의 이목을 끌었다. 오현중 맹휴사건은 학내 연극문제에 국한시키지 않고 일제교육의 잔재임을 들먹거리며 강력한 항의운동을 벌였다.  중등학생들의 연합활동은 정치·사회적인 문제의 색채를 띠고 전개되면서 양과자 반대시위를 내세운 3·1절 시위였다.

제주4·3의 주도인물로 알려진 김달삼·이덕구도 그 당시 교원이었다. 김달삼은 대정공립중학교에서 역사와 공민과목을 가르쳤다. 이덕구도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담당 교사였. 또 나중에 남로당 제주도위원장을 맡게 되는 김용관(金龍寬)은 하귀국교 교장으로, 사태 발발 후 조직부장을 맡았던 고칠종(高七踵)은 농업학교 교원으로 재직했으며, 일본으로 피신해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를 저술한 김봉현은 오현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이 밖에도 비록 4·3봉기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1947년 초에 안세훈·이일선 스님과 더불어 제주민전의 공동의장을 맡은 현경호(玄景昊)는 제주중 교장으로 재직했다.

-대정지역의 3·1 기념대회

1947년 3·1절 기념집회는  전국적으로 각 지역에서 있었다. 제주도 내에서도 각 면 단위로 면 소재지에서 기념식이 거행됐다. 김달삼은 그 당시 대정중 사회담당 교사이면서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고 있었다. 머리가 좋았지만 항상 품에 단도를 품고 다니며 보스 노릇을 했다.

대정국민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운 6천여의 군중들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가파도에서도 1백여 명의 주민들이 어선을 타고 나와서 행사에 참여하였다. 기념식은 이운방의 사회로 대정중 교장 이도일과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벌여온 이신호 등의 연설로 진행되었다.

기념식이 끝난 다음에는 대정중학생들의 연극공연이 마련되어 있었다. 폐회선언 직후에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일부 군중들이 연극 공연장으로 들어가거나 귀가 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운동장 한복판에서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행렬 대열로 돌입한 것이었다. 운동장을 몇 바퀴 돌면서 열기를 돋우더니 교문 밖으로 박차고 나갔다.

그 시위는 사전에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시위행렬 선두에 김달삼이 학생들과 어깨를 끼고 입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히 시위 여부는 그날 역원회의에서 의논하기로 된 것인데 그런 절차도 없이 감행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시위행동을 제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주 남로당의 세대교체

‘1. 민간인 소요(제주도 게릴라부대) 꽤 믿을만한 정보원이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현재 제주도의 게릴라부대(인민군)는 섬을 4개 지구로 나누었다. 각 지구는 2~4개의 면을 관할한다. 각 면에는 면 부대가 위치하고 있거나 전체 지구의 면 부대들을 한 곳에 모을 수 있는 1~2개의 지정된 작전기지가 있다. 4개 군사지구는 선거반대 폭동 기간 게릴라부대 최고 사령관인 김달삼이 지휘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무장 게릴라는 184명으로 추정되며, 이보다 4배 많은 비무장 민간인들이 보급, 기록, 연락, 정보 업무를 담당하거나 정치요원으로 폭도들과 연계되어 활동하고 있다. 논평 : 지난 2주 동안 본토에서 파견된 응원경찰대가 다수 제주도에서 철수했기 때문에 폭동과 소요를 일으키기 위해 ‘공격개시’ 신호가 떨어지면 게릴라 대원들은 이러한 경찰력의 감소를 최대한 이용하려 할 것이다.’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주간정보요약(G-2 Weekly Summary)1948년 9월 17일~1948년 9월 24일(No. 158, 1948. 9. 24. 보고)

제주도 남로당의 뿌리는 조선공산당에 두고 있다. 조공은 1945년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한 민가에 모여 정당결성을 결의하면서 태동되었다. 1946년 11월 중앙에서 조선공산당(박헌영)·조선인민당(여운형)·남조선신민당(백남운) 등 3개 좌파정당이 통합, 남로당으로 출범하였다.

이에 따라 1946년 12월 조천 김유환의 집에서 긴급회의를 갖고 남로당 전남도당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제주도위원회는 첫 사업으로 3·1절 기념집회를 배후에서 주도하였다. 남로당은  민관총파업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보였지만, 이런 과시는 결국 미군정에 의해 응원경찰·서청 등 외부세력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1948년 1월 22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조직이 노출되면서 검거선풍이 일어났다. 미 CIC와 군정경찰은 조천면에서 있었던 남로당 집회를 덮쳐 모두 106명을 검거하였다. 1월 26일까지 다시 전도에 걸쳐 115명이 추가로 붙잡혔다. 등사기와 많은 양의 문서가 압수됐다. 검거된 사람들 가운데 남로당 제주도당 안세훈 위원장을 비롯해 김유환·김은환·김용관·이좌구·이덕구·김양근·김대진 등 거물급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이 사건을 이른바 '1·22 검거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검거선풍으로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부서가 있었던 조천·신촌뿐만 아니라 제주읍을 비롯해 도내 곳곳에서 핵심당원들이 체포되었다. 김달삼도 붙잡혀 경찰서로 연행되어 오다 관덕정 앞에서 2명의 호송경관을 뿌리치고 도주했다. 칠성통 금강약방에 기거하고 있던 조몽구는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피신, 측후소에 숨어 살았다는 일화가 있다. 총 221명의 연행자 중 63명은 경찰의 심문을 받고 바로 풀려났다. 그 방면자들은 공산주의자인 남로당원이었다.(Those released were members of the communist OUTH KOREA LABOR PAR-TY.)

무장투쟁 과정에서 지도부 내에서는 시기상조론과 강행론이 팽팽히 맞섰다. 결국 명분론과 위기설을 앞세운 강경파가 당조직을 장악하게 되었다. 강경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대정중 교사 출신 김달삼과 조천중학원 교사 출신 이덕구를 비롯해 김대진·김용관·강규찬·김두봉·이종우·강성렬 등을 꼽을 수 있다.  

제주도 좌익세력은 지역별로 이른바 '자위대'를 편성, 한라산의 각 오름에서 무장투쟁을 대비한 준비에 들어갔다.  애월지서로부터 중산간지대인 어도지경 '샛별오름' 부근에서 '청년들이 무장훈련을 한다는 제보도 있었다. 그들 청년들은 낡은 99식 총과 목총 등으로 훈련하였다.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도 이 '샛별오름'에서의 조우를 자위대와 경찰간의 첫 전투로 기술하고 있다. 경관 30명과 서청·대청대원 등 200여 명이 양쪽으로 포위 공격해 오는 바람에 자위대에서는 원시적인 각종 무기와 몇 자루밖에 없었던 99식총 등을 활용, 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1명이 잡히고 1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즉각 다른 곳의 자위대원들의 지원을 받아 노도와 같이 돌진 생포된 대원을 구출해 냈다는 줄거리이다.

청년들이 산중에 은거하면서 죽창 · 철창 등을 만들며 무장훈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림면 저지마을에서도 확인되었다. 4 · 3사태가 나기 전에 마을에서 남동쪽으로 5km 가량 똘어진 '한수기' 밀림지대에서 청년들이 무장훈련을 하였다. 그곳에서 죽창 담금질을 하는 참기름 허벅을 비롯해 철창 · 죽창 등을 만들었던 흔적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제9연대장 김익렬과의 평화협상

 

▲ 김달삼과 김익렬.
‘제주도가 지난 4월 3일 미명에 한라산의 봉화로 개시된 소요로 인하여 이내 동족상잔의 비극을 거듭하면서 전도가 묘지화할 우려까지도 있는 듯이 보였으나 김봉호(金鳳昊) 신 청장의 완화정책으로 말미암아 도내 각 부락에는 점차 명랑한 빛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한편 우리 기자단 일행이 수집한 정보로 한라산 깊이 숨어 있는 소요측 동정을 살펴보면 아직도 약 1,000에 가까운 주력부대가 건재하고 있다 하며 그들은 김달삼(金達三․28)이라는 총사령장의 지휘를 받고 있으며 (1) 도민 생활의 안전을 복구시키는 당국의 적절한 시책 (2)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경찰의 무장해제 (3) 경찰관의 권력남용의 엄금 및 모모 사설단체의 숙청 등의 요구조건을 걸고 이 현실 문제의 해결이 실현되지 않는 한 최후까지 도내 전 인민의 생명 재산의 안전을 위하여 재궐기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하는데 이에 대한 책임당국의 대응책 여하가 자못 주목되며 제주도의 운명을 좌우시킬 관건이 될 것이라는 느낌을 주어 제주도를 싸돌고 있는 무거운 구름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제주 발 합동】’

(같은 기사 자유신문 48. 7. 20 / 조선중앙일보 48. 7. 21)-조선일보 1948년 7월 20일

1948년 4월 28일 대정면 구억국민학교에서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  두 사령관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4시간동안의 협상 끝에 합의 내용을 이끌어내었다.

1. 72시간 내 전투를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간주한다.
2.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3.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저녁에 협상을 마무리한 김익렬은 제주읍으로 건너와 맨스필드에게 협상 결과를 보고했다. 맨스필드는 크게 만족하며 전 경찰에 대해 외부 활동을 일체 금하도록 명령했다.

양측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협상 사흘 만인 5월1일에 우익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를 방화하는 '오라리방화사건'이 벌어지면서, 유혈충돌을 막기 위한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익렬 연대장은 오라리방화사건 직후, 유혈진압을 주장하는 조병옥 경무대장과 육탄전을 벌이며 싸운 끝에, 5월 6일 해임되었다. 제주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기로 결정한 미군정이 자신들의 명령에 따라 작전을 수행해줄 새로운 사령관으로 박진경을 발탁했다.

-북한으로 간 김달삼

 

▲ 1947년 9월, 월북 하기 이전에 사진. 이 사진은 박헌영의 딸 박비비안나가 오늘날 소장하고 있다.

‘보고에 따르면 최근 북한에서 돌아온 인민해방군 지도자 김달삼이 다시 북으로 갈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C-2) 이번 북한행의 목적은 그가 이전 북한 방문시 제공받기로 했던 무기와 보급품을 수령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방첩대 정기보고 제219호, C-6)’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9월 18일~1948년 9월 20일 (No. 941, 1948. 9. 20. 보고)

‘【공동통신】(전략) 제주도 대표 김달삼씨가 등단하자 제주도 인민투쟁의 총지휘자 김달삼을 환영하는 우뢰같은 박수소리로 장내가 떠나 갈 듯하며 회장의 인사들은 오래 계속되는 박수에 ××에××의 경의를 표하였다. 김달삼씨는 제주도인민 항쟁과 이번 선거투쟁 무장봉기대와 인민들의 투쟁에 대한 피를 뿜는 듯 자세한 보고 마디마디에 찬양과 **의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이로써 오후 7시 제 2일의 대회는 전부 종료하고 각 대표는 최승희(崔承喜)무용단의 무용을 관람하였다.’ -조선중앙일보 1948년 8월 25일 기사

“첫째로는 30만 제주도 전체 인민들이 불타는 조국애로써 강철같이 단결하여 미 제국주의와 그 주구 매국노 리승만, 김성수, 리범석 도배들의 남조선 분할 식민지 침략정책을 단호히 반대하고 조국통일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제주도 무장구국항쟁은 고립된 투쟁이 아니라 남조선 전체 인민들의 위대한 구국투쟁의 일환인 까닭입니다. 전국에서 투쟁이 있었기에 적들이 제주도 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승리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김달삼의 해주대회 연설문 중에서.

김달삼은 1948년 8월 2일 제주도를 출발 목포를 경유하여 해주로 갔다. 그가 제주도를 떠남에 따라 이덕구(李德九)가 김달삼에 이어 무장대의 지휘 총책으로 나서게 되었다. 해주대회에 참가한 제주도 인민대표는 안세훈·김달삼·강규찬·이정숙·고진희·문등용이다. 

해주대회 첫날인 8월 21일 주석단 선거에서 김달삼이 허헌·박헌영·홍명희 등 좌파 거물들과 나란히 주석단 일원으로 뽑혔다. 8월 25일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있었다. 북한 측 대의원 212명을 뽑는 총선거와 남한 측 대의원 360명을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선출하는 일이었다. 제주도 대표 안세훈, 김달삼, 강규찬, 이정숙, 고진희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뽑혔다.

김달삼은  ‘입후보자에 대한 토론’ 시간에 토론자로 나서 제주4·3사건에 관한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는 우선 박헌영에 대한 지지를 밝힌 후 무장봉기의 발발 원인과 관련,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실시에 따른 분노가 폭발해 벌어진 자연발생적인 총궐기라고 주장했다. 이어 5·10선거를 보이코트 한 무장대의 ‘전과’ 등을 길게 설명한 후, “민주조선 완전자주독립 만세! 우리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영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외치며 연설을 마쳤다.

김달삼의 연설문은 UN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 노획한 문서로, 미국의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 RG242, 북한노획문서19, 제주도]로 분류돼 있었던 것인데 후에 대한민국이 복사해온 것으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2년에 펴낸 ‘4.3사건토벌작전사’에  수록돼 있다. 

그후 김달삼은  강동정치학원에서 빨치산 간부교육을 받았다. 그는 1949년 8월 초 인밈유격대 제3병단(태백산지구)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3백명의 유격대와 함께 경북 안동 영덕 주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 제주에서 체포된 무장대원의 모습(1948.5)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수록된 사진.

‘【군 보도과 25일 발표】제주도 폭동사건을 야기하고 최근에는 소위 태백산지구 공비 부사령으로서 갖은 만행을 거듭하여온 김달삼(金達三)은 완전무장폭도 70명을 대동하고 3월 1일 울진군 평해면 백암산에서 패잔부대를 개편 후 최후로 월북할 기도 하에 북상하였는데 3월 21일 15시경 강원도 정선군 북면 고창곡 북방 1㎞지점 반론산 부근을 거쳐 북상중 정예 제185부대 예하 제336부대에 포착되어 약 20시간 교전 후 다음과 같이 섬멸 당하였다. △사살 38, 포로 5, M1 6, 99식 9, 38식 7, 카빈 2, 자동식 소총 1, 권총 1, 다발총 1, 기관단총 1, 실탄 630. 한편 동 전투에서 김달삼은 사살된 것으로 추측되어 그 정체를 확인하고자 각종 증거물을 대조 중이다.’

-조선일보 1950년 3월 26일(같은 기사 자유신문 50. 3. 26)

‘육군본부 총참모장 신(申泰英) 소장은 29일 영남지구에서 조량하며 갖은 만행을 다하고 있던 폭도의 괴수 김(金達三)의 사살을 확인한 다음과 같은 확인서 전문을 발표하고 아직 일부 남아있는 폭도 100명 가량은 이(李昊濟)의 지휘 하 일부는 북한으로 도주를 기도하고 일부는 양춘기를 고대하고 있으나 점차로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삼척 부근에 집결하고 있는 것을 포착하고 있어 이에 대한 토벌도 시간문제에 임하고 있으며 군이 지닌 사명도 거의 끝나 착착 경찰에 넘기고 있는 형세로 닥쳐오는 5월 선거도 무난히 진행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김(金達三) 사살 확인서 내용에 의하면 김(金)이 제7유격대 사령으로 월남시 포로는 선발대로 양양을 출발할 때와 태백산 지구 제3병단이 제1군단으로 개편당시와 지난 3월 1일 제1군단이 재차 백암산에서 개편될 무렵 이(李昊濟)의 개편의 목적설명과 김(金)이 3대 사령으로 임명되었던 것을 포로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확인하였고 그 후 반론산 전투에 도저히 탈출할 장소가 못되고 부대장과 국군에 대항을 결의하였으나 이미 완전히 포위되었고 또한 김(金)의 피살확인은 정보참모 인솔 하에 직접 시체를 목격한 바 죽은 지가 오래되어 용모의 분별을 잘 할 수 없었으나 안경 쓴 형체와 복장, 기타 소지품이 틀림없었다고 한다. 더구나 반론산에서 거두어진 종합전과에 있어도 43대 60명 중 54명 사살, 포로 6명, 기타 전리품도 시인하였고 사진과 실물의 대상도 물론 내무부 치안국의 골상 감정에 대한 전문가들도 포로가 말하는 것과 같이 김(金)이 사살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하며 요즈음 입수된 김(金)이 직접 집필한 일지내용은 다음과 같다.(후략)’ - 동아일보 1950년 3월 30일(같은 기사 국도신문․경향신문․자유신문․조선일보 50. 3. 30)

‘<JOINT WEEKA> 제12호. 3월 10일께 접수받은 보고서에 따르면 남한의 최고 게릴라 지도자 김달삼이 이끄는 80여명의 게릴라들이 북한이나 오대산에 있다.(<JOINT WEEKA> 제11호 참조) 같은 시기에 제3사단 군인이 약 80명(북으로 향하는)과 단기교전을 벌였다. 포로 2명은 자신들을 김달삼 부대 소속이라고 밝혔다. 3월 21일까지의 경찰과 군의 보고서는 3월 20일을 전후해 호향산(좌표 1074-1602) 근처의 제8사단 관할 지역 남쪽으로 부대를 추적했다고 밝혔다. 제21연대 군인들은 발월산(좌표 1170.5-1610.5) 근처에서 게릴라들과 조우했다. 대규모 전투는 22일 오전 8시 40분에 있었다. 교전기간에 김달삼이 숨진 것으로 보고됐다. 아군쪽 손실 : 사망 5명, 게릴라쪽 손실 : 사망 38명, 포로 5명, M-1 소총 6정, 탄약 340발, 99식 소총 9정, 탄약 90발, 38식 소총 7정, 탄약 80발, 박격포 1기, 카빈총 2정, 권총 2정, 경기관총 1정, 수류탄 12발. 논평 : 특히 김달삼이 사살됐다면 이번 교전은 게릴라 작전에 큰 타격을 준 것이다.’-미극동군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합동주간정보분석( Joint Weekly Analysis WEEKA) 1950년 3월 24일

‘태백산 지역의 게릴라 규모/현재 약 100명의 태백산 세력은 조직을 해체하여 이호재(Lee Ho Chai)와 그의 부하 김달삼(Kim Tal Sam)이 이끄는 두 개의 부대로 구성되었다. 4월에 벌어진 첫 번째 전투에서 이씨는 확실히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3월 24일에 보고된 김(달삼)의 죽음은 한국군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리산 지역의 게릴라 규모/이(호재)는 과거 남로당 중앙위원회의 멤버이자 1949년 9월에 북한에서 태백산지역으로 게릴라 300명을 이끌고 침투하였다. 김(달삼)은 1948년 이후 제주도 봉기의 게릴라 지도자였다. 그는 군부대 불만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던 1948년 10월 여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에 지리산 지역에서 활동하다 1949년 태백산 지역으로 움직였다. 이(호재)가 죽은 후 김(달삼)은 남한에서 게릴라 지도자가 되었다. 게릴라활동이 없는 지역/ 경기도, 충청남북도, 제주도 지역에서 현재 게릴라 활동이 보고되지 않고 있다. 남원 지역이 전라북도에서 유일하게 영향을 받고 있는 지역이다. 여타의 호남지역(섬진강 서쪽의 전라남북도 지역)의 게릴라들은 지리산 지역으로 쫓겨났다.(중략) 9개월 동안 제주도에서 게릴라 활동이 보고된 바 없으며 게릴라들이 대부분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임시대리대사 에버레트 드럼라이트(Everett F. Drumright)’ -주한미사절단 및 주한미대사관(American Mission in Korea & American Embassy in Korea) 1950년 5월 15일 (1950. 5. 15. 보고)

- 긴 지명 ‘김달삼모가지잘린골’

 

▲ 반론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반론산에는 천년기념물인 철쭉이 있고, 산호동굴도 있다. 가을엔 억새가 군락을 이룬다.

‘작전요약(Digest of Operations) 고 김달삼의 시신이 오늘 중으로 신원확인을 위하여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다. 확인 내용을 가능한 한 신속히 보고할 예정이다. 작전참모부 한센(Hansen)’-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50년 3월 24일

긴 지명으로 알려진 ‘김달삼모가지잘린골’.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봉정리. 김달삼이 이 근처에서 잡혀 목이 잘렸다하여 한자 인명을 그대로 살린 지명이다. 우측에 있는 산자락은 반론산(1068m)이다. 반론산은 빨치산 퇴로 중 하나였다.  

제주를 탈출한 김달삼은 인민유격대 태백산 지구 김달삼부대(제3군단)를 이끌었으며 영양과 영덕 일대에서 활동했다. 결국 토벌군에 밀려 퇴각하던 중 정선군 북면 반론산에서 험난한 일생을 마감했다. 1950년 3월 20일 김달삼이 정선군 삼운리에서 국군 제185부대 수색대에 발견되었다. 공비는 반론산 동쪽을 수비하고 있던 제185부대 예하 제336부대 2중대와 접전이 되어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3월 22일 전장을 정리하였는데 반론산 골짜기에 즐비한 공비시체와 그 사망자수에 따르는 무기를 노획하였으며 반론산으로부터 동북쪽 정선군내 지경리에서 김달삼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그가 소지하였던 권총 모젤1호, 용병작전에 관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는 수첩 등을 압수하였다. 수첩에는 러시아어로 용병작전 정보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 반론산.

/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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