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이대로 가다가는 제주가 남아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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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소재 골재채취사업 현장. ⓒ제주의소리DB

이 법은 종전의 제주도의 지역적 역사적 인문적 특성을 살리고 자율과 책임, 창의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고도의 자치권이 보장되는 제주특별자치도를 설치하여 실질적인 지방분권을 보장하고, 행정규제의 폭넓은 완화 및 국제적 기준의 적용 등을 통하여 제주국제자유도시를 조성함으로서 국가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 (약칭 제주특별법) 제1조 <목적>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한 물음

그래서 묻습니다. “왜 국제자유도시인가?” 이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한 물음입니다. 개발이란 궁극적으로는 개인적 가치들의 반영이며, ‘자신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인위적인 작업’입니다. 이른바 ‘국제자유도시’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실질적으로 누구의 관심과 이해에 따라 추진되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다시 고쳐 물어야 합니다. “국제자유도시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역사회 내부에는 다양한 사회계층이 존재합니다. 그 어떤 논리를 거기에 대입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이해관계가 단 하나의 입장으로 대표될 수는 없습니다. 구성원 개개인의 삶의 가치를 지역사회 보다 큰 ‘국가’라는 추상적 단위에 통합하려는 것도 한낱 이데올로기일 뿐입니다. 개발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지역주민들의 질적 생활향상’이지, 지역사회의 외형적 성장만이 아닙니다. 물론 후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 보거나, 후자가 이뤄지면, 전자가 저절로 이뤄진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만일 이때 소수의 동적부분과 지리적 개발효과가 결국 지역의 나머지 부분에 파급되고, 그리하여 주민들의 질적 생활향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낙관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착각입니다. 이러한 착각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듯, 그곳에서 사용되고 있는 표현들 속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개발의 효과를 장밋빛으로 채색하고, 극히 일부의 효과를 전체로 일반화하여 부각시키면서 작동하고…. 그건 극히 비합리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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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자치경찰단은 지난 7월 제주시 조천읍 와산리 번영로 인근 곶자왈 일대 산림을 훼손한 부동산 개발업자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사진은 훼손된 곶자왈의 모습. ⓒ 제주의소리DB

지역주민들의 ‘의미 있는 삶’이 파괴된다면

‘제주특별법’이 추구하는 이른바 ‘국제자유도시’가 한쪽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 시대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개발전략이라면, 그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지역주민들의 관심과 이해에 따라 추진돼야 합니다. 독특한 문화와 역사의 담지자인 지역주민들을 도외시한 개발은 그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국가발전’이라는 큰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그럴싸한 이유를 든다고 하더라도, 지역주민을 무시한 ‘정치적 설계’는 주민들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합니다. “개발의 대가로 자연이 훼손되고, 그리하여 지역주민들의 ‘의미 있는 삶’이 파괴된다면, 그런 개발은 차라리 그만 두는 게 낫다”는 주장은 괜한 트집이 아닙니다. 지역의 인문과 자연을 훼손하는 개발의 과잉은 지역주민들 삶 자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합니다. 지역주민들은 개발의 부작용만을 고스란히 떠맡게 됩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물음의 형식을 취하는 건 세간의 통념을 깨기 위한 것”이라고…. 거기엔 ‘변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국제자유도시는 우리들에게 최선인가?” 무거운 이야기를 너무 직설적으로 하는지 모르지만, 제 생각은 부정적입니다. ‘행정규제의 폭넓은 완화’와 ‘국제적 기준의 적용 등’으로 제주자연의 파괴를 손쉽게 하고, 그리하여 우리들의 ‘의미 있는 삶’을 거칠게 하고 있다면, 정말이지 ‘국제자유도시’는 우리에게 가당찮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국제적 기준’운운하면서 개발과정에서 수반되는 주민들의 저항을 억제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것은 ‘개발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되묻게 할 만큼 극히 자극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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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시 조천읍 신흥리 바닷가에 위치한 관광개발사업 예정지 전경(붉은색 원안). ⓒ 제주의소리DB

제주의 상품화

물론 우리도 세계의 흐름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만큼 사고(思考)의 폭도 넓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계를 보는 시계(視界)가 이 좁은 지역에 한정되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세계의 큰 흐름을 나뭇가지 하나로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순진함입니다. 아니,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나 ‘제주의 상품화’로까지 읽혀지는 ‘국제자유도시’의 구호의 근저에는 우리의 땅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에 다양하게 존재하는 정신적 문화적 가치마저 상품화 할 수 있다는 엄청난 생각이 도사려 있는 게 아닌지? 저는 그게 두렵습니다. 당연히 ‘내다 팔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관점을 무시한 채,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의식마저 경제적 가치와 효율성의 지배아래 묶어두려는…. 아직도 그 소식을 실감치 못하고 있다면, 그것도 역시 개발의 추문에 파묻힌 탓입니다. 신경질적으로 이념의 잣대를 들이댈 일이 아닙니다. 곧잘 ‘우물 안 개구리’를 비유로 들지만, 그것이야말로 지배적 담론의 울안에서 지역주민을 능멸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뿐입니다.    

물론 투자유치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본은 다른 형태의 소유물과는 달리 그 이용이 객관적이거나 윤리적인 고려에 의한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본은 윤리를 삼킨다”는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언젠가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만, 자본은 내면적이고 궁극적인 우리들의 목표 앞에 나타나서, 그 목표를 압도하고 지배하려고 듭니다. 목적에 대한 한낱 수단의 이러한 우위는 우리 삶에 있어서 ‘주변적인 것’, 그리고 삶의 기본적 본질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우리 삶의 중심에, 심지어 우리를 지배한다는 사실 속에 정점에 도달합니다. 지금 우리들 생활에 미치고 있는 개발의 모든 측면과 깊이를 고려한다면, 그건 필연적으로 ‘우리의 땅과, 우리들의 정신성의 포기’라는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게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개발전략에 대한 반성

이른바 ‘국제자유도시’의 개발전략을 냉철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이제 그럴 때가 됐습니다. 개발을 자제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자연의 용량’이 한정된 ‘섬’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최소한 ‘대규모 땅이 소요되는 개발’만이라도 막아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확인하고 있듯, 인문환경마저 피폐해집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닥친 위기는 우리들 자신의 막다른 삶의 위기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 식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들은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지옥인가?”에 대한 물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는 강조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개인들은 더 이상 세상을 더욱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진지한 희망을 품을 수 없게 된다”고…. 그건 절망입니다. 냉소주의는 실천적 전망이 없을 때 생겨납니다.

개발에 대한 ‘뿌리 없는 지식과 정보’가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를 ‘보다 나은 세계’로 이끌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 지역사회를 그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분노하고, 그리하여 무엇에 대해 저항할 것인가를 모른 채, 우리들의 주의력은 끊임없이 분산되고 흩어지려 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수한 잡담 속에 갇힌 채, 시간만 소진하고 있습니다.

구호가 화려할수록 그것에 의해 규정되는 현실은 그만큼 그늘지게 마련입니다. 화려한 ‘계몽의 언어’는 허구적입니다. 거기선 언제나 말과 행동이 따로 놉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세계관을 농락하고, 성찰의 기회마저 앗아갑니다. 그렇습니다. 그 어떤 것도 지역주민들의 사회적 맥락과 분리시켜서는 제대로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냄비처럼 끓어오르다가 시간이 지나면 그냥 식어버리고…. 엄연한 사태 전개에는 애써 눈을 감아버리고, 도정책임자의 하찮은 에피소드 따위에 시간과 정력을 쏟아봐야 결국 돌아오는 것은 ‘변두리 콤플렉스’를 동반한 열등감 따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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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 소재 Y기업의 골재 채취 현장 전경. ⓒ제주의소리DB

제주도민의 주체관념을 공고히 하기 위해

우선 ‘제주특별법’을 손봐야 합니다. 이른바 ‘국제자유도시’에 대한 적절한 사회적 역사적 전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제주특별법’ 그 자체와, 그 법이 적용되는 지역사회와, 지역주민들을 두루 문제영역 속에 포섭하여 검토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물론 제1조에 ‘친환경적인 국제자유도시’와 ‘제주도민의 복리증진’이라는 문구를 집어넣는다고 하여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지역사회를 지배해온 법의 정신과, 그 법으로 행정을 해온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지 않고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정책을 운용하는 사람들의 철학과 인식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제자유도시’를 ‘우리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제주특별법’의 추상적 담지자인 ‘제주도민’의 주체관념을 공고히 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 어떤 법이든, 법은 법적 주체의 ‘힘’ 또는 ‘의사’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계획된 사회발전의 도구로 법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공허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법이 옳은 법이기를 소망하는 한, 저는 그것이 바로 ‘사회 구성원 사이의 신실한 약속’이라는 말에 주저 없이 동의합니다.

현실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언가 좀 더 나은 것을 찾아야 합니다. 제가 강조하는 ‘변혁의 의미’도 거기에 있습니다. 일련의 그럴듯한 ‘교조적 생각’에 집착하여 꼼짝 못하는 것은 바보스런 짓입니다. 이른바 ‘국제자유도시’가 단순한 사고(思考)의 과정이 아니라, 사고의 결과를 현실에 적용한 결과인 이상, 모든 것은 지역주민들의 가치에 귀결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는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거해서 나름의 의미를 갖습니다. 가치는 지역의 우발적 부산물이 아니라, 현실을 움직이는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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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홍 언론인. ⓒ제주의소리DB
사람들은 과거로부터 넘겨받은 자연환경에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역시 진리는 역사성을 ‘나의 것’으로 하는 곳에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실현될 수 없는 영원한 꿈이라고 하더라도, 꿈이 아닌 현실에서는 우리 고장을 ‘그 비슷한 곳’으로라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제 생각이 부질없기가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말에 힘이 있기 위해서는 말을 아껴야 한다”는데, 이건 또 무슨 실속 없는 수다입니까. / 강정홍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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