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길이 약 3.53km에 동서 길이 2.5km. 신생대 제4기 화산 활동의 결과로 이루어진 화산도 우도.누워있는 소의 형상과 같다고 하여 예부터 소섬(쉐섬, ‘쉐’는 ‘소[牛]’의 제주어)이라고 불렸다. 성산포항에서 북동쪽으로 약 3.8km 떨어져 있는 우도는 제주도 연안에 산재하는 부속도서 가운데서 최대의 면적을 보유한 섬이다. 섬 모습이 와우형(臥牛形)으로 고려사에서 목종 5년에 해중용출(海中湧出) 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우도는 무인도로 방치되어 있던 섬으로 《탐라순력도》의 에서도 확인되고 있듯이, 섬
섬 속의 섬인 추자도(楸子島)는 44개의 유·무인도가 모여 있는 군도(群島)의 형국이 바다 가운데 가래나무(楸)의 열매를 흩뿌려 놓은 것 같다는 데서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후퐁(候風)도 혹은 주자(舟子)도로 불리던 섬이다. 후풍도는 고려시대 삼별초와 관련한 지명이다. 바람 부는 방향을 살피는 섬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에서 주자도는 위치를 헤아리는 표도지로 이용됐다는 뜻에서 붙어진 이름이라 한다. 나주, 해진, 강진으로 출발하는 바닷길로 3일 밤낮이 걸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상·하추자도란 지명을 쓰기
‘더할 가’의 가(加)에다 파도를 뜻하는 ‘누’의 한자음 파(波)와 ‘섬’인 도(島) 자를 쓴 가파도(加波島).파도에 파도가 더해지는 섬이라 해서 '물결이 더한다'는 뜻으로 더우섬(더위섬, 더푸도, 더바섬), 덜바디섬(가을파지도)이라 했다. 또한 섬 모양이 덮개모양이라 해서 개도(蓋島), 하멜표류기에서는 퀠파트(Quelpart)라 기록한다. 가파리는 면적이 0.84㎢으로 대정읍 모슬포항에서 5.5㎞ 거리에 위치한다. 어업을 주업으로 하는 섬마을로 조선 영조 때 별둔장(흑우장)을 설치하여 소를 방목한다. 바다와 싸우고 때로는 순응하며
구좌읍 송당리에 위치한 성불오름에 성불천이 있다. 성불오름은 높이가 361m로 한자어를 빌어 성불악(成佛岳), 성불암(成佛岩)이라 쓰고 성부람·성보람·성불오름 등으로 기록한다.정상부 바위가 염불하는 스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알려진 말굽형 오름으로 풍수학적으로 옥문형이다. 이 오름에는 고려시대 창건돼 약 500년간 부처를 모셨던 성불암이 있었다고 한다. 《북제주군문화유적》(1998년)에서 “성불암은 송당리 성불오름에 있는 고려시대 사찰터”라고 조사한 바 있다.오름의 북동사면은 여성을 닮은 형상으로 그 밑에서 성불천이란 산물이 솟아나 작
1만 8000년 전 제주 서쪽 고산리 앞바다 땅속에서 올라온 마그마는 바닷물과 만나면서 격렬하게 폭발했다. 그때 솟구친 화산재들은 화산가스, 수증기와 뒤엉켜 쌓이고 쌓여 ‘화산학 교과서’라 불리는 지질 명소 ‘수월봉’을 탄생시켰다. 고산리 해안가는 화산섬의 생성과 지하수의 부존 및 함양의 모든 것을 보여 준다.산물과 관련하여 한장동 마을 어귀와 엉알길(벼랑아래 있는 길) 검은모래 해변에도 마을을 지켰던 산물이 있다. 한장동은 수월봉 남쪽에 ‘넙은드르’(넓은 들의 제주어)에 형성된 동네다. 한자 차용 표기로 광전동(廣田洞)이라고도 하
성산일출봉에서 뜬 해가 한경 수월봉 너머로 기울면 제주의 하루는 문을 닫는다는 고산리. 돌아가는 것을 막았다고 하여 차귀(遮歸)라 했다. 고려 때부터 차귀진이 설치된 군기고(軍器庫)까지 있었던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새지로 마을 이름을 신두모리라 했다. 그 후 주민의 자주성과 주체성 확립을 위해 당산봉이 있다 해서 당산리라 부르다가 고산리로 바뀌었다.이 지역은 중등 국사교과서에 수록된 국가지정문화재(제412호)로 지정된 선사유적지다. 한라산의 지형적 영향으로 가뭄을 겪는 등 기후적 영향이 심한 지역이여서 가뭄일 때에는 고산리 수월봉에서
해안마을 용수리의 옛 이름은 지사개(지삿개·지세개·와포) 또는 벗개(우포), 군영개(군영포), 범질포 등 다양하다. ‘지사’는 기와의 제주어로 ‘기와를 구웠던 곳’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산리와 대정 신평리 등에서 생산하는 기와, 옹기 등을 육로로 옮겨와 이곳 포구에서 제주성으로 실어 날랐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알려진다.용수리 명칭의 유래는 마을 역사와 관련이 있다. 용당리에는 ‘용못’이 있는데, 용못의 한자어 표기로 용수라고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가뭄에도 샘물이 아주 잘 나와서 다른 마을 사람들이 ‘신승물’이
용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는 용당리의 옛 이름은 용소 또는 용못이다. 그래서 용당(龍塘)은 한자 뜻 그대로 용못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은 1956년 한경면이 출범하면서 용수리에서 분리되었다. 이 마을은 현무암층의 암반지대와 설덕(돌들이 엉가정기 쌓이고 잡초와 나무가 우거진 곳이란 뜻을 가진 제주어)으로 이루어져, 넓은 들판이 없어 군데군데 빌레(너럭바위의 제주어) 사이사이에 밭을 일구고 살았던 척박한 마을이었다. 장마나 비가 왔을 때 현무암 사이로 물이 모두 빠져나가 바다 쪽에서는 산물이 있으나 마을 가까운 곳에는 식수가
신창리는 서두미라 부르던 마을로 1910년에 두모리에서 분리됐다. ‘새로 창성한 마을’이란 뜻으로 신흥번창(新興繁昌)하라는 의미다. 마을 어귀에 우마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축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그래서인지 설촌이 배경이 되는 산물로 두모리 먼물처럼 소가 발견했다는 쉐물(새물, 쇠물)이 있다. 이 산물은 신창천주교 맞은편 우측으로 난 올레길 따라 50m 지점에서 용출되어 '새물원'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쉐물은 새로 만든 마을이고 그 마을에 있는 물이라고 해서 ‘새물’이라고도 한다. 구전에 의하면 산물 일대는 울창한 숲 지대로, 소
두모리는 지형적으로 함진 곳이 많고 오목한 곳이 많아 땅을 파지 않아도 ‘굴헝(웅덩이의 제주어)’에 물이 풍부한 지역이다. 자연적으로 취락이 형성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마을이었다. 예전 두모리는 금등, 한원, 신창, 용당을 포함한 대촌이었으나 신창리가 한경면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협소한 마을이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제주 섬에서 두모는 동물의 머리에 해당하고 구좌 지미봉이 꼬리라서, 머리에는 털이 있기 때문에 두모라 칭했다고 한다. 두모리의 옛이름은 ‘뒤미, 두미, 두못개’라 하였다. 남사록에서 한라산을 두무악이라 했으며
길을 따라서 물결이 햇살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바다와 ‘백년초’ 손바닥 선인장에 흠뻑 빠질 수 있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큰 너럭바위가 포구에 있어 ‘한개(대포), 한독잇개(대독포)’라고 했던 금등리다. 예전 한림면에 속해 있던 이 곳은 도덕적인 나라였던 옛 중국의 등나라 등(騰)자를 따서 ‘금등리’다. 형세가 마치 지네 등과 같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고, 가옥은 지네의 발과 같이 비교적 저지대에 산재해 있어서 ‘지네골’이라고 한다.이 마을 바닷가에도 손도물(손드물, 손두물, 손딧물)과 비래수(비릿물)라 부르는 산물이 솟고 있어
판포리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배 형국'을 띄고 있다. 배의 배꼽 쯤에 해당되는 부분에 산물을 판 것이 배에 구멍이 뚫린 격이 되어 마을에 화를 자초케 됐다는 구전이 전해오는 '너른개' 또는 '널개'라 불린 마을이다. 그래서 판포리는 판(板)과 같이 넓은 포구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을 가졌다. 조선 초기에 ‘판을포’라 불리다가 조선조 말기에 판포(板浦)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예전에는 한림읍에 속했지만 지금은 한림읍 경계 지점인 한경면에 편입됐다. 판포리 지경에 와서는 물이 귀했으며, 판포리에는 식수로 이용할 만한 산물이 많지가 않다
마을 안 금동산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금능리의 옛 이름은 배령리(베령이, 盃令里) 혹은 배령포다. 마을 중간에 잔과 같은 동산이 있으므로 배령리(盃令里)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고려사에는 ‘1002년(고려 목종 5년) 상서로운 산이 바다 가운데서 솟아 나왔다’고 기록한다. 비양도가 솟아오르면서 해일로 인해 마을이 침수되고 주민들이 전멸되다시피 한 후, 마을이 새로 생겼다고 한다. 모살(모래의 제주어)이 많아 모살동네라고도 부르는 바닷가는 멸치잡이가 성행했던 곳이다.금능해수욕장과 배령포구 사이에 장수콪(장사콪)이 있는 마을 바닷가에는
협재(挾才)란 이름은 재주 있는 석학자(碩學者)가 많이 배출되는 마을이란 뜻이다. 예전에는 섭재(섭지), 협재암(섭재바위)이라 했다. ‘암’이란 지명을 사용한 것으로 볼 때 바위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주호시대 선사유적(州胡時代 先史遺蹟)으로 볼 때 동굴을 주거지로 삼고 굴 속 산물을 식수로 쓰면서 넓은 해안 지역과 산악 지역을 생활 무대로 한 혈연 공동 집단이 형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재암천, 매치물, 원물, 수릉물, 속바지물, 샛굴물 등 산물이 풍부했던
제주시 한림읍 옹포리에는 삼별초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고려 장군 김통정이 삼별초군을 이끌 때 삼별초 본진이 옹포 포구로 들어왔다. 해안망태(海岸望台)와 본성을 축조하여 명월진(明月鎭)을 둔 항몽 역사의 시발점인 셈이다. 삼별초를 격퇴하기 위하여 상륙 작전을 전개한 여·몽 연합군 본대도 이 포구를 이용하여 입도했다.마을 이름은 ‘바위 너설로 이뤄진 개’이면서 하나뿐인 포구라는 뜻에서 ‘독개’라고 불렸다. ‘독’은 ‘너럭바위(제주어로 빌레)’로 빌레로 형성된 개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마을은 ’돌캐, 돌코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한수풀에서 ‘한’은 제주어로 ‘많다’는 뜻이다. 한수풀은 ‘많은 숲’이란 뜻이겠다.예전 한림리는 모래황무지로 모살 동네를 중심으로 취락이 형성되고 숨북이로 뒤덮인 곶자왈 지대였다. 숲이 많다고 다림동(多林洞) 혹은 하대림, 알한수풀이라고 불렸다. 대림리에서 한림리까지는 참나무와 느티나무 등이 울창한 넓은 숲을 이뤄 ‘한수풀’ 마을이라 했다.한림리는 숲만 많은 것이 아니라 물도 많았다. 마을 모래밭 주변에는 샘들이 솟아 사람이 살기 좋은 조건이 되었으며, 굴 형태의 샘인 알정굴, 웃정굴, 생이물, 묵은새미, 할망물, 지루개 등 많은
옛 명월리는 상명리(느지리), 옹포리(독개), 동명리(동명월), 금악리(금물악) 등을 포함하는 대촌이었다. 상명리는 웃명월, 동염리는 동명월, 명월리를 서명월이라 했던 탐라 명월현의 본거지였다. 명월리는 옛 명월진의 중심지로 탐라순력도의 명월조점(明月操點)에서 수류내(月溪川)를 그리고 천(泉, 샘)을 적어 놨다. 증보 ‘탐라지’에서는 “성안에 샘이 하나 있는데 마른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맛이 매우 달다”며 “내와 같이 분출하는 샘, 천만군사가 길어다 쓸 수 있는 무궁무진한 물”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볼 때 명월진성 일대는
명월진성 가까이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진근이(鎭近村)이라 했던 제주 한림읍 동명리. 동명월로 명월진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명월진성은 제주도 지정문화재 29호다. 이원진 제주목사의 ‘탐라지’에 보면 “명월 땅은 냇물이 풍부하나 성곽이 없어 비양도와 가까워 왜선이 칩입을 방지하기 위해 축성하였다”고 한다.냇물이 풍부하여 성곽을 축성했다고 기록된 것처럼, 동명리 마을은 옛부터 ‘수류천(水流川)’이라 부를 만큼 물이 풍부한 마을이다. 그래서 물왓(밭) 동네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마구수(馬口水)라고 지칭한 옹포천 물줄기인
제주의 ‘물’은 다른 지역 그것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뿌리내려 숨 쉬는 모든 생명이 한라산과 곶자왈을 거쳐 흘러나오는 물에 의존한다. 그러나 각종 난개발, 환경파괴로 존재가 위협받고 있다. 제주 물의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는 요즘, 남아있거나 사라진 439개 용출수를 5년 간 찾아다니며 정리한 기록이 있다. 고병련 제주국제대 토목공학과 교수의 저서 《섬의 산물》이다. 여기서 '산물'은 샘, 즉 용천수를 말한다. 가 매주 두 차례 《섬의 산물》에 실린 제주 용출수의 기원과 현황, 의미를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