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이후 서양의학이 과학과 결합하면서 고대 그리스 히포크라테스 의학 이래로 면면히 이어 내려져 오던 의료 휴머니즘 전통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의사의 예의범절과 환자에 대한 동정심을 강조하던 전통적인 의료 휴머니즘에 과학에 뿌리를 둔 의사의 진료 역량이라는 덕목이 추가된 것이다. 흔하게 듣는 질문, 즉 “실력은 뛰어나지만 차가운 의사와 실력은 조금 부족하지만 따뜻하고 인간적인 의사 중에 누구에게 내 몸을 맡길 것인가?”라는 질문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으로 생겨난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다수 사람은 실력 있는 의사를 택할 것이
필자가 일하고 있는 미술관은 특이하게도 거대한 공원을 관리하고 있다. 행정적으로는 미술관이 공원을 관리하는 걸로 돼 있지만, 실은 미술관이 공원 안에 안겨있는 셈이다. 미술관의 예산과 인력 상당 부분이 공원을 관리하는 데 들어간다.지난 한 해 동안, 공원에 관한 여러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한 가지 의문점을 가지기 시작했다. 왜 애써 나무를 동글동글하게 자르는 것일까? 모든 풀나무는 그 나름대로 자연미를 가지고 있는데, 왜 궂이 천편일율적으로 동글동글하게 이발을 할까?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이모저모를 알아본 결과, 이것이 정원 관리에
1.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날마다 마주하는 나라 밖 뉴스들 대부분은 전쟁 관련된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전쟁은 좀처럼 종식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온갖 미디어에 의해 송출되고 있는 이들 전쟁의 폭력적이고 야만적 모습을 목도하면서 반전평화를 염원하는 세계시민은 슬픔과 안타까움과 허탈감과 분노에 휩싸여 있다. 무엇보다 이들 전쟁이 표면적으로는 적대적 대립과 갈등에 놓여 있는 당사자들 사이에 국한된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경제적 및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복잡한 이해
은유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은유에 사용된 단어의 의미는 달라진다. 동양사상에서 액체를 대표하는 물은 세상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낮은 곳에 임한다는 좋은 의미였다. 반면에 사회학자 바우만(Zygmunt Bauman)은 액체의 다른 특징인 ‘유동성’에 주목해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라는 개념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견고함이 무너졌음을 은유적으로 드러냈다. ‘근대’로 번역된 ‘Modernity’는 ‘현대’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Liquid Modernity’는
‘천하, 세계와 미래에 대한 중국의 철학’무슨 뜻인가? 제일 먼저 뇌리에 떠오른 것은 두 가지 확신과 한 가지 의심이었다. 20세기 초엽 서구의 민주와 과학에 열광하던 이들의 반격, 서세동점西勢東漸에서 동세서점으로의 점등, 그리고 세계주의와 패권주의의 관계. 저자가 궁금했다. 자오팅양(趙汀陽). 중국 인민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에서 철학자 리저허우(李澤厚) 지도하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현재까지 같은 연구소 연구원 겸 인민대학 철학과 박사논문 지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북경대, 청화대 철학과 강좌교수이자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활동이라는 의미로 ‘활동적 삶(vita activa)’이라는 용어를 들면서, 그에 속하는 것으로 ‘노동’, ‘작업’, ‘행위’를 제시하고 있다. 노동은 인간의 생명 유지와 관련된 필수적인 것들을 생산해 내는 활동으로 일상적이고 반복적이며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다. 작업은 건축이나 예술 작품 같은 물건이나 구조물을 통해 물리적 세계에 영구적인 형태를 만들어 내는 활동으로 필수품보다 오래 지속하는 것을 제작하면서 인공적인 세계를 산출하게 된다. 행위는 노동이나 작업과는 달리 물질
예술의 기원은 종교다. 종교는 삶과 죽음에 직면한 인간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인간과 생명과 우주에 대해 기도하며 사유하고 실천하는 삶의 태도이자 방법이다.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종교의 기원과 변이, 존재 방식 등은 각기 상이하지만 간절하게 염원하는 기도의 마음이라는 공동분모는 큰 틀에서 대동소이다. 염원과 기도의 마음은 예술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 역사시대는 물론 선사시대의 유물과 유적들에서도 인간의 염원과 기도를 담은 예술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종교적 제의와 예술이 밀접하게 관계를 맺은 것은 수천, 수만년의 기나긴 세월동안
1.인터넷과 각종 첨단 미디어를 매개로 한 의사소통 없이 일상을 살기는 어렵다. 가뜩이나 ‘e-메일’ 대신 ‘편지’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오래되고 낡아 퇴색된 통신 수단으로 간주하기 십상이다. 통상 ‘편지’ 쓰기는 필기 도구와 종이류를 이용해야는데, 이것은 전자 통신 기기를 매개로 하는 글쓰기의 방식 면과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정녕,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편지’와 연관된 문화는 퇴행적일 수밖에 없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할 운명인가.2.그래서일까. 장이지 시인의 시집 ‘편지의 시대’를 펼치기 전 생뚱맞고 의아스러웠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가 1851년에 펴낸 ‘소품과 부록’을 번역한 것으로, ‘소품’에서 ‘삶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을 ‘부록’에서 ‘인생론’을 추려서 실은 것이다. 2023년 한해를 철학자가 쓴 행복론과 인생론을 읽으면서 마무리하는 것도 좋겠다 싶다. 자기계발서를 곧잘 읽었던 필자는 그 어떤 자기계발서보다 이 책이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과 함께, 스토아 철학자들이 쓴 책 중에서 (지난번에 소개했던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말고도) 세네카의 ‘행복론’이나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 등을 추천한다. 또 권하고 싶은 책에는 톨
붉은 겨우살이의 생존제주 토종 붉은 겨우살이의 삶은 참으로 치열하다. 시쳇말로 생존에 진심이다. 식물 생존의 필수조건인 광합성의 능력이 부족하여 숙주를 찾아 기생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운명을 타고 났다. 땅에 떨어지면 죽는다. 아니 멸절한다. 그러니 악착같이 숙주가 될 나무에 기대야 한다. 붉은 꽃이 둥지 모양으로 펼쳐진 것은 새의 도움을 받아 번식하기 위함이고, 단단한 참나무에 구멍을 뚫는 여린 뿌리의 견고함은 참나무의 수액을 얻어 살기 위함이다. 참나무인들 어찌 넉넉함으로 다른 것의 기생을 허여하겠는가? 몸뚱이를 부풀리며 저항한
평온하던 삶에 갑자기 비극적인 사건이 닥쳤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런 비극이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몸담은 공동체 그리고 내가 거주하는 지구 행성 전체의 문제라면? 분명 코로나 팬데믹은 그런 종류의 비극적 사건이었다. 매일매일 발표되는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를 통해 불분명하지만 강렬하게 감각되는 비극. 처음 비극이 닥쳤을 때 우리는 모두 어리둥절하고 불안과 공포에 떨었지만 동시에 그것을 이해하고 이겨내기 위해 여러모로 애를 썼다. 그렇게 4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지금 팬데믹의 기억은 어느덧 희미해져 간다.
수, 사칙연산, 기하학, 확률·통계, 미적분, 함수. 수학의 주요 영역이다. 우리 일상에서 수학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다. 숫자를 통하여 시간과 날짜를 접하고,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또한 계산기가 있으니 문제될 것이 없다. 기하학 등의 분야 또한 그 결과를 알면 그만이지 과정을 알 일은 아니다. 이렇듯 우리 일상에 붙어 있으면서도 멀리 있는 수학. 이 수학을 붙잡고 인생 일대의 고민에 빠졌던 10대의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 또한 수포자, 즉 ‘수학을 포기한 자’로서 국어와 영어에 집중하며 대학입시 관문을 통과하느라 애를
1.최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 공격과 이스라엘의 대대적 보복 공격은 해당 지역의 분쟁 차원을 넘어 국제사회의 이해 관계가 개입되는 전쟁으로 비화되고 있다. 아울러 지구촌은 팔레스타인 대 이스라엘로 나뉜 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첨예화되는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유럽과 미국의 정치권력은 평화와 인도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이스라엘의 파상적 공격을 지지하고 있는 이중잣대를 드러낸다. 그야말로 이스라엘은 서방측 지지 아래 압도적 군사력으로 하마스를 괴멸시킨다고 하면서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대한 무자비한 무력 행사를
몇 주마다 돌아오는 북세통 책 소개가 반갑지만, 원고를 쓰는 과정은 괴롭다. 책 내용을 제대로 파악했는지 글을 어떻게 구성할지, 원고를 제출할 때가 되면 좌불안석이다. 게다가 윤리나 실천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경우에는 ‘자격지심’에 쓰는 게 주저주저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꼭 그런 책이었다.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책의 흐름에 따라 전개하자고 생각됐다. ‘행복, 미덕, 중용, 정의, 우정’은 책의 흐름에 따른 연결고리에 해당한다. 번역본이 여러 권 있다. 그 중에서 철저하게 독파한 책은 없지만 최근에 읽은 책으로 하는 게 좋
청인淸人과 기인旗人가끔 잊는다. 고대 중국은 국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국가란 말은 원래 제후가 다스리는 영지인 국國과 경대부가 먹고 사는 식읍食邑인 가家가 합친 말이다. 국가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네이션(nation)이나 컨추리(country), 스테이트(state)도 사실 민족이나 지역의 의미가 강하다. 다만 국가를 영토와 주권을 보유한 사회조직이라고 정의한다면, 서양의 경우 그리스 도시국가가 이미 국가 형태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 주권은 국가의 주인이 아니라 천하의 주인, 즉
2009년부터 의사 국가시험에는 기존의 필기시험 외에 실기시험이 도입되어 시행 중이다. 실기시험은 의사가 갖추어야 할 역량 중에서 객관식 문항으로는 평가하기 어려운 영역을 위한 것으로, 다양한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를 면담하고 신체 진찰을 하여 진단과 치료 계획을 세우는 능력과 응급처치나 상처 관리, 채혈 등의 기본진료술기 능력을 평가하고 있다. 실기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환자 역할을 할 사람과 모형이 필요한데, 살아 있는 환자 역할은 표준화 환자(standardized patient, SP)라고 불리는 훈련받은 연기자가 담당하며 이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를 벗어난 지 80년이 되어가지만 우리는 아직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식민지로 전락하기 이전의 국가체제를 이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압제 로부터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해방을 맞이했으나, 식민지 이전에 존재했던 한반도 전역의 온전한 나라를 세우지 못한 우리는 진정한 독립에 이르지 못했다. 스스로 만든 해방이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들의 세계지배 질서 재편이라고 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얻은 해방이기 때문이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반쪽짜리 독립은 곧 남북의 전쟁으로 이어졌고, 전쟁이 끝난 지 70주년을
1.흔히들 시집 맨앞에 자리한 ‘시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심드렁히 여기고는 곧바로 시집의 시편들을 읽지만, 어떤 시집을 읽다보면 ‘시인의 말’에 자꾸만 시선이 붙잡힐 때가 간혹 있다. 내 경우 박일환의 시집 『귀를 접다』가 여기에 속한다. 젊어서는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굴리려고 했다/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돌아보니/겨우 옆으로 살짝 밀어놨을 뿐이다— 「시인의 말」 중에서‘시인의 말’이 한 편의 시라 해도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 이 말이 딱히 시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지금‑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관용에 대한 논의는 서구 종교전쟁의 시대에 대거 등장했다. 이때 써진 책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로크(John Locke, 1632-1705)의 ‘관용에 관한 편지’다. 존 로크는 오늘날에는 다른 맥락에서 여전히 중요성을 지니는 ‘관용’을 그 당시 가장 험악한 종교분쟁의 시대적 배경에서 ‘편지’라는 형식으로 담아냈다. 로크는 관용이야말로 참된 교회를 구별하는 가장 분명한 기준이라고 보았다. 종교를 핑계 삼아 다른 사람을 박해하고, 고문하여 사지를 절단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죽이는 자들에게, 그들이 정말 그 일을 우호적이고
고대 바다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루쉰은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원래 길이란 없었다. 사람이 처음 다니기 시작하면서 점차 많은 이들이 그 뒤를 밟아 길이 생겼다고 말한 바 있다. 육지의 길은 능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바닷길을 내는 것은 그리 녹록지 않다. 너른 바다를 그저 항해하면 되지 무슨 길이냐고 할지 모르나 무지의 소치일 따름이다. 옛날 바닷길을 지나는 선박은 서너 가지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정상적인 것은 상선과 어선, 그리고 객선인데, 이외에 비정상적인 것이 있으니 노는 부러지고 닻도 끊어져 하염없이 흘러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