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근대건축 산책] (24) 전화번호부로 본 제주성 일대 문화 공간 분포변화 下 1970년대 도소매업 가운데 서점은 일반인들이 용이하게 방문해 스스로 지식과 교양을 쌓아가는 문화공간이라 할 수 있다. 1974년 전화번호상의 제주 동지역에서 서점은 총 9곳이 운영되었다. 그 중 4곳의 서점이 읍성내에서 운영되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읍성내는 일반적인 소비경제활동뿐만 아니라 나름대로의 문화계층이 문화소비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약국은 총 29곳이 운영되었는데 그중 15곳의 약국이 읍성내에서 운영되어 일반...
[제주 근대건축 산책] (24) 전화번호부로 본 제주성 일대 문화 공간 분포변화 #. 1914년 지적도상의 옛길과 1974년 전화번호부를 이용한 생활문화공간의 시사점 1914년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지적도는 거의 원형이라고 할수 있는 제주읍성의 흔적을 기록을 잘 남겨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1914년 지적도상의 필지형태와 지목에 기초하여 당시의 제주읍성의 정확한 위치와 관아시설의 위치, 옛길의 형태와 위치, 그리고 읍성내 시민들의 주거공간분포 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국립지리원에서 제공되고 있는 가장...
[제주 근대건축 산책] (23) 4.3사건 당시 학교 피해와 흔적들 下 - 문헌자료에 근거한 피해학교시설의 복원 #. 문헌자료로 본 일제강점기 학교건축의 특징분석 국가기록원의 일제강점기 학교도면아카이브 자료 분석 4․3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학교의 당시 이미지를 복원하는 것은 토벌대 주둔 및 주민수용소, 학살 장소로 이용되었던 시설로서의 학교를 이해하는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기록으로 정리해 둠으로써 향후 역사교육자료로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기초적인 자료로서의 가치 때문에 의미 있는 작업이다. 4․3사건은 1948년 4월1...
[제주 근대건축 산책] (22) 4.3사건 당시 학교 피해와 흔적들 #. 들어가며 제주지역의 1940년대는 혼란의 시기였다. 특히 제주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4․3사건으로 인해 일반 주민뿐만 아니라, 비교적 넓은 공간과 시설을 가진 학교시설은 그 전개과정에서 크고 작은 피해를 겪을 수밖에 없는 공공시설중의 하나였다. 피해학교시설의 경우 교사(校舍)의 물리적 피해뿐만 아니라 교사(敎師)와 학생들도 희생되는 등 대표적인 4․3사건과 관련된 역사적 가치를 갖는 공간이자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에서 2차례...
[제주 근대건축 산책] (21) 건축가 김중업 이야기 下 #. 제주대학교 구본관, 어떻게 건축되었는가? -임시시설에서 용담도 캠퍼스의 시대로제주대학 구본관이 건축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제주대학교의 변천사를 간략하게 기술할 필요가 있다. 도립 초급대학에서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는 과정속에 깊은 뜻을 가진 학장과 김중업의 인연으로 한국건축계의 대표건축물이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제주대학교의 초창기의 캠퍼스는 1952년 6월 도립 제주초급학교(제주향교를 임시시설사용)로 출발한 이후 1955년 4월 도립 제주대학(한국피혁주식회사 건물과...
[제주 근대건축 산책] (20) 건축가 김중업 이야기 #. 들어가며두 번째로 소개할 건축가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왕성한 건축활동을 하였던 한국건축계의 거장 김중업이다. 김중업은 같은 시기에 활동하였던 건축가 김수근과 함께 한국건축계의 양대 축이라 부를 만큼 건축이라는 동질적인 목표를 추구하면서도 각기 다른 건축가치관으로 작품활동했던 건축가이다. 1922년 3월 평양태생으로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요꼬하마(横浜)고등공업학교(현 요꼬하마국립대학)건축학과에서 본격적인 건축을 공부하게 되었다.1941년 12월에 수석으로 졸업...
[제주 근대건축 산책] (19) 건축가 김태식과 제주에서의 작품한동안 쉬었던 [제주 근대건축 산책]의 연재가 다시 시작됩니다.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해방 전후 제주에서 활동한 국내 출신의 건축가들을 다룰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한국근·현대건축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1945년 8월17일 전국공업기술협의회 창립을 시작으로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건축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후 동년 8월25일 건축협의회 결성, 동년 9월1일 조선건축기술단 결성, 그리고 동년 12월에 조선건축사회이 창립됨으로서 해방 원...
[제주 근대건축 산책] (18) 이승만 대통령과 국립제주목장, 그리고 특호관사 下 목장 내에는 물이 고이는 지역을 막아 댐을 만들고 이 물을 활용하여 가축급수장과 식수로 공급하기 위한 풍차가 설치되었고 매설 수도관의 길이가 30리에 이를 정도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현대화된 동양최대의 국립목장이 준공됐다. 건설공사는 서울소재 동명토건이 낙찰되어...
[제주 근대건축 산책] (18) 이승만 대통령과 국립제주목장, 그리고 특호관사 上이승만 대통령과 제주는 그다지 좋은 인연을 맺지 못한 것 같다. 가장 큰 원인은 4․3사건 당시 국정최고 책임자였다는 점과 사태수습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뒤따른 결과에 대한 책임때문일 것이다.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겪
삼안식(三安式)주택 공공기관에 의한 주택공급 이외에 개인에 의한 주택이 건축되기도 하였다. 그 중 하나가 당시 제주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던 J.P 맥그린치 신부(이시돌 성당)이 지은 삼안식(三安式)주택이다. 삼안식(三安式)주택은 이시도레식 주택이라고도 불려졌다. 건설된 주택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 같으며, 현재 이시돌 목
[제주 근대건축 산책] (16) 전란기의 제주와 주거 上
[제주 근대건축 산책] (15) 제주4·3 관련유적과 그 의미 下
제주의 1940년대부터 50년대는 혼란의 시기였으며 동시에 근대화로 가는 변혁의 시기였다. 제주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4․3사건으로 인하여 소개령이 내려진 소실된 중산간 마을을 비롯하여 관련 유적이 제주도 전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제주 근대건축 산책] (13) 다케나카 통조림 공장 근무자로 마을에 남은 유일한 생존자인 김태겸 할아버지(83세.한림읍 옹포리 488번지)는 해방 후 1950년에 공장에 들어갔다. 당시 옹포에는 다케나카 통조림 공장 외에도 감태공장, 전분공장, 얼음공장 등이 들어서 있어 조용할 날이 없었다. 옹포 뿐만 아니라 한림, 협재 등에서도 일하러 다녔다. 김씨가
근현대를 가로지르는 열쇳말 중 핵심은 산업화, 공업화, 도시화로 꼽을 수 있다..
[제주 근대건축 산책] (11) 일제 수탈의 흔적, 진지동굴의 의미 1945년 일본군 해군이 작성한 를 보면 제주, 서귀포, 모슬포, 한림, 김녕, 표선, 성산 지역을 중심으로 연안방어를 구축하는 계획이 수립된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제주와 모슬포지역 항공기지 방업에 핵심을 두었다.연안방어구축
태평양전쟁과 ‘결7호’작전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아시아지역을 중심으로...
[제주 근대건축 산책] (9) 일제강점기 일식 주택 下칠성골 중심으로 당시 경제활동을 하던 일본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식민지 지배적 관계가 잘 드러난다. 중심지에는 점포와 주거를 겸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2층 규모의 주택겸상가가 많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제주자동차주식회사를 비롯하여 일본인을 상대로 영업했던 여관 등 당시
[제주 근대건축 산책] (8) 일제강점기의 주택정책과 주거형태 上일제강점기에 행정관료뿐만 아니라 기업과 가족 등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한국내 거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거주하기 위해 주택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일제장점기 일본인주택을 일식주택(日式住宅), 즉 일본식 주택으로 부른다.일제강점기의 일식주택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주택정책을 간략하게 살펴 볼 필요
[제주 근대건축 산책] (7) 제주의 관문, 근대를 열다 '산지항'우리나라의 전근대와 근현대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내내 쇄국 정책을 펼치며 나라 문을 닫아걸었던 흥선군이 물러서고 일본의 강요에 의해 '개항'하면서다.비행기도 뭐도 없던 시절, 배는 섬과 섬, 대륙과 대륙을 잇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때문에 항구를 연다는 것은 새로운 변화를 맞아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