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를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 편집자# 두 아들과 함께 437km 완주를 성공한 아빠 스페인 산티아고길에 제주올레 간세 표식을 심기 위해 긴 출장을 다녀왔다. 간만에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 들른 건 지난 8월 초. 헌데 1층 식당 겸 카페 입구에 들어
7월 12일,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 언덕이 오후의 눈부신 태양 아래서 우리를 반겼다, 마치 제주의 어느 오름처럼 봉긋이 솟아오른 나지막한 언덕. 아! 산티아고 순례자들에게 ‘희망의 언덕’, ‘환희의 언덕’이라 불리는 몬테 도 고조(Monte do gozo)다. 그 순간 언덕 한가운데의 순례자상도 제법 또렷하게 보였다. 갑자기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는 이곳에 다시 온 것이다. 한 순례자로서가 아니라, 제주에 길을 낸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으로서. 단순히 걷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곳에 우리의 길 표식인 간세와 제주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를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 편집자최연소 제주올레 완주자 기록이 곧 깨어질 것이다! (이제까지 최연소 완주자의 나이는 만 6세) 만 5살짜리 어린이가 그 주인공이란다. 올레 통신-길을 걷는 올레꾼들 사이에서 전파되는 올레 소식-을 통해 이런 즐거운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를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 편집자‘쇠이유’(문턱)를 알게 된 것은 거의 20년 전인 2003년 무렵이었다. 몸과 마음이 다 피폐해지고 방전된, 요즘 말로 ‘번아웃(burnout)’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갖가지 운동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금복식당 이야기간 만에 길 이야기 말고, 식당 이야기를 하련다. 보기보다 까다로운 나는 식당을 자주 찾지 않는 편이다. 위생은 그다지 따지지 않는 편인데 소리와 분위기에 민감해서 텔레비전 소리가 나는 식당은 일단 피하는 편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심지어 코드가 잘 맞지 않는 사람과 회식하고 나면 먹은 게 얹히곤 한다. 기자 생활할 때는 아무나 만나야 하고, 뉴스가 생기면 어떤 자리라도 가야 하니 불편한 식사 자리도 꾸역꾸역 가야 했다. 그래서 기자 생활을 때려치우고 고향 제주로 길 내러 내려오면서 결심한 것 중 하나가 ‘밥맛없는
제주올레의 공식 파트너 기업 (유)퐁낭에서 꾸리는 제주올레 완주여행팀이 첫 발을 내디딘 것은 지난 2월 4일. 11코스를 걸을 때 함께 했는데, 그들은 벌써 제주시 권역을 다 돌았단다.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동참을 못하다가 2월 21일에 21코스를 걷는다기에 확 마음이 끌렸다. 만사 제쳐놓고 참가하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작점인 1코스와 함께 마지막 코스인 21코스는 늘 내게 각별한 애정을 느끼게 만드는 곳이었으므로. 게다가 땅끝 오름을 의미하는 지미봉 꼭대기에서 제주 남동쪽 바닷가 풍경을 내려다보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다.
이 겨울 한 번쯤은 아름답고 따뜻한 내 고향 서귀포를 떠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곳도 매일 지내다 보면 감흥이 덜해지는 법이고, 떠나봐야 정주하는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 새로워지는 법이다. 숨죽여 엎드려 있던 여행 본능도 긴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꿈틀대기 시작한 걸까. 이곳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보고픈 마음이 갈수록 간절해졌다. 그럴 즈음, 강원도의 한 공기업이 올레길 성공 사례에 대한 특강을 요청해 왔다. 평소 같으면 1박 2일 일정으로 충분히 끝낼 만한 일정이었다. 허나 여행이 고팠던 나는 특강과 여행을
그녀의 이야기를 쓰려고 하니, 벌써부터 가슴 한켠이 아려온다. 허나, 그녀는 이런 나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서 활짝 웃으면서 말할 것 같기도 하다. 에이 이사장님, 그냥 담담하게 쓰세요. 제가 올레길에서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잘 아시잖아요. 그리고 제가 온 이곳은 언젠가는 이사장님도 오실 건데요 뭐. 그래, 용기를 내서, 한 해가 저물기 전에 그녀의 이야기를 쓰기로 한다. "어디서 왜 다치셨어요?" 라는 물음에 활짝 웃기만 하던 그녀그녀를 처음 만난 건 2019년 1월 30일. 사회적 기업 퐁낭이 주관하는 여행 프로그램인 ‘올레캠프’에
혼자 여행하기는 왠지 용기가 나지 않는 사람, 하지만 제주올레 길은 꼭 걷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들을 위해 완주자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은 초창기부터 있었다. 사무국 내부에서도 그 필요성을 제기하는 스탭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그때 바쁜 일들을 해내느라고 우리는 그 일을 오랫동안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그러다가 그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은 올 4월부터다. 가을 완주 여행 프로그램이 시작된다기에 첫날 합류하겠노라고 자원했다. 일주일 단위로 모집하는 완주여행팀 기간에 아무 때나 한 번은 합류하기로 방침을 정했지만, 기왕이면 첫
그 자리에 예초기 유통회사 대표가 있을 줄이야제주올레 초창기, 우리 사무국에는 그야말로 최소 인원이 일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저런 부수적인 일에는 마치 돌려막기를 하듯, 눈에 띄는 선후배 지인들을 자원봉사로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대부분 즐겁게, 기꺼이 그 궂은일을 맡아서 처리해주었다. 김수환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서귀포에서 나고 자라 잠시 진로를 고민하느라 고향인 서귀포에 내려와서 있던 중, 규슈 관광 추진기구 통역으로 온 누나의 소개로 나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 뒤 그는 제주올레 사무국
여름이 절정을 향해 치닫던 어느 날 오후, 나는 제주올레여행자센터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손님을 만나고 있었다. 한창 이야기에 집중해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었는데, 갑자기 주위에서 요란한 박수 소리가 들렸다. 가족으로 보이는 일행이 직원으로부터 완주증을 받는 모양이었다.나도 덩달아 뒤늦은 박수를 보내면서 자세히 보니, 아이들이 매우 어려 보였다. 그들은 올해 6월부터 도입된 100km 완주 족자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들고 있었다. 슬며시 다가가서 물어보았다. “아이구 기특하기도 해라. 몇 학년이에요?” 아빠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환
길에서는 늘 우연이 따른다. 책으로만 접한 세계적인 작가 파올로 코엘류를 짧은 순간이지만 직접 만난 것도, ‘나는 나의 길을 낼 테니, 너는 너의 길을 내라’는 말로 내 인생을 바꿔놓은 영국 여자 헤니를 만나 반나절 함께 걷다가 헤어진 것도 길 위에서였다. 그 청년을 만난 것도, 헤어진 것도 길 위에서였다. 얼마 전 제주올레 후원회원분들께 보낸 2021년 상반기 뉴스레터에서도 언급한 이야기이지만, 블로그 글에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청년 박시준 또래의 청년들 이야기도 더 나누고 싶어졌다.# 남원포구에서 만나
산티아고 길을 걷고 난 뒤에 고향 제주에 걷는 길을 내기로 결심하고 돌아온 것은 14년 전인 2007년. 그러나 내가 나고 자란 서귀포 구도심으로 돌아온 건 그로부터 2년 뒤인 2009년. 중문 대포포구 근처 빌라에서 전세를 살다가 중문의 바람과 추위를 견디지 못해-이런 이야기를 하면 육지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지만-다시 이사를 결심한 것이었다. 마치 남불 프로방스처럼 따뜻하고 바람이 덜 부는 서귀포 외돌개 안쪽, 정방폭포 윗동네로 이사하니 살 것 같았다.그때부터였다. 정방폭포에서 외돌개까지 서귀포 원도심 구석구석을 날마다 산책 삼아
6월의 첫 날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 들렀더니, 직원이 날 반갑게 맞더니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녀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머지않아 1만 번째 완주자가 나올 것 같아요. 빠르면 오늘내일이나 늦어도 이번 주 안에는요. 그래서 사무국에서 특별한 선물을 주기로 했으니 이사장님께서 사인을 해주셔야 해요.”라고 말했다. 아, 1만 번째 완주자라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사실 425km를 완주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제주올레 길에 대한 관심과 사랑만이 아니라, 시간과 체력과 비용이 뒷받침해줘야 가능한 일이다. 걸어서 제주 한 바퀴를 도
지난해 제주올레 초대 탐사대장이자 첫 동지인 동생 동철이를 떠나보낸 뒤, 코로나 블루와 동철이 블루라는 악재가 겹친 시절을 견디게 만든 건 한라산 둘레길이었음을 이 편지글을 처음 내보낼 때 이미 고백한 바 있다. 그런 한라산 둘레길을 5박 6일 동안 걷는 프로그램을 제주올레 파트너 기업인 사회적 기업 퐁낭에서 만들게 된 건 지난 4월부터. 한라산 둘레길은 한라산 자락의 생태계가 오고생이(고스란히 뜻의 제주어) 보전된 너무나도 거대하고 아름다운 녹색의 비밀 정원이다. 하지만 주민들이 사는 마을 길과 연결된 제주올레 길과는 달라서 대중
어느 날 낯선 여자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고3인 아들이 대학을 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답을 구하기 위해 제주올레를 걸으러 한 달 동안 제주에 내려가는데, 이 길을 낸 이사장님이 응원하는 차원에서 초반에 한 번만 만나서 격려해달라는 것이었다. 살짝 당혹스러웠다. 걸으러 오는 올레꾼을 일일이 따로 만날 시간도 없거니와, 그러다 보면 정작 올레에 꼭 필요한 일을 해낼 시간을 확보하기도 어렵기에. 하지만 고3 수험생이 한 달이나 시간을 내서 길을 걸으러 온 것도 놀라웠고, 간절한 엄마의 요청을 단박에 거절하기도 마음이
4월 초 정말 ‘봄 봄’ 소리가 절로 나는 화사한 날씨였다. 그녀들을 맞닥뜨린 건 21코스 하도리 해안가에서였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띄엄띄엄, 둘씩 셋씩 혹은 혼자서 걷고 있었다. 나는 이곳 해물칼국수와 해물파전으로 유명한 ‘석다원’ 음식점에 지인과 점심을 먹기 위해 차를 세우던 중이었다. 그래도 스탬프 박스가 있는 곳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어서 거기에 눈길을 한번 주는데, 누군가 내 곁에 다가왔다. 혹시 올레 이사장님 아니냐고 묻는다. 예전부터 길에서 자주 받는 질문이다. 허나 요즘처럼 마스크를 써서 얼굴의 절반이나 가린 상황에
그녀를 만난 건 3월도 다 저물 무렵,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였다. 키가 제법 큰 한 젊은 여성이 센터에 완주증을 받으러 왔다. 얼떨결에 첫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던 중 문득 나중에 만나서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스크를 쓰긴 했지만,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보였기에 그녀의 전화번호를 받아두었다. 지난해부터 올레길 위에서 젊은 친구들이 눈에 많이 띈다. 통계로도 잡힐 정도다. 젊은 친구들은 무슨 이유로 올레길을 찾아왔고, 어떤 마음과 시선으로 이 길을 받아들였을지 못내 궁금하던 차였다. #
1월 14일. 며칠 동안 제주 역사상 50년 만이라는 엄청난 폭설이 쏟아진 후 모처럼 맑고 따뜻한 날이다. 내 동생이자 올레길 조성 초반에 어려운 여건에서 길을 내는 데 혼신의 힘을 다 쏟았던 첫 탐사대장 동철이가 일 년 전 이날 하늘 올레로 떠났다. 평소 그 친구의 성격에 비추어 격식을 갖춘 제사상을 받으러 오거나, 위패와 사진이 안장된 갑갑한 납골당에 찾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사후 영혼이 있다면 올레길이나 한번 둘러보러 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어느 코스? 우리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6, 7코스? 아니 아니 머릿속으로
2020년 12월 31일. 코로나로 시작해서 코로나로 끝난 악몽 같은 한 해의 마지막 날 누구랑 걸을 것인가 며칠 전부터 생각했다. 결국 혼자 걷기로 했다. 혼자 생각하고 간절히 기원할 일이 많아서였다. 코스는 최근에 가보지 못한 올레 코스를 떠올리다가 문득 대평포구 박수기정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너르고 높은 바다 절벽 앞에서, 그 위대한 자연이 빚은 조각품 앞에서 무력한 인간으로서 자세를 한껏 낮추고 고개를 숙이고 싶었다. 인간이 자연에 저지른 수많은 해악을 이제 그만 용서해 달라고, 제발 코로나19를 종식시켜 달라고. 서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