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유는 ‘자신의 숨겨진 뿌리를 향해 되돌아가는 가능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 언제나 ‘4.3사건의 언어’에는 가슴 치는 울림이 있습니다. 그건 아픔입니다. 그래도 다시 묻습니다. “잊지 못해 외치는가? 차라리 잊기 위해 외치는가?” 아직도 저는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 부질없음입니다. 역사를 사유한다는 것은 ‘내가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직도 수준 이하입니다. 역시 4.3사건의 주제는 무겁습니다. 사람들은 망각을 두려워합니다....
그렇다면 말해보라. 그곳에 ‘오라관광단지’가 있어야 하는지? 개발에 대한 실존적 물음 역시 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의 의미를 묻는 것은 쉽지 않다. 때로는 의미의 과잉이 더러 버거울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개발의 의미’와 치열하게 대결해야 한다. 그건 이미 우리들의 실존적 물음이다. ‘하나의 요청’으로서의 상정이다. 누구에게나 스스로 자기 삶을 구성해나갈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한, ‘실존이라는 주체’보다 논리적으로 앞서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개...
이대로 가다가는 제주가 남아나지 않습니다. 이 법은 종전의 제주도의 지역적 역사적 인문적 특성을 살리고 자율과 책임, 창의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고도의 자치권이 보장되는 제주특별자치도를 설치하여 실질적인 지방분권을 보장하고, 행정규제의 폭넓은 완화 및 국제적 기준의 적용 등을 통하여 제주국제자유도시를 조성함으로서 국가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 (약칭 제주특별법) 제1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한 물음 그래서 묻습니다. “...
감히 묻습니다. “저 한라산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정직했는지”를…. 1 한라산을 바라봅니다. 소나무 숲의 향기를 맡습니다. 산새들의 노래를 듣습니다. 아침바람과 더불어 숨을 쉽니다. 제 생각도 바람 따라 하늘에 닿습니다. 한라산 품으로 들어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이른 아침, 밭담에 걸터앉아 멀리서 한라산 전체를 조망하는 것은 더욱 즐거운 일입니다. 한라산과, 한라산이 거느리고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 장구한 세월동안 우리를 지켜보면서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현존적 가치,...
10년 동안 우리가 ‘잃은 것’과 ‘얻은 것’들 ‘두 개의 물음’과 ‘하나의 답’ 역시 시간은 변화를 동반합니다. ‘진정한 현재’는 비판적 의식에 투영된 상(像)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그 변화 속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 이른바 ‘특별자치’를 철저히 타자화하여 따져봐야 합니다. 오래된 스크랩을 뒤져 ‘그 당시에 했던 이야기’ 중에서 ‘오늘에 다시 말하고 싶은 대목’을 되풀이 하는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언감생심 ‘회고적 감상’은 주제넘습니다. 이른바 ‘특별자치’를 해석하는 방...
역시 우리의 ‘땅 문제’도 ‘개발정책의 문제’입니다. “100명이 사는 어느 섬이 있는 데, 이 섬에는 출구가 없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어느 사람이 다른 99명에 대해 절대적 소유자가 되거나, 그 섬의 땅에 대한 절대적 소유자가 되거나 결과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어느 경우에나 그 사람은 99명에 대해 절대적 지배자가 되고, 생사를 결정하는 힘까지도 생긴다. 다른 사람들이 섬에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바다로 쫓아내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1839-1897)의 ‘진보와 빈곤...
무엇보다도 그 지적 수준만큼 지혜로워야 합니다. 무지는 죄악 역시 사람은 많이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지식사회입니다.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알아야만 이 험한 세상을 제대로 살아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은 무지야말로 ‘근원적 죄악’이라 했습니다. 불교 승려 ‘나가세나’는 박트리아 왕 메난드로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몰라서 짓는 잘못이 더 나쁩니다. 불에 단 쇳덩이를 어느 한 사람은 모르고 붙잡았고, 또 한 사람은 알고 붙잡았다면, 누가 더 많이 데겠습니까?” “…모르고 잡은 사람이 더 데...
그들은 과연 이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 대답 없는 물음 저는 오로지 동시대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연민으로 묻습니다. “도대체 우리고장에 이른바 ‘사회적 어른’들이 존재하는가?” 여기서 다시 아프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과연 이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러나 그 대답은 어렵습니다. ‘나’도 제가 비판해 마지않는 ‘그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도전적인 물음으로 출발하지만, 오늘도 제 이야기는 그저 ‘괴로운 글자’들을 늘어놓는, 그래서 더욱 ‘체념에 가득 찬’ 말투가...
이 세상의 주인이 되기 위해 ‘한 표’의 준엄함을 보여줘야 합니다. 거리엔 공허한 울림만 가득 참 이상한 선거판입니다. 공천과정에서부터 볼썽사납더니만, 선거운동과정에서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아무리 치열한 선거판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양심이 만나는 영역일진대, 이래도 되는 것인지, 정말 보기가 민망합니다. 최소한 염치마저 없습니다. 역시 정치에서의 양심은 관념적 사치입니다. 누군가는 선거를 ‘축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축제라면 필시 ‘다 함께 살자’는 놀이일 텐데, 요즘 선거판을 보고 있노라...
‘치솟는 집값’…그건 ‘개발정책’의 문제입니다. 선거판에서 들리는 ‘집값 이야기’ 집을 ‘단순한 구조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집은 그저 비바람으로부터 사람을 지켜주는 시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집은 그곳에 살고 있는 가족의 ‘친밀한 공간’입니다. 그때 집은 보금자리가 됩니다. 거주자와 집이 만들어가는 보이지 않은 맥락을 감안하면, 그건 당연합니다. 역시 집은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나섭니다. 혹자는 그걸 ‘거룩한 순간’으로 표현...
‘투표를 잘 하는 것’도 그걸 청산하는 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혈연과 지연, 그리고 학연의 관성 사람은 ‘줄’을 잘 잡아야 합니다. 어떤 줄을 잡느냐에 따라 사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그게 이른바 처세술입니다. ‘탄탄한 줄’을 잡은 사람은 능력 이상으로 인정받습니다. 반면에 ‘별 볼일 없는 줄’을 잡은 사람은 그 삶 역시 별 볼일 없이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은 이처럼 어떤 무리에 속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못해서 무능이지, 그럴 수만 있다면, 그걸 마다할 이유는 없습니...
‘제주사람’과 ‘제주자연’이 하나가 되는 지역사회를 위하여 ‘제주가 제주 아닌’ 듯합니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 고장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어쩌다 거리로 나서면, 모든 게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마치 ‘제주가 제주 아닌’ 듯합니다. 무모한 개발로 자연환경이 날로 수척해지고, 덩달아 인문환경마저 거칠어지고 있다는 지적은 진작부터 있어 왔지만, 요즘 따라 더욱 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예전 같지 않다고 하여 무조건 그 예전이 좋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역사회라고 하여 고정불변하지 않습니다...
4․13총선을 앞둬 다시 ‘선거’를 생각합니다.응원과 투표저는 배구 경기를 보길 좋아합니다. 돌고래처럼 뛰어 올라 상대 진영에 내리꽂는 강타에 속이 다 후련합니다. 세터의 현란한 볼 배급에도 감탄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가 배구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물로 경계를 지어 상대방의 영역을 존중한다는 점입니다. 어쩌다 그 그물에 옷깃만 스쳐도 어김없이 반칙이 됩니다.딱히 할 일이 없는 몸이지만, 제가 좋아하는 팀이 경기하는 날에는 만사를 제쳐두고 TV 앞에 앉습니다. 그래서 신나게 응원을 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온갖 시름이 ...
병신년(丙申年) 새해 벽두에 절박한 마음으로 묻습니다.작은 들꽃의 노래 길가에 핀 아주 작은 들꽃을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다. “너는 여기서…무엇을 하느냐? 좀 바쁘게 일할 수는 없느냐?” 그러자 그 들꽃은 이렇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는 여기에 그저 아름답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가톨릭 신학자 ‘헨리 나우엔’의 ‘창조적 목회’)역시 아름다운 글은 아름답게 읽힙니다. ‘그저’ 그 말…“그저 아름답기 위해 존재한다”는 그 대목이 참 좋습니다. 재인용했지만, 그 감동은 여전합니다. 아주 작아서 도무지 있는 듯 ...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그들과 ‘아픔’을 함께 해야 합니다.자기 정체성을 위하여이른바 ‘제2공항’예정지를 설명하며 제시한 지도에는 마치 땅위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종이에 그려진 지도가 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인식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누대로 내려오는 땅을 일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고려하지 않는 개발은 아무리 거창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본의 아니게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이라는 난민을 만들어 냅니다. 그건 ‘아픔’입니다. 성산읍 온평리를 비롯한 인근 마을의 ‘결사반대’도 그런...
한국사교과서 국정화로 나라가 들끓고있다. 각종 조사에서 반대 여론이 확인됐는데도 정부는 대통령까지 나서 "국정화!"를 외치고 있다. 범위를 좁혀, 제주에서는 4.3 왜곡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정화 추진의 배경과 몰고올 폐해 등을 릴레이 칼럼을 통해 짚어본다. [한국사 국정화 ⑥] 4.3위령탑 앞에서 ‘역사의 아픔’을 생각합니다.▲ 제주시 봉개동 명도암에 있는 4.3 위령탑. ⓒ강정홍기억은 고통이라 했는데…‘역사의 아픔’을 보려거든 4.3위령탑을 찾으라던 당신의 말을 따라 마침내 명도암 이곳에 왔습니다. 당신은 “위령탑...
그 어느 때보다 개발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사고(思考)가 필요한 시점입니다.우리는 ‘자연의 거울이자 상(像)’우리들에게 저 ‘빛나는 한라산’과 ‘아름다운 자연’이 있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하늘이 내린 축복입니다. 그 자체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장구한 세월동안 우리들을 지켜보면서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현존적 가치는 제 둔한 필설로서는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대자연의 숭고함과, ‘마음의 고향’이라는 영적인 풍요로움도 역시 마찬가집니다.이 세상의 모든 것은 거울이자 상(像)입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저 한라산도, ...
그래서 감히 묻습니다. “이 아름다운 자연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정직할 수 있는가”를…▲ 2013년 11월 어느 날 아침 첨단로7길 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멀리 사라봉과 별도봉이 보입니다. 이 아득한 곳에 어째서 지상 6층 높이의 아파트가 가능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허가권자에게 묻습니다. “이 아름다운 경관에 한 점 부끄럼이 없는지”를… ⓒ 강정홍아침 산책길입니다/ 한라산을 바라봅니다/ 소나무 향기가 코끝에 스칩니다/ 산새들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습니다/ 어느새 나도 그 일부가 됩니다/ 바람 따라 내 생각...
“세상 넓은 줄만 알고 자신이 딛고선 ‘땅의 깊이’를 모르는 것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지난 번 제 ‘변변치 못한 글’(2015.08.11. “‘좁은 우물 안’에서도 삶의 여백 만들 수 있다면…”)에서 “비록 좁은 우물 안이지만 거기서 삶의 여백을 만들 수 있다면 세상 넓음을 부러워 할 바 아니다”라는 말을 했더니, 지인이 한 마디 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어디까지나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야” “무슨 말이야” “우물 안 개구리가 어리석은 것은 좁은 우물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지. 그런 좁은 시각으로는 세상을...
우리의 미래전략은 ‘제주사람의 삶’을 지키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노력이어야 합니다. 미래는 의지의 산물 꿈이 없는 삶은 삭막합니다. 꿈은 일상의 고달픔을 견디게 하는 희망의 다른 언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칫 발밑의 땅과 자기 자신의 현실에 눈멀게 합니다. 그럴 때 꿈은 언제나 몽매가 됩니다. 이게 바로 꿈을 이야기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입니다. 우리의 미래전략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미래는 ‘우리의 의지’속에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 하는 기획과 노력에 따라 우리들의 내일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