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의 늙음과 죽음은 평등할지 모르나 죽음이 찾아온 사람이 나의 할머니라면 그에 대한 감정은 저마다의 사연과 이야기만큼 깊어진다. 여윈 손가락으로 만들어 주던 소소한 음식부터 물끄러미 나를 바라봐 주던 시선까지 할머니의 죽음이 앗아간 것 때문에 가슴은 먹먹해진다. 할머니 개인의 이야기로 역사를 말하는 예술가가 있다. 지난 6월 초 제주시 납읍리에 소재한 고 강상희 할머니의 집 마당에서 임흥순의 영화 상영이 있었다. 이 집은 남편인 임흥순과 함께 영화제작사 반달을 이끄는 김민경 감독의 외할머니댁으로 4.3으로 남편을 잃고 한 많은
1990년 뉴욕의 한 갤러리에 전시를 보러 온 관객들은 눈이 커진다. 예술 작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요리하는 테이블 주변으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음식을 먹는 드문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식당에서 식사하고 팁을 주어야 하는 뉴욕에서 공짜로 먹을 것을 주고 있는 장면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음식을 요리한 작가는 바로 ‘리크릿 티라바니자’로 그날 관객들에게 태국 음식 팟타이를 대접한 이후 팟타이뿐만 아니라 태국 커리 등 공짜 태국 요리로 관객을 대접하는 작가로 유명하게 된다. 음식을 공짜로 제공하는 작가라는 이미지는 미국을 넘어
올 한해 수많은 개인전과 단체전, 그룹전, 기획전 등 많은 전시가 열렸다. 예술가로 고뇌하는 모습부터 예술을 한다는 재미에 빠진 모습까지 전시장에서 보이는 모습도 다양했다. 그런 작가들을 위한 미술 제도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필자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본 올해 제주미술계의 변화 몇 가지를 정리해 본다. 먼저 서울 인사동의 인사아트센터 지하에 들어선 제주갤러리이다. 제주도의 지원으로 문화정책과와 제주미술협회가 운영하는 제주갤러리는 고영훈 작가 전시를 시작으로 지난 3월 16일 개관했다. 그동안 제주와 타지에 거주하
제주 출신 작가 중광(1934-2002)이 사망한 지 20년이 된다. 지난 3월 9일이 그의 작고 20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를 추모하고자 중광이 1980년대 전시를 열었던 미화랑이 서울에 있는 예술의 전당 내의 서예박물관에서 그를 기리는 작은 전시 를 개최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전시의 대부분은 1980년대 중광의 작업들이고 나머지 작가들이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정작 그의 작고 20주년인데 제주도에서는 조용하다. 작년 여름 가나아트 회장이 중광의 작품 400여 점을
몇 년 전 작가 H가 건입동주민센터(건입동행정복지센터) 근처로 나를 이끌었다. H는 비탈길 벽면에 붙은 부조들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알던 한 작가가 만든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 작가는 몇 년 전 사망했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사람이라면서 2007년에 제작한 작업이 햇빛과 비와 눈을 버텨내고도 금이 간 데가 하나도 없다고 칭찬했다. 동료 작가의 죽음에 애도하면서 원도심 골목 한 켠에 남은 작업을 알리려는 그의 관심과 친절에 고개가 숙여졌다.사망한 작가에 대한 H의 관심과 친절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건입동주민센터에 들려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한 지 2년, 마스크를 벗지 못하는 일상 속에서도 예술을 향한 열정은 계속 타오른다. 4.3미술제처럼 연례행사로 열리는 전시들도 무사히 치렀고, 산지천 갤러리와 예술공간 이아처럼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전시장도 무난히 운영되었다. 예술곶 산양의 레지던시가 자리를 잡는 와중에 현대카드가 포기한 ‘가파도 아티스트 인 레지던시’가 추가로 제주문화예술재단 관리 체계로 들어와 첫 오픈 스튜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향후 어떤 길을 갈지 궁금케 한다. 올해 ‘프로젝트 제주’의 초점을 제주 작가에 두었던 제주도립미술관이 내년에는
2021년 10월 예년처럼 예술이 넘쳐났다. 코로나바이러스도 예술의 열기를 이기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산지천변과 인근에서 열린 아트페스타인제주와 선흘리에서 바닷가로 뻗은 야생에 펼치는 불의 숨길 프로젝트, 그리고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프로젝트 제주 등등 많은 전시와 행사가 열렸고 열리고 있다. 넘쳐나는 작품 중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 두 점을 소개한다. 하나는 산지천 바닥에 돌담을 설치한 김순임 작가의 이다. 아트페스타인제주의 일환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작가는 전시가 개막일 보다 10일 일찍 제주에 와서 썰물
지구의 기온이 상승하면서 한때 ‘기후변화’라고 불리던 현상은 이제 ‘기후위기’라고 불린다. 이 위기는 단순히 지구의 위기만이 아니라 인류에게도 큰 위협이다. 온실 가스로 인해 기온과 수온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데 그 온실 가스의 대부분을 차지한 이산화탄소는 바로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인간 때문에 생긴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 계속되면서 호주, 미국, 아마존 원시림이 몇 달씩 불이 타기도 하고, 갑자기 내린 비는 폭우가 되어 기존의 생태계를 위협한다. 제주도도 이러한 기후위기의 시대에 예외일 수 없다. 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기후변화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에서 한국미술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소박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미술관 관람이 여의치 않지만 지난 10월 시작된 전시 ‘미지에의 도전, 현대미술가협회’는 김창열 작가가 20대에 참여했던 그룹 ‘현대미술가협회’(1957-1960, 이하 현대미협)를 조명하며 6.25이후 혼란 속에서 꽃 핀 미술을 되돌아보게 한다. 당시 제작된 김창열의 작품부터 박서보, 이양노, 장성순, 정상화, 조용익, 김서봉 등의 작가들의 추상회화 작품과 더불어 오래된 전시 브로슈어들도 한쪽에 전시되고 있다. 전시는 소박하
여전히 위협적인 코로나바이러스는 인류세의 남은 미래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시해 주는 듯 하다. 플라이스토세, 홀로세를 거쳐 인간이 주인공을 자처하는 시대인 인류세에 접어들었다고 하나 사실은 지구를 아끼고 배려하지 않으면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라 희생양이 되기도 쉽다는 교훈을 날마다 깨닫고 있다. 그뿐이랴. 갑자기 다가오는 태풍이나 몇 개월씩 산야가 불에 타고 있다는 해외의 소식은 기후위기의 징표이다. 인류세는 과연 인간을 얼마나 오래 지속가능하게 할까.화산의 섬 제주도에서 인류세를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흥미로운 프로젝
2014년 제주에 이주한 퍼포먼스 예술가 김백기가 문을 연 ‘서귀포문화빳데리충전소’(보통 ‘서빳‘이라고 불리곤 했다)가 지난 2월 말 문을 닫았다. 앞으로 다른 공연 단체가 새로운 모습으로 그 터를 이어가겠지만, 대중음악부터 창의적 퍼포먼스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서귀포의 밤을 밝혔고, 2013년부터 ‘제주국제실험예술제’를 운영하며 제주에 다소 낮선 ‘실험’의 세계를 보여준 ‘서빳’은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들어갔다. 그래서 약 6년에 걸쳐 보여준 ‘서빳’과 김백기의 활동과 의미를 살펴본다. 먼저 2009년 이후 제주로 이
12월 초에 국회에서 제주특별법 6단계 제도개선안이 통과되었는데, 그 안에 들어있던 ‘문화예술의 섬’ 조성 사업도 덩달아 통과되며 앞으로 일어날 변화에 기대를 갖게 한다. 올해도 다사다난했던 문화예술계를 돌아보며 다소 힘이 빠지던 상황에서 기대하지도 않던 소식이라 살짝 놀라울 정도이다. 문화기획자이자 작가인 김해곤이 쓰기 시작한 ‘문화예술의 섬’이라는 표현이 제주의 문화정책에 반영된 것은 민정 6기가 출범하던 2014년이다. 이후 '문화예술의 섬'이라는 기치아래 여러 사업이 추진되었고, 추진 방향을 모색하는 연구보고서가 나오는가 하
‘장소 만들기 (place making)'는 개발과 재생의 바람이 불 때 유행하던 용어였다. 제주도 서쪽 중산간 저지리에 들어선 저지문화예술인마을도 그런 장소 만들기의 차원에서 목적이 분명했던 대담한 프로젝트였다. IMF로 경제가 흔들리고 인구도 줄던 1990년 후반에 훌륭한 예술가들이 모여있는 마을이 생기면 일종의 문화지구로 사람들을 끌어올 수 있다는 꿈에서 시작된 것이다. 1998년 처음 파주의 헤이리가 예술마을로 구상되어 사업이 시작되자 제주도도 1999년 북제주군이 가지고 있던 군유지를 개발하는 사업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2009년 6월 6월 26일 공식적으로 문을 연 제주도립미술관이 올해 10년을 맞았다. 개관 10년, 길지 않은 역사이나 미술관의 역할과 기능은 여전히 불안한 상태이고 개관 시까지 물심양면으로 노력했던 지역미술계의 열망은 점점 망각되고 있다. 지난 10년간 미술관에 관련된 사건, 공과와 실책을 통해 시사점을 살펴본다. 한국미술사에서 1980년대는 문화예술회관 건립, 1990년대 이후는 미술관 건립이 부각된 시기였다. 군사정권이 80년대 주도한 ‘지방문화육성과 활성화’의 사업 일환으로 전국에 문화예술회관 건립되기 시작했고 1997년까
1900년경 비엔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이상의 문화적 의미를 갖는다. 여전히 합스부르그 왕가의 통치 유산이 남아있는 보수적인 도시이기는 했으나, 근대의 물결은 런던, 파리를 거쳐 유럽의 주요 도시로 확산되고 있었고 비엔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과거 귀족 문화와 카톨릭 교회 전통이 강한 이 도시에도 사람들이 모여들며 인구가 늘기 시작했고 도시화라는 변화를 포용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 파리가 근대 문화를 꽃피우며 문화적 도약을 먼저 시도했다면 비엔나에는 조금 늦은 19세기 말부터 나타났는데 비엔나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심리학, 미술
요즘 책과 평론을 보면 종종 ‘21세기 미술’이 등장한다. 컨템포러리 아트(Contemporary Art, 현대미술)가 지난 30여 년간 글로컬 시대의 초국적 미술을 지향하며 비엔날레와 미술관의 기획전을 통해 자리를 잡았다면, ‘21세기 미술’은 컨템포러리 아트의 당위성을 딛고 더 나은 미래의 비전을 담은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삶의 양상이 기술의 발전에 따라 변화하는 현재 향후 다가 올 4차 혁명부터 인공지능까지 새로운 기술이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 상태에서 다소 낙관적인 시각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2
지난 겨울 ‘예술공간 이아’ 레지던시에 참여한 미국 사진작가 키프 카니아(Kip Kania)는 2018년 결과 보고전을 여는 동안 인상적인 설치 작업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아 내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 벽면과 바닥에 영화필름 휠 몇 개를 걸고 지난 영화관의 추억, 자신의 과거에서 추출한 단어들로 벽을 채운 것이다. 그 영화필름들은 예사롭지 않은 환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작년 12월 말 현대극장이 소유주의 의사에 따라 철거되기 시작했다. 1944년 첫 문을 연 이 극장은 도내 최초의 극장으로 1978년 폐관까지 원도심의 문화 역사를 증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외교권을 상실하자 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민영환은 왕에게 조약을 거부하고 파기하라고 상소를 올린다. 그는 명문가 민씨 집안 출신에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로 개화기 여러 정치적, 개인적 굴곡에도 불구하고 공직에 올라 승승장구하던 인물이었다. 고종의 명으로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했고, 1897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식에도 참석할 정도로 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상소를 받은 고종은 이미 쇠락한 국가의 왕으로서 조약을 거부할 입장이 아니었다. 민영환은 자신의 뜻이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 36. 중선농원 갤러리 2의 전시 수년간 귤을 재배하는 과수원이 여러 가지 용도로 진화해 왔다. 최근 한 방송을 탄 의 카페부터 팜파티 공간까지 사람을 끄는 시설을 들여서 변신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힘든 감귤농사에 비해 수익이 떨어지고 감귤을 따야 할 시기마다 겪는 인력난까지 어려운 현실을 고려하면 이런 소소한 변화는 불가피해 보인다. 그런 과수원의 변화 중에 눈에 띄는 곳이 있다. 제주시 영평동에 위치한 ‘중선농원’에 들어온 ‘갤러리 2’이다. 중선농원...
제주도로 터전을 옮기는 이주민의 숫자가 한해 1만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특히 이들 중에는 적지 않은 문화예술인들이 청정한 자연환경에 매료돼 바다 건너 제주로 향한다. 여기에 제주사회는 자연, 사람, 문화의 가치를 키우자는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유례 없던 이런 변화 속에 제주문화의 미래를 고민하는 목소리 역시 높다. 전통과 변화 사이에서 제주문화의 정체성을 지켜내면서 끊임없이 진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고민을 녹여내기 위해 제주출신 양은희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가 [제주의소리]를 통해 '양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