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R-Point, 공수창, 2004)에서는 죽은 무전병이 신호를 보내온다.“하늘소, 하늘소, 여기는 두더지 셋, 응답하라.”죽어서도 구조 요청이 원혼처럼 남아 구천을 떠돈다. SOS는 마지막 구조 요청 신호다. 좀비가 몰려오는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는 살아야한다.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구조 요청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걸까.그렇다면 좀비는 어떤 존재인가. 한때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존재다. 그런데 우리는 좀비처럼 살아왔다. 학생들은 공부에, 어른들은 일에, 누군가는 술에, 사랑에, 꿈에 좀비처럼 달려왔다
문창과에 들어가 처음 쓴 소설 제목이 ‘화신비디오의 여름’이었다. 수업 시간에 소설 쓰는 교수가 처음 쓰는 소설은 자전적인 경우가 많다며 웃었다. 나는 무언가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영화를 좋아해서 비디오 가게에 취직한 현은 프랑소와 트뤼포의 영화 ‘쥴 앤 짐’을 계속 빌려 보는 권에 대한 호기심을 갖는다. 아무리 좋아하는 영화라 해도 두 번 정도 빌리는 일은 있어도 권은 다섯 번이나 됐다. “혹시 영화 전공하세요?” 현이 권에게 비디오테이프를 건네며 물었더니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라고 권은 차갑게 대했다.그 후 권은 여름
장이지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그가 영화를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시 는 이즈츠 카즈유키의 영화이고, 시 는 이누도 잇신의 영화이고, 시 은 시집 링크에서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 을 보고 영감을 받은 작품이라고 밝혔다. 영화를 소재로 한 시뿐만 아니라 시 한 편이 영화의 한 장면 같을 작품들이 종종 눈에 띈다.“노래와 같은 길,/ 구름도 굽이굽이 잘도 간다.// 한 마리는 가다가다/ 늙어서 죽고/ 한 마리는 병들어 주저앉고/ 또 한 마리는 눈이 멀어서
음력 3월 22일봄인데 눈이 내렸다. 기이한 일이다. 산간 마을에는 많은 눈이 쌓였다. 우마가 다닐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평화로운 때의 춘설이라면 흥취가 있겠지만 오늘의 춘설은 불길하다. 하얀 꽃잎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바닷가 마을에는 벚꽃이 폈는데, 이계에서 흩날려 날아온 듯한 눈꽃이 이 땅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저녁이면 옷깃을 여미며 종종걸음으로 귀가한다. 봄은 여전히 멀리 있는 걸까. 언제면 떳떳하게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음력 3월 24일역병이 그치질 않는다. 집집마다 문을 걸어 잠갔다. 이웃이 전염병을 옮길
그럴 때 있다. 그것과 이것으로 나뉘어 분류되는 경우. 인간은 둘로 나눌 수 있다. 영화 ‘벌새’를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 나의 인생은 둘로 나뉘었다. 영화 ‘벌새’를 보기 전과 본 이후로. 하지만 그 분류가 무색하게 우리는 영화 ‘벌새’의 시대를 지나왔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2014년 세월호 참사 등. 그 사이를 촘촘하게 이어져온 수많은 사고들. 누군가의 죽음은 살아남은 사람의 삶을 그 죽음의 이전과 이후로 나눠버린다.1970년 12월 15일에 발생한 남영호 침몰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 악수를 하려다 손을 거두었다. 그도 겸연쩍게 웃었다. 마스크를 낀 모습이 일상이다. 학교도 휴교를 했고, 도서관도 휴관 중이다. 방역복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을 심심찮게 본다. 영화 ‘컨테이젼’이 현실이 됐다. 우리는 영화적 인간으로 살아간다.불안도 전염력을 지니고 있다. 백신이 개발되지 않는 한 이 불안이라는 전염병은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치료제가 개발된 뒤에는 또 다른 신종 바이러스가 창궐할 날이 올 것이다. 어떻게 인간만 진화하겠는가.K는 지난 1월에 찻집을 시작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손님이 거
윤동주 시인은 시인이라는 슬픈 천명을 안고 살았다.“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시가 쉽게 써진다며 자신을 질책하던 시인은 태평양 전쟁이 끝나기 몇 개월 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다.전쟁은 언제 끝날까. 내가 죽으면 끝난다. 전쟁은 롱 테이크처럼 이어진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 지역. 봄꽃이 피기 시작한 그 무렵. 롱 테이크는 시작되었다. 내가 눈을 감아야 롱 테이크도 끝난다.햇빛이 낮잠을 자는 군인을 깨운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영화 ‘컨테이젼’(2011)은 감염을 통한 일상의 공포를 보여준다. 연상호 감독의 영화 ‘부산행’(2016)에서 사람들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좀비가 되었다. 14세기 유럽은 페스트가 퍼져 공포에 떨었다. 인류는 이 바이러스와 끊임없이 싸워왔다. 영화 ‘감기’를 뒤늦게 봤다. 지금 상영되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을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는 걸 꺼리는 요즘이기에 장담하지 못한다. 물론 영화 ‘감기’를 제작한 까닭도 조류독감, 구제역 등의 전염병이 번지는 모습을 목도한 공포에 기인한
벼룩신문이라는 말 누가 만들었을까. 벼룩시장이라는 말에서 나온 말일까. 지금도 뭐 뚜렷한 직장 없이 살고 있지만, 백수 시절에 살던 동네에는 정오가 되기 전에 벼룩신문이 동나곤 했다. 성실한 사람들의 동네였다. 가난한 동네였다. 요즘이야 인터넷이 있지만, 구직을 하기 위해서는 벼룩신문을 펼쳐야 했다. 백수의 특권을 누리며 늦잠을 자고 밖으로 나가면 벼룩신문이 없었다. 옥탑방을 사랑하던 사치스러운 백수였지. 한 번은 바로 몇 미터 앞에 두고 한 아주머니와 동시에 돌진한 적도 있었다. 벼룩신문을 넣어두는 함에 하나 남은 신문. 그것은
1968년 프랭클린 J. 샤프너의 영화 ‘혹성탈출’ 이후 팀 버튼의 ‘혹성탈출’, 맷 리브스의 ‘혹성탈출’ 등 여러 감독에 의해 유인원과 인류의 대결을 그린 이 영화가 계속 이어졌다. 우리는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우리가 먹이사슬의 최상위층에 있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환경 파괴에 의해 지구를 병들게 하는 인류를 보면, 과연 우리가 이 지구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이 든다.1828년 런던 리젠트 파크 동물원이 근대식 동물원으로는 최초로 문을 열었다. 인류는 동물들을 가둬놓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1907년
안판석 감독의 영화 ‘국경의 남쪽(South Of The Border, 2006)’보다 먼저 봤다. 영화 ‘처음 만난 사람들’. 두 영화 모두 탈북자를 다루고 있다. 탈북자 역시 사람이므로 사람 사는 세상에서 오해도 하고, 원망도 한다. 오래 가지 않아 자본주의 물이 들 듯 체제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얼마 전엔 판문점으로 군용 차량을 몰고 탈북한 한 북한군이 남한에서 방송 활동도 하다가 음주운전 단속에 걸렸다. 음주운전은 정말 잘못 된 행동이지만, 탈북자가 음주운전을 했다고 몇 배 더 비난하는 건 차별 의식이 원인이다. 시인 김소월
짤짤이에도 룰이 있다. 홀짝, 혹은 세 개의 경우의 수를 두고 게임을 한다. 동전을 주먹 속에 넣어 감춘다. 이때 한두 번 흔들어준다. 그러면 동전끼리 부딪치면서 동전이 몇 개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사실 거의 감으로 맞춰야 한다. 처음에 동전 몇 닢을 쥐고 있었는지, 동전을 다 같이 흔들 때 왼손과 오른손으로 쓸려가는 동전의 행방을 추측한다. 돈을 걸면 건만큼 가져간다. 판돈을 키우려고 하면 주위에서 저지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재미로 하는 거니까. 가끔 타짜가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타짜는 코 묻은 돈을 다 가져가지는 않는
그때는 동네마다 비디오 가게가 있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명작을 고르곤 했다. 정확히는 좋은 작품이기에 그곳에 꽂혀있었으리라. 고등학생 시절에 나를 성숙하게 한 건 영화들이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택시 드라이버’, ‘첩혈가두’, ‘슬픈 로라’, ‘칠수와 만수’ 등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 나왔다. 몇 해 뒤 그 많던 비디오 가게들은 거의 다 실종되었다. 추억도 미궁에 빠졌고, 기억은 장기미제 사건파일 한켠에 들어가 잠들었다.추억의 영화를 보는 일은 낡은 캐비닛을 열어보는 일과 비슷하다. 그곳에는 차마 버리지 못
어렸을 때 여름이면 화북 바다에서 놀았다. 바닷게처럼 그 바다에서 여름을 지냈다. 여름이면 화북 바다로 이동하는 화북 아이들의 습성이 있었다. 그것이 우리의 생태계였다. 바다로 갈 때는 별도천 따라 걸었다. 민물과 바다가 만나는 곳, 곤을동 부근에서 우리는 첨벙대며 놀았다.해가 저물어서야 집으로 기어들어갔다. 웃통을 벗고 햇빛 아래에서 놀아서 등이 다 탔다. 피부가 다 벗겨질 정도였다. 다른 계절은 겨울잠을 자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여름이 우리의 계절이었다. 바다거북처럼 바다에 웅크려 지냈다.누군가 우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면
남들 다 웃을 때 혼자 웃지 않고, 남들 웃지 않을 때 혼자 웃은 적 있다. 많다. 가끔 어떤 출연자는 무대에서 유머를 하며 혼자 웃는다. 객석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다. 나도 가끔 다른 사람들 앞에서 혼자 말하고 혼자 웃는다. 상대방이 웃든 말든 나 혼자 웃곤 한다.“자, 이제 웃을 준비 해.”재미있는 얘기를 하기 전에 상대방에게 이렇게 말문을 열 때가 있다. 그가 웃을 준비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대를 하게 만드는 건 사실이다. 그가 웃으면 좋지만 웃지 않아도 나 혼자 박장대소하면 된다.나는 이 영화를 보고 울지는 않았다.
예스터데이, 그때 우리는 마냥 꿈만 꾸지는 않았다. 그 꿈을 의심하고 회피한 적도 있었다. 대니 보일 감독이 영화 (Trainspotting, 1996)을 만들 때는 마흔 전이었다. 그가 성공을 바랐다면 그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하지만 기회가 왔다. 거지라고 해도 청춘이면 좋았던 그때. 헤로인 중독자라고 해도 청춘이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영화. 그 영화도 이제 추억이 되었다. 1996년에 나는 강원도 철원에 있었다. 스물세 살 초병은 냉장고계곡 초소에서 은하수를 봤다. 군장에 시집을 넣고 다녔다. 문학에 관심이 있는
우리는 종종 삶을 여행에 비유한다. 이 비유는 낡은 비유이지만 이보다 적절한 비유도 흔하지 않다. 수월한 선택은 별로인 경우가 많지만 이번 생은 이렇게 흘러가는 걸. 이 여행의 출발지는 어디인가. 모든 여행이 그러하듯 우리는 이 여행의 출발지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 여행의 종착지는 집이다. 추석, 설날이면 우리는 집으로 간다. 우리 여행이 시작된 곳, 그곳으로 간다. 그렇다고 다 집으로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한영애의 노래 ‘완행열차’를 흥얼거리고 싶지만 장필순의 노래 ‘방랑자’가 귓가에 맴도는 삶이라니.추석 전날. 아내
대학 졸업 후 서른 살이 넘도록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친구가 있었다. 처음에는 호기롭게 7급 공무원 시험을 보겠다고 했다. 주위에서도 잘 생각했다며 격려하고 응원했다. 대학 때 만난 여자친구도 그를 기다려주기로 했다. 마치 사법고시 뒷바라지를 하듯이 그를 도왔다. 법적으로는 백수이기에 밥을 사는 것도 직장인 여자친구였다. 여자친구는 합격의 날을 기도하며 기다렸다.하지만 낙방을 거듭하자 몇 년 뒤 9급 행정직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하지만 공시족은 점점 수가 늘었고, 합격의 날은 보일 듯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 격려하던 친척들도 해를
영화 (오멸, 2012)의 배우 몰다리 홍상표가 영화 에서는 제주도 출신의 독립군으로 나온다. 그의 현란한 제주어 대사가 반가웠다. 그리고 이내 서글퍼졌다. 어쩌다 제주도에서 머나먼 만주 봉오동까지 가게 된 걸까.제주도는 늘 변방이었다. 현기영의 소설 는 방성칠란과 이재수란을 다룬 소설이다. 변방에서 사람들의 삶은 더욱 힘들었다. 영화 에서 홍상표의 극중 이름은 ‘재수’이다. 감독의 의도가 보인다. 팔도에서 모인 독립군 중에서 제주도 사람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부정한
'영화적 인간'은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 질 들뢰즈의 말처럼 결국 영화가 될(이미 영화가 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글이다. 가급적 스포일러 없는 영화평을 쓰려고 하며, 영화를 통해 생각할 수 있는 삶의 이야기들이다. [편집자 주]#27. 제주시청 부근 투룸창문 밖으로 네온사인이 번쩍인다. 모텔, 편의점, 단란주점, 노래방 등. 큰 도로 근처라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가랑비가 내려 비에 젖은 자동차 소리가 네온사인에 반사 되어 물빛으로 빛난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다. 외부인의 발자국도 발견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