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섬엔 크건 작건 반드시 ‘배(船)를 붙일만한 곳’이 있다. 제주사람들은 이러한 곳을 전통적으로 ‘개, 개창, 개맛, 돈지, 성창’ 이라 불렀다. 이를 유식하게(?) 표현하면 ‘천연포구’다. 거기다 바다로 뾰족하게 뻗어 나온 육지, 즉 ‘코지(곶·串)’는 지난 날 천연포구의 자연방파제다. 코지가 없으면 어촌사람들은 주위에 돌을 쌓아서 어선들의 안식처를 마련했다. 반면, 내(川)가 있어 바다와 만나는 지리적 조건을 갖춘 마을인 경우는 하천 하구(河口)가 그 자체로 방파제이자 천연포구가 되는 곳도 있었다.
제주시 산지천 일대는 제주 역사에서 오랜 세월 동안 회자되어 온 역사의 현장이다. 특히 산지천 동쪽 금산(禁山: 나라에서 관리하며 출입을 금하고 벌목을 금했던 곳) 기슭에는 조선시대 구축된 방어진지(성담)를 비롯하여 풍부한 용천수, 울창한 수림, 그와 어우러진 정자(공신정)와 배움터(삼천서당) 등이 들어섰던 터였다. 그야말로 자연경관과 문화경관이 어우러졌던 제주의 대표적인 명소다. 이를 증명하듯 이 일대는 20세기 초반부터 사진과 엽서, 글, 기록화 형태로 전해지고 있어, 제주의 다른 어떤 곳과 비교해도 이곳 장소성(제주성내 유일의
사진 한 장으로 과거의 ‘그때 그곳’을 접하고 그것을 재구성하다 보면 의외의 반전을 종종 경험한다. 사진 속 장소가 정확히 어디였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시작하여,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기존의 통설적 견해와 다른 새로운 의미의 지평이 열림과 동시에 미처 깨닫지 못한 의문과 질문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문자(글)로 된 기록(묘사)은 철저히 의도적으로 선택된 의미의 세계이지만, 사진은 의도적인 것과 비의도적인 것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특성도 있어서, 단순한 ‘그때 그곳’이라는 사실 확인 기능을 넘어서 시선(視
최근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SNS 및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일본 제품 불매 운동 확산과 여행 취소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100년 전 3.1 운동을 연상케 하는 반일(反日)운동이 100년 만에 사이버 상에서 벌어지고 있다. 일본은 일본대로 한국 정부 불신 기사를 유포하며 일본 국민들을 단합시키는 조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얼마 전 일본인 지인에게 받은 메일 속, 이번 사태 원인을 한국 정부에 돌리며, “한국인에게 지성은 존재하는가?”하는 발언에 순간 나도 ‘발끈!’하여 이만하면 그와의 20년 지
글로벌 21세기, ‘문화교류’가 화두가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인류 역사의 발전은 서로 다른 문화와의 끊임없는 접촉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 상호 작용이 빈번히 일어나는 지역일수록 토착문화는 타 문화와 융합하여 빠르게 발전한다. 이는 문화 전파의 자연스러운 속성이다.그러나 문화 전파의 이면엔 의도적인 속성도 당연히 존재한다. 문화제국주의론(H. 실러)에 의하면 문화 교류는 순수한 동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문화 교류는 정치, 경제적 동기에 의해서 성립된다. 즉 문화 교류의 주된 원인은 국가
일제강점기 사진은 새롭게 부상한 기록문화·기록매체가 되었다. 조사단, 연구단 명목으로 사진기를 지참한 일본인들은 조선 팔도강산을 누비며 필요한 모든 것을 촬영하며, '조선의 이미지' 생산에 주력한다. 사진(기)의 식민지 상륙은 그 자체로 새로운 문명의 도래이기도 했지만, 토착민들에겐 총과 칼에 버금가는 위협적 무기로도 다가왔다. 당시 제주도를 담은 사진들 속에서도 그 흔적이 역력하다.(1) 1910년대 제주성내 관덕정[사진1]은 1910년대 제주성내 관덕정 모습을 담은 것으로 사진집 《제주100년》(제주도 발행, 1996년)에도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