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산포구 주민들은 이 곳을 '집탁개'라고 부른다. '안개'와 '밧개' 두 개의 포구로 되어있다. ⓒ 장태욱 일주도로(1132번 도로)를 따라 토산마을을 향해 차를 몰았다. 토산 마을이 가까워지면 넓게 펼쳐진 용암대지 너머로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 마을의 동쪽 끝자락에 이르면 바다를 향해 남쪽으로 가는 좁은 진입로가 있다. 이 진입로
서귀포 시내에서 성산포 방향으로 일주도로를 따라가면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귤 밭이 길게 펼쳐진다. 서귀포 시내를 벗어나면 제주도내 최대 귤 주산지인 남원읍이 나오고, 남원읍의 동쪽 끝에 있는 신흥1리 마을을 지나면 길은 푸른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 토산리 해안에 이른다.토산리 마을은 표선면에서 가장 서쪽에 있으며, 표선면의 면사무소가 소재하고 있는 표선리에
제주시 병문천과 소용내 사이에 있던 넓은 들판을 과거로부터 '서사라(西紗羅)'라고 불렀다. 과거 이 일대는 땅이 기름져서 농사가 잘 됐다고 한다. 가을에 햇빛이 비치면 넓은 들판이 비단을 깔아 놓은 것처럼 황금빛으로 보였는데, 서사라라는 이름은 그 때문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사봉낙조'를 자랑했던 사라봉이 있는 동네를 '동사라'라 부르던 것과
"촛불집회 참석하겠다는 친구들 꽤 많아"며칠 전 학원 수업시간 도중 고3학생들이 나누는 얘기를 엿듣게 되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를 화두로 한 여학생이 대화를 시작했다. "정부가 광우병 위험성을 알면서도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기로 결정했다더라."그러자 마치 토론을 준비나 한 듯이 다른 학생이 말을 받았다."어
▲ 관덕정 광장 굵직한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었다. ⓒ 장태욱 아주 오래 전부터 제주 관덕정 일대는 제주성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성 내부는 관아가 늘어서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르자 제주목이 설치되었고, 중앙에서 목사가 파견되었다. 관덕정 창건, 제주 관아의 가운데서 군사를 훈련시키는 광장으로 그리고 1448년(세종 30년)에 안무사 신숙청은 관덕정을 창건하였
제주시 삼도1동과 삼도2동의 유래가 되는 삼도리는 삼성 신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삼성혈에서 태어난 삼성의 세 시조는 오곡의 씨와 마소를 갖고 제주에 들어온 일본국 혹은 동해왕국의 세 공주와 각각 혼인을 맺었다. 그리고 활을 쏘아 각각 거주할 땅을 정하였는데, 세 번째로 활시위를 당긴 부을라의 화살이 떨어진 곳이 삼도(三徒)이다. ▲ 삼성 시조 고
송당은 주변 17개의 오름으로 둘러싸인 산간 마을이다. 4·3이 일어나기 전에는 마을 중심부에 상동, 중동, 하동이 있고, 주변에 장기동, 알손당, 너븐밧, 가시남동, 대천동 등 여러 개의 자연 마을을 거느리고 있던 큰 마을이었다. 마을이 한라산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4·3 초기에는 무장대의 영향이 크게 미쳤다. 그러다가 1948
▲ 송당목장 안돌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송당목장. ⓒ 한라산을사랑하는사람들의모임 송당목장 ▲ 조선시대 목장의 문포 송당은 제1소장이 위치했던 곳이다. ⓒ 장태욱 송당목장 1730년(숙종 30년)에 제주목사 송정규는 당시 제주에 난립하던 목장들을 정리해서 10소장(所場)으로 나눴다. 당시 송당은 국마를 관리하던 여러 목장 중 제1소장이 자리하던 곳이다. 정조
▲ 마을 입구 오름을 배경으로 바라보는 유채꽃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 장태욱제주시내에서 동부관광도로(97번 도로)를 따라 30분 정도 차를 운전해서 대천동 사거리에 이르면 송당 마을 경계 내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대천동에서 동쪽으로 길게 뻗은 삼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6km 정도 가면 주민들이 주로 모여 사는 송당 본 마을를 찾을 수 있다.송
▲ 소떼 금악의 목장에서 방목되는 한우들 ⓒ 장태욱 한미 쇠고기 협상이 전격 타결됨에 따라 미국산 LA갈비 수입이 4년여 만에 재개된다. 지난 18일에 발표된 농림수산식품부의 안에 따르면 1단계로 30개월 미만의 소에서 생산된 쇠고기 수입은 대부분 전면 허용된다. 이어 2단계로는 미국이 '강화된 사료 조치'를 공포할 경우 30개월 이상의 소에서 생산된
▲ 보성시장 이도1동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이다. ⓒ 장태욱 중앙로터리에서 남문로터리를 지나 광양사거리에 이르는 이도1동 거리는 과거 제주시 상권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었다. 하지만 일도지구(일도1, 2동), 신제주지구(연동, 노형동)에 새로운 집단 주거공간이 형성되면서 구시가지 상권은 퇴조의 길을 걷고 있다.구시가 상권 중 재래시장의 경우는 상황이 더 열악하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옛 제주성 남문 동쪽에는 오현단이 있다. 1871년(고종8년)에 전국에 사원철폐령이 내려지기까지 이 자리에는 귤림서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 오현단 과거 이곳에 귤림서원이 있었다. ⓒ 장태욱 귤림서원, 유배 정객들의 정신적 안식처1777년 정조시해사건과 연루되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제주로 유배되었던 정헌 조정철이 귤림서원 내에 있
화사하게 거리를 물들였던 벚꽃이 떨어지니 나무는 연두색 새싹으로 새롭게 옷을 갈아입었다. 거리가 온통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쌀쌀한 기운은 간데없이 사라지니 여름이 금방이라도 다가올 태세다. 짙은 나무그늘 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제주시내 중심지에도 있다. 그 중 한 곳이 삼성혈이 자리 잡고 있는 이도1동이다. ▲ 모흥혈 삼성의 시조
18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깃발을 들고 서귀포시 선거구에 출마한 현애자 후보의 낙선 소감을 들었다. 현애자 호보는 정책 대결없는 양강 구도속에 뭍혀 자신의 정책을 제대로 전달할 기회를 갖지 못한것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아울러 민노당 당원 개개인이 혁신해서 대중과 결합력을 높일 때에 보수 독주의 시대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제주시내에서 서쪽 방향으로 향하는 일주도로(1132번 도로)를 따라 40여분 차를 달려 한림항을 조금 지나면, 비양도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해안에 이르게 된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한림1리 바닷가에 속하지만, 조선시대 이전에는 이 곳을 명월포라 불렀다. 고려 삼별초의 난에서부터 이제수의 난에 이르기까지 격변기마다 관군과 저항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
▲ 1136번 도로, 봄이 무르익어 벚꽃과 개나리꽃이 활짝피었다. ⓒ 장태욱 제주 섬 전역에 봄이 무르익었다. 거리에 벚나무가 꽃을 가득 터트렸고, 들녘에는 노란 유채꽃이 바람에 넘실거린다. 춘풍(春風)의 유혹을 따라 발 닿는 곳으로 가니 명월(明月)이 기다리고 있다. 제주시내에서 한림읍 명월리로 가기 위해 1136번 도로로 40분 정도 차를 달렸다. 제주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는 1925년까지 남원면 소재지였을 정도로, 이 일대 지역 문화의 중심지였다. 마을에는 일본 유학생이 많았고 의식 수준도 진보적이었다. 1948년 4·3이 발생했을 당시에도 이 마을에는 큰 폐해가 없었다. 그해 5월에 치러진 5·10선거 당시 주민들이 선거를 보이콧하기 위해 마을 산으로 피신했지만 의귀리
'말(馬)은 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에서도 드러나듯이, 제주는 말을 사육하기에 알맞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언제부터 제주에서 말이 사육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고려시대 몽고 간섭기 이전부터 다른 지방보다 더 많은 수의 말을 길러서 조정의 수요를 감당해 왔음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가 고려 시대 충렬왕 2년
비가 갠 이후라 맑고 투명한 하늘 아래 바람 한 점 없이 포근한 날씨에 차를 몰아 의귀리 마을로 향했다. 제주시내에서 조천과 남원을 연결하는 남조로(1118번 도로)를 따라 40분 정도 운전하면 남원에 도달하기 전에 의귀리 마을에 이른다. 서귀포시 남원읍 중산간 마을에 위치한 이 마을은 410여 가구에 주민 1200여 명이 거주하며 도내 마을 중에서는 최대
마흔이 되어도 어릴 적 벗들은 마음 속에 늘 코흘리개로 남아있다. 그래서 이름을 부르는 데는 별다른 직함이 필요하지 않다. 굳이 필요하다면 시간의 간극을 좁혀줄 어릴 적 별명이 더 있을 뿐이다. 그런 친구가 연락이 왔다. 10년 전 외환위기가 많은 이들을 힘들게 할 때쯤 결혼을 했고, 장사를 시작했다가 빚만 잔뜩 짊어졌던 친구다. 옆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