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멍 보멍 들으멍] 해녀, 해녀 아들, 그리고 나 / 정신지 고기잡이배에 시동이 걸린다. 내가 사는 웃 뜨르(‘윗들’이라는 말로 제주에선 중산간 지역을 말한다) 마을에서는 들을 수 없는 새벽을 여는 커다란 소리에 놀라, 여섯 시가 채 되기 전에 잠에서 깨었다. 평소 같으면 실컷 자고 있을 이른 아침, 조금 전 시동을 건 그 배가 지
16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의 「아미엘의 일기」 장맛비가 잠시 그치고 폭염이 밀려온다. 숲 자락을 씻고 지나가는 비구름이 저 산을 넘을 때쯤 텃밭 고추는 푸른 독기를 품은 채 맵싸하게 익어갈 것이다. 자꾸만 늘어지는 몸과 마음을 일으키며 산 아래 가부좌를 한 바위처럼 허리를 세워본다. 지금 내 생의 시계추는 어디쯤 가리키고 있
아름다운 사람들나이가 들어갈수록 저절로 알게 되는 비밀이 하나 있다. 아름다움이란 삶의 진정성과 같은 말이라는 것을. 껍데기뿐인 아름다움의 유효 기간이 덧없이 짧다는 것을 아는 것은 덤이다.낭중지추(囊中之錐). 사전적 의미는 ‘주머니 속의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사람들
26 자청비 여신 원형 ⑥자청비. 개방적, 도전적이며 자기기획적인 여성 원형자청비 원형은 개방적이고 도전적이며 자기기획적인 여성 원형이다. 그녀가 자기애를 가지고, 이 자기애를 구체적으로 추구할 의도로 이루어진 외출에서 남성을 만난다는 것, 사랑의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녀는 손을 곱게 하고 싶어서 못에 빨래
13 흉노의 땅 서역(西域) 우르무치에서새벽 한 시. 기차에 오르자 바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는데, 감기 몸살이 심해지는지 밤새 잠을 자는지 마는지도 모르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아침을 맞았다. 어제 목이 따갑게 아프더니 이제는 코가 막히는 것이 감기 증세가 완연했다.뿌옇게 흐린 창밖을 보니 유전지대인지 황량한 벌판에
베토벤 교향곡 No.9, 합창. 4악장 '환희에 부쳐' Beethoven Symphony No.9 D Minor Op.125 Choral mov.4 "An Die Freude"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 9번은, 9개의 교향곡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작품으로, 그중 제 4악장은 교향곡 최초로 합창을 도입했
지도를 들여다보고, 걷거나 탈것을 이용하면서 우리는 어느 한 장소를 알아가기 위해...
15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접힌 물살에 깃들어 흐르다가 물살이 양날을 펴는 순간, 깃털은 몸에서 떨어져 나와 이정표를 잃고 말았다. 삶과 몸이 동떨어져 있는 순간 포착된 현재는 그림자를 깊게 드리우고 있다. 그림자 안에서는 깃털의 갈라진 틈새가 확연히 드러난다. 제 마음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이렇듯 선명히 보일 때가 있다.
12 상처투성이 삼륜 자동차와 류위엔 기차역시장 너머로 이슬람 사원의 돔이 보여 발걸음을 그리로 옮겨 갔다. 이슬람 사원인‘둔황칭전스’는 시장 뒤쪽의 주택가 좁은 길을 들어간 곳에 있었다. 이슬람사원의 중국식 표현이다. 사원 주변에는 이슬람 식당도 많이 눈에 띄었다. 이슬람사원을 지나 한적한 큰길 교차
[걸으멍, 보멍, 들으멍] 바람, 돌담, 그리고 할망 / 정신지마당의 금잔디가 하도 예뻐서, 사진 한 장 찍기 위해 대문을 들어섰다. 누가 살지 않을지도 모르고, 누군가 살지도 모를 것 같은 집. 어슬렁거리고 있자니, 허리가 매우 굽으신 작은 할망(할머니란 뜻의 제주어) 한 분이 마당 한편에서 천천히 걸어나오신다. “잔디가 너무 예뻐서 그런데,
18 자연유산 만든 오름, 트랙킹코스로 남길 건가 지난 2007년, 제주도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이래 특별히 관심을 끄는 오름이 있다. 조천읍 선흘리 동쪽에 위치한 고도 454m의 거문오름이 그것이다. 과거에는 이 오름을 '시려니오름' 혹은 '시련악(時連岳)'으로 부르다가 이 오름에 있는 '거멀창'이라는 수직동굴로 인해 '거문이오름'이라 부르게 되었다. 오름은 북동쪽으로 벌어진 말
25 자청비 여신 원형 ⑤ 개인의, 사회와의 조화자청비는 개인의, 사회와의 조화를 보여주는 원형이다.자청비가 처음 그녀가 남장을 한 것은 그녀 속에 불현듯 찾아온, 사랑이라는 단순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다. 남녀 간의 사랑은 사적이고 배타적인 것이어서, 사실 사회 속에서 공정하고 분별 있게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
11 하마터면 여행 접고 돌아갈 뻔 했던 위기안락한 호텔 침대에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잠이 깨어, 밖으로 나가 보니 이미 날이 밝았다. 아침 공기는 약간 한기를 느낄 정도로 서늘한데, 어제의 모래폭풍은 신기루였던 것처럼 잦아들어 조용하고, 봄바람이 가볍게 스쳐 지나간다. 채 7시도 되지 않았는데 어린 학생들은 자전거를
[걸으멍 보멍 들으멍] 생전 처음 밭을 일구면서… / 정신지생전 처음으로 밭을 가꾼다. 씨앗은 뿌려 놓으면 싹이 트는데 몇 주나 걸리고, 그간 밭에는 잡풀이 새싹과 함께 자란다. 그걸 하나씩 뜯고 있자면, 뭐가 새싹이고 뭐가 잡초인지 구분하는데 한 씨름한다. 땡볕에 종일 앉아서 검질(잡초란 뜻의 제주어)을 메고, 돌을 일구어 내어도, 끝나고 나
이 여자, 택시 기사들과 대화 나누길 즐기는 ‘수다쟁이’다. ‘역마살’도 단단히 타고났다. 거기에다 ‘촌스러움’까지 좋아하는 독특하고 야무진 여자다. 그녀의 이름은 정신지...
17 운석 구덩이 같은 분화구, 세계적으로도 희귀 날씨가 덥기는 한데, 바닷물에 들어서기엔 아직 이르다. 이럴 때는 나무와 풀이 산소를 시원하게 내뱉는 산이나 들로 떠나면 좋다.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대기의 축복을 한껏 맛보기 위해 산굼부리를 찾았다. 산굼부리 입구에 들어서니 단체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로 시장에 온 것처럼 주변이 시끌벅적했다. 입구에서 분화구 주변까지 산책로가 조성되었는데, 산책로 주위는
24 자청비 여신 원형 ④ 자청비는 사실 페미니즘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여성들, 그 아름다운 마음이 한 남성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사랑하는 남성 앞에서 차별받고 모욕당하며 의미있는 타자로 인정받지 못한 여성들은 남장을 하고 그들만의 영역에 속해있던 가치를 얻기 위해, 그들보다 서 너
14 스탕달의 '적과 흑'교정에 산딸나무가 피었다. 몽올몽올 꽃봉오리가 맺히는 모습을 여러 날 지켜보았다. 비오는 날이 잦아서 꽃이 피기도 전에 봉오리가 떨어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사뭇 걱정스럽기도 하였다. 하지만 자연은 순리에 거스르지 않는 법, 6월의 햇살에 산딸나무 꽃이 뽀얀 웃음으로 활짝 피어 오가는 이의 눈을 즐겁
무더위가 성큼 발 앞에 다가섰다. 푸른 바다와 시원한 바람을 만날 수 있는 백사장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종달리 바다에서 시작되는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따라 김녕해수욕장으로 차를 몰았다. 연푸르다 희고, 희다 푸른 김녕의 해안은 6월의 햇살 아래 눈이 부시다. 해수욕장의 모래는 체를 쳐낸 것 같이 고와서, 많은 이들이 맨발로 그 맛을 음미하고 있다. 조선 중
23 자청비 여신 원형 ③지속적이고 다정한 그녀의 여성주의 그러나 그녀는 이런 성차별의 모순과 비인간성을 인식하고 또 극복하면서 성과 사랑을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도, 여성집단의 면에서도 그리고 사회 전체의 구도에서도 성공적으로 실현시켜 나간다. 자청비의 여성주의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역시 그녀답게 여성적인 페미니즘을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