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만난 건 초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날, 이중섭 거리에서였다. 십여 년 전부터 알고 지내는 미국 여자 크리스티나와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수다를 떠는데 한 외국 남자가 지나갔다. 크리스티나가 그를 불러 세우더니 내게 소개했다. 서귀포 외국어 학습관에서 함께 영어를 가르치는 원어민 교사 로저란다. 이번에는 로저에게 나를 소개했다. ”이 분이 바로 올레마마야!“(올레의 엄마라는 뜻으로 붙은 내 별칭이다) 그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지더니 한국말로 외쳤다. “아니 이 분이 올레 마마? 서명숙 씨? 맙소사. 설마 꿈은 아니겠
나는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서귀포 구 도심 주변 바닷가와 공원길을 걷거나 천천히 달린다. 집 근처 정방폭포로 향해 물길이 천천히 흐르는 정모시공원을 지나서 아담한 불로초 공원, 진시황의 사신 서복이 이 근처를 지나갔음을 기려서 조성한 서복공원, 여름방학 때마다 물놀이를 즐겼던 자구리 공원…. 춥고 고단하고 외로웠던 서울살이 30년 만에 길을 내러 고향에 돌아오기를 얼마나 잘했던가. 즐겁고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어린 시절을 떠올리거나 ‘나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아름다운 자연을 늘 누릴 수 있는 다이아몬드 수저 출신이구나
그 길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신비롭고, 황홀하고, 고요했다. 그 길을 걸을 수 있어서 정말이지 직립보행하는 인간으로서 행복했다. 정겨운 마을과 바다를 지나고 간혹 오름도 오르는 올레길과도 다르고, 내가 최근 몇 달 사랑에 빠졌던 한라산 둘레길과도 달랐다. 9월 9일부터 9월 20일까지 딱 열하루간 대중들에게 공개된 ‘불의 숨길’ 이야기다. 불의 숨길은 출생 배경부터 남다른 길이다.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거문오름 부근에서 시작되는 이 길은 이곳 주변에서 일하는 자연유산해설사들, 선흘 덕천 김녕 행원 월정리 등 이 일대 마을 주민들
길고 지루한 여름 장마가 계속되던 초여름 어느 날, 찬구 강미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서귀포에서 초·중학교를, 제주시에서 여고를 함께 다녔던 동네 친구. 둘 다 오랜 서울살이를 지내다 시차를 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올레길에서 다시 만난 미순. 늘 그랬듯 전화기 속 그녀의 목소리는 명랑한 종달새 같은 하이톤이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웃는 그녀의 전매특허 미소를 절로 떠올리게 만드는.그러나 뜻밖에도 내용은 심각했다. 병이 악화되어 이제부터는 다른 치료방식을 택해야 한다, 그러니 ‘동행’ 모임에도 앞으로는 참석하기 어려울 것 같다
여자 중사와 두 아이의 완주기 이상하게도, 아니 이상한 게 아니라 그게 정상인지도 모르지만, 첫 편지에도 언급했듯이 올레 완주자들은 코로나19 이후 다달이 늘어난다. 단체 관광객이나 시찰단 회의나 행사 참석자들이 올레길을 찾는 경우는 거의 사라졌지만 대신 개인이 올레길을 찾는 일도 많아졌고 완주자도 1,399명으로 작년 대비 대략 70% 정도로 증가했다. 제주올레 사무국에 있는 시간보다 길 위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기에, 완주자들을 다 만나기는 힘들다. 어쩌다 나도, 완주자들도 그 시간에 인연이 되어서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 동시에
이제는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간다“서서히 세력을 키우면서 서귀포 동쪽 400킬로미터...” 태풍 바비가 한반도를 향해서, 그것도 내가 살고 있고 제주올레 사무국이 소재한 서귀포를 가까이 지나간다는 소식이 TV 뉴스, 라디오 방송 등 각종 매체로 시시각각 속보로 전해졌다. 내 마음도 덩달아 불안해지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역대급이다, 매미와 볼라벤 때 못지않은 위력이다, 제주 해역을 지날 무렵 ‘최강’인 상태에서 30도 이상 뜨거운 바다를 지나면서 더 세력을 키울 것이라는 해설까지 곁들여져서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올
30여 년 만에 고향 제주로 돌아와서 올레길을 내기 시작한 지도 올해로 13년 차. 12간지의 한 바퀴에 해당하는 12년을 온전히 제주의 남쪽 서귀포에서 보냈다.열두 차례의 여름, 열두 차례의 장마를 맞이하고 보낸 셈이다. 육지에 비해서도 제주, 그것도 서귀포의 장마는 특별하다. 고온다습한 지역인지라 비가 자주, 많이 쏟아져서 여름이면 온 천지가 습하고 눅눅하다. 요즘은 건축기술의 발달과 소재 개발 그리고 제습기 사용으로 습기를 많이 잡을 수 있지만, 집 바깥으로 나가면 예전과 다를 바 없다. 게다가 올해 장마는 유독 길고, 징글징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닥쳐와서 참으로 끈질기게 모든 국민들의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는 코로나 19,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역대급으로 길고 긴 장마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을 꺼내기가 어색할 만큼 안녕하지 못한 나날들이 계속된 올해 상반기였습니다.허나, 인간의 무지함과 탐욕도 끝이 없는가 하면 인간의 순수한 의지와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내는 능력 또한 무한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머가 발달했던 시기와 공간이 히틀러의 유태인 탄압의 절정판이었던 유태인 수용소였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