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시간을 물으러 골목 구멍가게에 들렀다. 가게는 가게인데 파는 물건이 몇 개 없다. 강냉이 몇 봉지와 담배, 냉장고의 음료수와 술, 상자 째 놓여 있는 라면...
간만에 태양이 눈부시다. 추위가 걷히고 생기가 돌기 시작한 마을에는 유난히 어르신들의 외출이...
"추운디 고치 노인정 갈탸(추운데 같이 노인정 갈래)?" 길을 걷다 만난 일흔여섯 ...
바람이 모질게 분다. 코끝이 찡하다 못해 얼 것만 같다. ‘걷다 보면 누군가 만나겠지.’ 하며 발걸음을 옮기지만, 종종걸음으로 걸으니 ...
[걸으멍 들으멍 보멍] (28) 한라산에서 띄운 새해 소망 ‘함께’ / 정신지 겨울 한라산에 올랐다. 보이는 것이 온통 하얗게 덮여서일까, 잡상이 보이지 않으니 잡념 또한 없다. 하얀 능선을 날아다니는 시꺼먼 까마귀와 군데군데 보이는 노루 발자국이 반가울 정도로 세상은 단조롭다. 머리 위의 파란 하늘과 눈앞의 푸른 바다가 위아래 없이
날씨가 추워지고 사람의 체온에도 변화가 생기듯, 마음의 온도 역시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날이 추우면 난롯불...
해 질 무렵 부슬부슬 비까지 내린다. 춥고 어두운 바깥세상과는 달리, 시장 안은 저녁거리를 마련하러 온 사람들과 일과를 정리하는 상인들로 북적...
[걸으멍 보멍 들으멍] ‘귓것 하르방’이 남긴 ‘오늘’이라는 유산 쌩쌩 차가 달리는 큰길 한 귀퉁이에 꼬부랑 할머니. 핸드카트에 몸을 의지한 채 조금 가다 앉아서 쉬고, 또 일어나 걷는 할망 모습이 꼭 달팽이 같다. 신호등 없는 건널목을 건너려는데, 차들은 그녀를 보고도 좀처럼 세울 기색이 없다. 불안한 마음에 보
[걸으멍 보멍 들으멍](24) 못 다한 이야기, 끝나지 않은 아픔 / 정신지 아픔은 경험이다. 그것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몸과 마음의 고통, 그 밖의 증세들로 아파하는 것의 경험이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늘, 우리의 시대와 생활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아픔의 경험을 알아 가는 것일까? 의사에게 듣는
한 번 가면 나그네, 두 번 가면 손님인가보다. 얼마 전에 만난 약초 캐는 노부부 생각이나 다시 한 번 그들을 찾았다. 저녁식사...
[걸으멍 보멍 들으멍](22) 슬프지 않은 여자는 없다 / 정신지여기저기 피어난 이름 모를 가을꽃에 정신이 팔린 채 시골 길을 걷는다. 드넓은 가을 하늘 아래 푸릇푸릇 자라나는 취나물 밭이 있고, 그 곁 밭담길을 따라 등이 굽은 작은 할망 한 분이 걸어오신다. 지팡이가 짧아 불편하신 건지, 조금 걷다 서고 또 조금 걷다 서고를 반복하며 그녀는 걷는다. 눈이
어느 한적한 오후, 노부부가 마당에 앉아 산에서 캐온 약초를 말리고 있다. 하르방은..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 한층 많아져 가는 가을, 제주는 참으로 분주하다. 살랑살랑 몸을...
[걸으멍 보멍 들으멍] (19) 영등할망의 사랑스러운 둘째 딸된 사연 / 정신지바다 내음이 물씬 풍기는 할망의 작은 보금자리.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오후의 가을 햇살이 방 안을 온통 노란 귤빛으로 물들인다. 노인이 사는 집이라 아무것도 없어 부끄럽다는 할망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로 올라가 벽에 걸린 손주들 사진을 하나씩 끄집어 내린다. 손주들이
마을 아저씨들은 그녀를 ‘영등할망’이라 부른다. 영등할망은 매년 음력 2월 초하룻날...
[걸으멍 보멍 들으멍] (17) 한림읍 소리꾼 할망의 사람 만드는 소리 / 정신지오랜만에 만난 할망이 몰라보게 야위어있다. 왜 이렇게 살이 빠지셨느냐는 물음에 할망은 입을 크게 벌리고 내게 이를 드러내 보이신다. 몇 개 남지 않은 앞 이가 잇몸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 이가 성치 못해 밥을 못 잡수신 까닭이었다. 그것을 자식들에게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듯 견
[걸으멍 보멍 들으멍] (16) 할망이 풀어놓은 추석 선물 보따리 / 정신지할망은 동네에서 소문난 가수다. 86세의 연세에, 한번 시작하면 사오절 이어지는 기나긴 판소리며 민요들을 가사 하나 빠뜨리지 않고 연창한다. 시원시원한 목청에 춤사위까지 깃들여 할망이 노래를 부르면, 옆에 있던 사람들도 절로 흥이 돋는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여름 한림읍의 한
1929년 태생의 할망 하르방은 두 분 모두 뱀띠다. 뱀은 뱀인데 ‘폭낭(팽나무) 밑 소....
지난봄에도 꽃이 만발했다는 벚나무 밑에 할망이 앉아있다. 할망의 오후는 지나가는 차를 바라보기도 하고 말을 건네는 마을 사람들과 ...
[걸으멍 보멍 들으멍] (13) 고기잡이 아줌마와 내 검정 고무신 / 정신지고무신을 사러 시장에 갔다. “고무신 거믄 거(검은 것) 이수과(있어요)?” 하고 묻자, 주인장 할망(할머니)이 위아래로 내 차림새를 살펴보시더니 고개를 갸우뚱하신다. “누게가(누가) 신을 거냐?” 물으시기에 내가 신을 거라 대답하니, 요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