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 숨, 쉼] 딸과 엄마가 사이좋게 나눠먹어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미리 약속한 네 명의 여고생은 달리기 시작한다. 꽉 움켜잡은 각자의 손안에서는 동전 몇 개가 갇혀 숨 못 쉬겠다고 아우성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고생 네 명은 택시를 잡아타고 산지천에 있는 보리분식으로 가 떡볶이를 먹고 학교로 돌아온다. 네 명의 손안에 있던 동전들이 제 갈 길을 갔기에 돌아오는 길은 편안하게 주먹을 펴고 돌아온다. 30년도 훨씬 넘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같은 여고 추억담의 하나다. 택시비가 얼마였는지, 누구랑 갔었는지, 도대체 왜 그렇...
[바람섬 숨, 쉼] 즐겁게 기쁘게 감사하며 선택의 길 가고 싶어 “엄마, 틴트 하나 사다 줘.”“뭘로?”“이니스OO꺼는 지금 내가 쓰는 거고 올리브O꺼는 새로운 건데…뭘로 하카?” 지금 쓰는 것을 다시 쓰자니 좀 지겹고 새로운 것을 쓰자니 내게 잘 맞을까 확신이 없고, 딸의 고민은 끝이 없었다. ‘아무거나 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내가 결론을 내주었다. 엄마 가기 편한 곳에 가서 살게.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은 선택과 선택의 연결인 것 같다. 틴트 하나 고르는 사소한 선택부터 진로나 사업의 방향을 정하는 큰 선택까지. ...
[바람섬 숨, 쉼] 가끔은 뒤돌아보고 멈춰 서서 세상을 보았으면 한 해가 간다. 해마다 허겁지겁 연말을 보내고 봄이 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 해가 갈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눈 한 번 깜박거린 것 같은데 또 한 해가 가고 있다. 턱 괴고 앉아 생각해본다. 나는 지난 일 년 무엇을 하며 지냈나? 좋았거나 우울했던 몇 가지 일들이 떠오른다. 그 순간에는 발등 불 떨어진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이제 보니 다 지나가는 일이다. 길을 걷다보면 길모퉁이를 몇 번 만나지만 도착하면 다 지나가는 길인 것처럼. 우리 집은 직선거리로...
[바람섬 숨, 쉼] 관계의 가면을 벗어놓고 걸림 없이 정면으로 동시 쓰는 내 친구 김희정은 2015년 첫 동시집 《고양이 가면 벗어놓고 사자 가면 벗어놓고》를 펴냈다. 동시집에 실린 작품들은 당연히 작가가 가장 잘 알고 두 번째는 나라고 혼자 확신한다. 한 편 한 편 써서 보여 줄때마다 (전부는 아니고 가끔) 날카로운 비평을 해주었고(라고 나만 생각할지도) 시 탄생의 배경 이야기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표제작 《고양이...》는 이런 이야기를 품고 있다. 항상 거칠고 사나워 보이는 어떤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시장에 가...
[바람섬 숨, 쉼] “지혜를 주신 스승님 고맙습니다” 좋은 말, 좋은 글들이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열쇠로 쓰이기는 쉽지 않다. 평소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긍하는 원칙들이 막상 ‘나의 문제’가 되면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앞서 걸어가는 남의 등짐은 잘 보이지만 내 등의 짐은 잘 보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좋은 스승님을 만나면 금과옥조(金科玉條)와 삶의 거리가 많이 가까워질 수 있다. 나는 퍽이나 운이 좋아 그러한 스승님을 만났다. 배움이 더딘 내가 스승님이 몇 년에 걸쳐 반복해서 일러주고 또 일러준 가르침을 나는 최...
[바람섬 숨, 쉼] 십년 뒤 보는 가족사진, 익숙하고 편안한 추억이길 아이들 돌잔치 이후 처음으로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언제 어디서나 사진을 찍는 시대에 굳이 사진관을 간 이유는 이벤트에 당첨됐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족사진을 찍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하나, 가족사진이 너무 없어서였다. 각자 찍은 사진들은 있지만 모두 모여 찍은 사진은 귀했다. 애들이 어릴 때는 학교 숙제로 가족사진 가져오기가 있어 억지로라도 모여 찍었지만 청소년, 성인이 되니 일단 모이기가 힘들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여행을 가도 사진 찍기가 힘든 건 ...
[바람섬 숨, 쉼] 최신 기기가 절대 따라올 수 없는 자연의 맛, 멋. 백만 년 만에 한 번이라 말해도 충분할 만큼 아주 오랜만에 한라산 생태숲길을 걸은 게 지난 추석 연휴였다. 그리고 다시 주말을 맞았는데 자꾸 그 길이 생각났다. 능력은 부족한데 일복은 차고 넘쳐 지난 몇 년간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을 돌아보지 못하고 살았다. 지난 일요일 역시 할 일은 많았지만 일단 다 덮고 자연의 부름에 응하기로 했다. 아름다운 자연의 초대에 혼자 가기 아쉬워 친구 두 명을 불렀다. “이렇게 좋은 날씨 다시 만나기 힘들어. 좀 걷자.” 친구...
[바람섬 숨, 쉼] 추석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명절 음식 이야기 정월 대보름, 민족의 명절 추석이 지나갔다. 추석이 지나간 자리에 연휴가 끝난 아쉬움, 그리고 명절 음식이 남았다. 추석 차례상에서 내려진 전, 적갈, 생선 등은 그 날 하루 몇 번 밥상에 올랐다가 밀폐 용기에 담겨 냉장고에서 새 안식처를 찾았을 것이다. 추석 연휴가 끝날 때까지 몇 번 더 밥상에 올랐으면 정말 다행이다. 문제는 연휴가 끝날 때 까지 새 안식처를 벗어나지 못한 음식들이다. 그들은 추석 상에서 대접 받았던 그날의 영화를 뒤로 한 채 다음은 어디로 갈...
[바람섬 숨, 쉼] 대를 이어 계속되는 기름떡 사랑...대를 이어 딸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길 내가 초등학교 학생이었던 1970년대에는 명절 제사 때면 떡을 집에서 만들어 먹었다. 전수조사는 해보지 않았지만 우리 집도, 옆집도, 이모 고모집도 다 그랬으니 대부분 집에서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떡을 먹는 게 소소한 삶의 이벤트가 되었던 시절이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떡은 기름떡이다. 요즘 말로 내 영혼음식이 된 기름떡. 생각의 줄기를 따라 가보니 그 시작에 달콤함, 참을 수 없는 달콤함이 있었다. 기름떡을 만...
[바람섬 숨, 쉼] 태풍 솔릭이 내게 남겨준 유용한 삶의 지혜 제19호 태풍 솔릭이 제주를 지나갈 것이라는 소식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기상청은 진즉부터 솔릭의 경로, 위력 등을 날마다 새소식으로 전했고 행정 당국은 대비 철저를 당부해 모를 수 가 없었다. 그런데 안다는 것과 실천은 별개의 일이다. 그 간극에서 많은 일이 일어난다. 태풍이 온다는 22일 나는 대전과 서울에서 한 달 전에 잡힌 약속이 있었다. 나도 잠깐 고민은 했다. 태풍이 온다는데 괜찮을까. 생각 생각을 하면서 나는 나만의 태풍 경로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어...
[바람섬 숨, 쉼] 높은 세상, 낮은 세상 없다. 다만 내가 사는 세상만이 있을 뿐이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해간다. 특히 우리가 사는 제주는 더 그렇다. 울울창창 나무가 있던 자리에 높은 건물이 들어서는 것은 이제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효자 효녀들의 고향 나들이도 잦아졌다. 땅값이 오르면서 농사짓는 늙으신 부모님이 재력가로 재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에 대한 사실과 거짓이 섞인 별별 소식들이 섬 전체를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소식들은 쏜 살보다 빠르게 사람들 사이로 들어간다. 손을 들어...
[숨, 쉼] 한 해를 보내는 다짐 서귀포에서 일을 마치고 한라산 중턱을 가로질러 제주시로 가는 횡단도로에 진입한 때는 오후 5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간간이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저 멀리서 희미하게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잠깐 망설였다. 그냥 돌아서서 평화로로 갈까, 에이 설마 괜찮겠지. 괜찮았다. 출발하고 30여분 정도까지는. 문제는 그 후였다. 빗방울 섞인 눈발이 뚝 떨어진 기온과 만나면서 도로가 얼기 시작한 것이었다. 앞 차들의 속도가 더뎌지기 시작하면서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갔고 양미간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답답해서...
[숨, 쉼] 제주 해녀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물숨' 개봉을 앞두고 29일 전국 개봉되는 다큐멘터리 영화 은 제주 출신 고희영 감독이 만든 우도 해녀 이야기다. 물숨의 제작과정을 담은 책 ‘해녀의 삶과 숨- 물숨(나남출판사)’에서 고 감독은 어디서나 눈에 걸리는 수평선이 갑갑해 무작정 제주를 탈출, 훨훨 날다 운명처럼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영화를 만든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풀어놓고 있다. 고 감독을 고향으로 발 돌리게 한 사람은 중국 오지에서 만난 미국 청년 제임스. 제주 해녀 이야기를 해주자 처음엔 믿지 않던 자칭 전...
[숨, 쉼] 섬 곳곳이 개발 광풍, 이대로도 제주는 정말 괜찮을까? “게난 앞으로 어떵헐 거라? ”이번 추석에는 한번 쯤 이야기를 나누어보자.“지금 우리가 어떵 해야 나중에 우리 후손들이 잘했댄 헐 건고.” 민족의 대명절 한가위는 오순도순 가족, 친척들이 모여 덕담을 나누며 따뜻한 정을 주고받는 날이다. 명절증후군으로 괴로운 사람도 있고 취업 결혼 여부를 묻는 말 한마디에 가슴이 아린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추석에는 서로 모여 이런저런 많은 말들을 한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우리의 주제와 관심사는 모두 하나로 모아졌다. 남녀 구분 없고 세대 간...
[숨, 쉼] 피하지도 말고, 싸우지도 말고, 더위와 친구하기 덥지 않았던 때가 도대체 언제였던지 헤아리기 힘든 요즘이다. 어제도 더웠고 그제도 더웠고 오늘도 역시 덥다. 내일도 덥다 하고, 그 더위가 다음 주까지 계속된다 하니 가히 ‘더위 전성시대’라 할만하다.해가 들어가도 바람 한 점 없는 저녁, 남편과 딸이 마주 보며 덥다고 축 늘어져 있다. 조금 과장하면 요즘 아이들에게 친숙한 단어로 ‘더위 배틀’을 진행 중이다. 누가 더 얼마나 더운지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것. 그 옆을 지나가며 내가 한마디 툭 던진다. “더...
[숨, 쉼] 수험생과 수험생 엄마의 분투기 아들은 올해 고등학교 삼학년이다. 몇 달 뒤에 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는 그 고삼생의 엄마다. 아들과 엄마의 대화는 아주 짧다.“아니, 고삼이 어떻게...”“고삼이 뭐...”짧은 대화 뒤 흐르는 것은 깊은 정적. 대화는 끝나고 엄마와 아들 사이에는 불통의 물결이 격하게 출렁이기 시작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아들과 엄마는 저마다 하고 싶은 말들을 마음속으로만 쏟아 붓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고삼이 어떻게...”(고삼이 대학생이냐? 최신 개봉영화를 한 편도 놓...
[숨, 쉼] 가을, 나를 보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계절, 더 살찔까봐 종종거리는 말띠 아줌마가 나다.가을 낙엽 굴러가는 소리만 봐도 깔깔 거리던 시절(내가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관용적 표현이라 보면 된다)을 거쳐 치열하게 우울하고 치열하게 열정적이었던 젊은 날을 지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나이 언저리를 살아가는 중년의 여인.공부로 시를 접하던 시절, 시험 출제 빈도수가 높아 반드시 암기해야 하고 모든 행간의 의미를 파악해야 하는 시중의 하나가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였다. 서정주는 가을 국화꽃...
[바람섬의 숨, 쉼] 나의 허운데기 공주 꽃피는 춘삼월을 하루 앞둔 2월 28일 오후 다섯시 사십오분. 사무실에서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며 딸에게 전화했다. 학원 수업 후 씩씩하게 집으로 걸어가던 딸이 용건을 묻는다."떡볶이 먹고 가자. 그냥 거기서 기다려."서둘러 가긴 했지만 워낙 차가 밀리는 시간이라 이십 여 분 늦었다.우리의 약속장소는 떡볶이 가게 앞. 딸이 나를 기다리며 꽤 매서웠던 겨울바람을 이겨내게 한 큰 힘은 공중을 떠도는 와이파이였다.지난 겨울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집안의 와이파이를 끊어버리자 우리 딸의 '와이파이 찾아 삼...
[바람섬의 숨, 쉼] 새해 첫날희망찬 새해 벽두, 만나는 사람마다 쓸쓸하고 괴롭다고 아우성이다.언제부턴가 갑을로 관계를 규정하게 된 사람들이 서로 ‘을’이라며 ‘갑’에 대한 원망, 분노를 털어놓기 바쁘다. 지금 이 갑을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제주 사람은 건설업자와 부동사중개업자밖에 없다는 말도 나온다. 물론 이들도 나름 ‘을’로서의 서러움을 토해내긴 하겠지만 전반적으로 활황이니 묻혀 넘어가는 일이 많다. 이러다가 ‘슈퍼 을 콘테스트’라도 열어 누가 가장 ‘을’인가를 헤아려보자는 말도 나옴직한 분위기다. 희망찬 새해 벽두부...
[바람섬의 숨, 쉼] 한 해를 돌아보는 열쇳말 我 身 心 時 行 我 꽃피는 춘삼월인가 싶더니 벌써 눈 내리는 겨울이다.눈발 날리는 풍경을 보며 아, 아름답다고 감탄했던 기억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만큼 저 멀리 아득하다. 대신 눈길 운전, 가스비 아끼는 보일러 사용법 등등의 사안들이 겨울 낭만의 자리를 채우고 있다.어쩌겠는가. 겨울 낭만에 흠뻑 빠져들거나, 고단한 겨울나기를 고민하거나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은 다 한 가지, 나의 삶인 것을.이것은 좋고 나쁘거나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그냥 삶이다.그리고 그 삶을 살아온 나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