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사는 조총련 소속 친척을 만나거나 그 집안 제사를 지낸 적도 있었지만, 질문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단지 “평양에서 수류탄 제조법을 배워오지 않았느냐”는 추궁만 받았다. 조작간첩을 만들기 위해 흔히 사용한 빌미인 일본 조총련 소속 친척과의 접촉도 아니었다. 공안당국은 수류탄 제조법을 외우도록 한 뒤 허위자백만을 요구했다.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수류탄 제조법을 배웠냐는 질문에 “예”, 평양에 갔었느냐는 추궁에 “예”라는 ‘조작된 진실’을 만들기 위한 정해진 답변 뿐이었다.제주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양영배(72, 실제나이 73) 씨
“너 하나 죽이는 건 파리 죽이는 거보다 더 쉽고, 쥐도 새도 모른다. 바른대로 얘기하라. 이북에 몇 번 건너갔다 왔냐?”군사 독재로 민주주의를 짓밟은 전두환이 정권을 잡던 시절, 군 조직인 보안사령부가 있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압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악명높은 보안사는 제주도에도 민간 기업 형태를 띤 ‘한라기업사’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한라기업사는 보안사의 제주지부다. 당시 도민사회에는 사라봉 근처 ‘한라기업사에 다녀오면 반병신이 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실제 다녀온 사람들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
조카들이 내 형님의 일본 병원에서 돈을 벌어 제주로 돌아온 뒤 고향 사람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했을 뿐,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었다. 하지만 군사 독재정권은 입맛을 충족시켜줄 매력적인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고, 간첩혐의로 모두 엮어 이들을 붙잡은 뒤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끝내 이들은 ‘일본에 있을 때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에 가입했다가 귀국 후 고정간첩으로 활동했다’는 허위자백을 하게 됐다.내용을 전달받은 언론은 ‘간첩 7명 타진(打盡), 대남공작자금 조달 등 암약’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대서특필했다.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있었던 1
2021년 12월. 매서운 겨울바람을 뚫고 제주 상공으로 국내 최초 민간과학로켓 '블루웨일0.1'호가 솟아올랐다.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해안가에서 진행된 민간과학로켓 시험발사 현장. 굉음과 함께 로켓 궤적이 하늘을 수놓자 현장에서는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미미할지언정 의미있는 한 걸음이었다.국내 최초 민간과학로켓 발사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KAIST 항공우주공학과와 해당 학과 학부생 창업기업인 페리지에어로스페이스(대표 신동윤)와의 협업조직 '페리지-카이스트 로켓연구센터'에 의해 설계됐다.이날 발사된 로
서슬 퍼런 공권력에도 진실을 감출 수는 없었다. 제주4·3의 참상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수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2003년 故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공권력에 의한 무력탄압에 공개 사과했다. 이후 4·3은 화해와 상생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발걸음에 역사 왜곡과 노골적인 폄훼가 다시 등장했다. 공동체를 흔들려는 시도에도 4·3을 기억하고 아픔을 치유하려는 지역사회의 노력은 굳건하다. 제75주년 4·3추념식을 맞아 4·3에 대한 책무와 과제를 되짚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편집자 주] “‘죄 아닌 죄’로 아무 말
“무서워하는 게 병이 됐어요. 걸핏하면 “(나를) 잡으러 온다!”고 해요. (나는) “누구 올 사람 없다.”고 해도 막 숨어요. 그땐 땔감으로 보릿대, 유채낭을 사용하던 시절인데, 남편은 누가 자기를 잡으러 온다면서 보릿대를 쌓아놓은 곳으로 가서 그 속에 숨기도 했습니다.” (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 고정일 씨 인터뷰 중)고문 충격에 매일 악몽을 꾸고 입에 대지 않던 술을 됫병으로 사와 들이켜야만 잠들었다. 지옥 같은 날이 계속되자 조상님께 올릴 제삿밥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 뒤엎었고, 뭐든 무서워하는 게 병이 됐다. 큰집
“제일 고통스러운 건 육체적인 고통보다 잠을 못 자게 하는 겁니다. 취조관 2명이 서로 교대해 가며 취조를 하는데, 하루 이틀까지는 몰라도 잠을 못 잔 채 일주일가량 지속되니까 나중에는 날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했지?”라고 물으면 “예!”하고. “했지?, 예!” 그걸로 끝났어요. 그들은 내게 “그래도 너는 잘 봐준 거다. 재판에 가면 알게 될 거야”라고 말했습니다.”(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 김양진 씨 인터뷰 중)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에 있는 형님을 미끼로 간첩 활동
무궁무진한 미래성장 가치가 점쳐지는 우주산업에 제주가 뛰어든 것은 필연적인 도전이었다. 대한민국 최남단에 위치해 있으면서 사면이 바다인 제주는 이미 지리적 측면에서 천혜의 이점을 지니고 있다. 위성을 궤도에 올리기 위한 로켓 발사체는 기술적으로 위도가 적도에 가까울수록 유리하다. 지구가 자전하는 원심력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산업을 선도하는 열강들의 우주기지가 대체로 자국 내에서 적도에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유다.실제 미국이 자랑하는 나사 항공우주기지는 남단 텍사스주에서도 남동부인 휴스턴에 위치해 있으며, 케네디우주센
인류 역사에 있어 우주는 미지의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과학기술 발전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오늘날까지도 우주는 미완의 과제다. 역설적으로 우주산업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시장이기도 하다.전세계 열강들은 앞다퉈 우주산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발표한 '국가 우주산업 수준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전 세계 우주개발 예산 규모는 약 925억달러, 한화로 약 121조원에 달한다. 미국(546억달러), 중국(103억달러), 일본(42억달러), 프랑스(40억달러), 러시아(36억달러) 등에 이어
“제주4.3사건으로 붉은색이 덧씌워진 제주도민들은 사건 이후에도 냉전과 정치공작의 희생양이 되었다.”(제주4.3평화기념관 리모델링 과정에서 사라진 간첩조작사건 전시패널 중)제주도는 4.3 당시 ‘레드 아일랜드’로 규정된 이후 부당한 국가권력에 의해 무차별적인 학살이 이뤄지며 죄 없는 사람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갔다. 붉은색이 덧씌워진 사람들은 한 떨기 동백꽃이 무심히 툭 바닥으로 떨어지듯 그렇게 사라졌다. 부모 형제, 자식, 친구, 이웃 등 내 바로 옆 사람이 피의 광풍에 휩쓸려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 행방불명되거나 차디찬 주검으
IoT, 빅데이터와 함께 4차 산업혁명시대의 핵심기술로 일컬어지는 드론. 제주에서는 드론이 스마트시티 비전과 접목되면서 다양한 서비스 구현이 현실화되고 있다. 지난해 9월 추자도에서 출발한 소형 무인드론은 72km 상공을 날아 제주 본섬에 성공적으로 착륙하며 디지털 물류배송을 현실화했다. 드론 택시도 시범비행을 마쳤다.초지관리 실태조사에도 드론이 활용되고 있다. 목초지의 부대시설 설치나 불법전용 등 이용실태를 드론 영상을 활용해 분석하는 방식이다. 제주 초지 면적은 6970ha에 이를 정도로 넓어서 현장 확인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사회가 입체화되고 다변화되면서 공공갈등은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됐다. 역설적이게도 갈등은 민주성이 발현된 결과이기도 하다. 국민들의 권리의식 속에 정당한 주권 행사의 과정이 갈등이 되곤 한다. 갈등은 기본적으로 상호작용이 전제된다. 찬반의 치열한 논의 속에서 다양한 관점이 반영되고, 이를 통해 창의적인 해법이 도출될 가능성도 있다.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 자체가 사회 통합의 기회로 작용하는 사례 역시 괜한 기대만은 아니다. 집단 간 갈등이 되려 내부 구성원들의 결속력을 다져 조직의 안전성에 기여하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즉, 오늘날에
갈등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목표로 이해, 가치, 감정 등이 대치하는 상태를 뜻한다. 공공정책을 수립하거나 추진하는 과정에서의 '공공갈등'의 전개 과정은 대개 1단계 표출기, 2단계 심화기, 3단계 교착기, 4단계 해소기 등 네 가지 단계로 분류된다. 표출기는 정책 혹은 사업계획의 공표와 이에 대한 이해당사자가 반발하는 단계다. 이전까지의 단계를 갈등 잠재기로 본다면 표출기에 접어들면서 이해관계자는 다양한 수단으로 사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조직 구성 등 구체적인 행동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애초에 갈등 발생 자체를 억제하지 못할
제주 제2공항, 추자도 해상풍력발전, 오등봉공원 민간특례사업, 제주 동부하수처리장, 제주동물테마파크, 제주자연체험파크, 비자림로 확장공사, 송악산 난개발, 서귀포시 우회도로, 제성마을 왕벚꽃마을, 대형마트-아울렛 입점, 제주 국립공원 확대 지정...'갈등'이라는 키워드로 접근했을 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이슈들. 제주를 휘감고 있는 갈등 현안은 양 손으로 꼽을 수 없을만큼 다양하다.제주 해군기지와 같이 짙은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사안, 영리병원 도입과 같이 논란이 끝내 마무리되지 못한 사안,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같이 외부
"제왕적 도지사의 폐단 반드시 없애겠습니다. 그 권력은 여러분들께 고스란히 돌려드리겠습니다. 우리는 2006년도부터 행정단일광역체제로 바뀌었습니다. 그렇지만 갈등이 줄어들기는 커녕 더 커졌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우리가 꿈꾸는대로, 우리가 설계하는대로, 제주는 개척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권력을 나눠야 합니다. 새로운 기초자치단체를 도입해 권력을 여러분께 나눠드리겠습니다." - 2022년 5월 19일 더불어민주당 오영훈 제주도지사 후보 출정식에서"'게매이, 되카이(그러게, 되겠나)'라는 말은 안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현
자치(自治)란 '자신의 일을 스스로 다스린다'는 사전적 의미를 담고 있다. 특별자치도 제주는 문자 그대로 '특별한 자치 권한'을 부여한다는데 방점이 찍혔다. 2000년대 변방에 그쳤던 제주에 있어 특별자치도 도입은 큰 기회로 여겨졌다.특별자치도는 외교, 국방, 사법 등 국가 존립에 관련된 사무 이외에는 자율적으로 결정·집행할 수 있는 소위 연방제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고 있다. 실제 특별자치도 출범 후 제주도가 이양받은 권한은 지난 16년간 4660여건에 달한다. 이양된 모든 권한을 활용한 것은 아니지만,
마을의 자원과 가치를 주민들이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공동체를 조성하기 위한 마을만들기 사업. 시행착오와 현실적 어려움을 넘어 제주 마을 곳곳에서는 ‘작지만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특별자치도마을만들기종합지원센터와 함께 주민 주도의 마을만들기를 통해 희망의 증거를 발견한 제주의 마을들을 살펴보는 연중기획을 마련했다. 이를 계기로 더 나은 제주의 미래를 향한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 편집자아래로는 해발 150m, 위로는 900m까지 기다란 형태로 가파른 경사를 보이는 제주시 애월읍 어음1리. 전체 면
대한민국 남단의 섬 제주는 오랜 역사 속에서 중앙무대에서 소외돼 왔지만, 천혜의 자연환경과 지정학적 이점, 특유의 문화 등으로 이를 극복했다. 2002년 국제자유도시, 2006년 특별자치도 출범 등은 제주만이 특화할 수 있었던 대표적인 사례다.다만, 결과적으로 장점과 단점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 특별자치도의 존재는 '양날의 검'이 됐다. 제주의 행정체제 정립을 위한 여정은 수 십년째 표류중이다. 특별자치도 출범 이전은 커녕 60년 전보다 퇴보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우리나라에 지방자치법이 제정된 것은 해방 직후인 19
마을의 자원과 가치를 주민들이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공동체를 조성하기 위한 마을만들기 사업. 시행착오와 현실적 어려움을 넘어 제주 마을 곳곳에서는 ‘작지만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특별자치도마을만들기종합지원센터와 함께 주민 주도의 마을만들기를 통해 희망의 증거를 발견한 제주의 마을들을 살펴보는 연중기획을 마련했다. 이를 계기로 더 나은 제주의 미래를 향한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 편집자조선 태종 16년(1416), 제주는 제주목, 정의현, 그리고 대정현까지 크게 세 개의 고을로 나뉘는 ‘삼읍 체제
500여년 전 제주도 남쪽 안지왓 집터라 불리는 곳에 안씨와 강씨, 장씨가 자리 잡아 살았고, 300년 정도 지나서는 현씨와 김씨, 정씨, 강씨 일가가 인가를 형성해 함께 살았다. 산변포(산것)이라 불리던 지역에 오씨와 김씨, 고씨, 송씨, 강씨가 정착하면서 덕돌포(덕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해 오늘날의 서귀포시 남원읍 태흥3리가 됐다. 덕돌포 포구 주변 개맛물에서 용천수가 솟는다. 개맛물은 사람들이 멱을 감거나 빨래를 하고, 먹는 물로 사용한 태흥3리 주민들의 생명수였다. 개맛물은 포구나 포구의 어귀를 뜻하는 제주어 ‘개맡’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