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금요일에 열린 타이베이문화상 시상식을 보면서 8월 말 우리 곁을 떠난 은사 샤오리훙을 떠올렸다. 늦은 문화상을 시장이 수여하고 내 친구인 루샹녕과 샤오 선생의 부군이 단상에서 받는 것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심사위원을 대표해 전장지 간슈즈 사장이 연설해 샤오 선생의 삶을 말하면서 번번이 목이 메었다.그는 남편을 따라 홍콩에서 대만으로 건너와 이 땅에 헌신하며 뿌리를 내렸다. 오래된 양계장을 죽위공작실의 공방으로 개조하고 대만의 민속예술촌을 처음 시도하여 문화정책이나 환경·생태예술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대만과 아시아에
지난 번까지 말했듯이 홍콩은 전후 중국, 영국, 미국 3극 구도에서 결국 영국에 점령되었다. 그 역사를 따라 홍콩의 발전을 더듬어 보자.1949년 4월 하순 인민해방군(PLA)은 양자강을 건너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했다. 이대로 진전되면 인민해방군은 수개월 안에 광둥(廣東)에 도달해 홍콩을 침공할 가능성이 있었다. 당시 영국 홍콩 정부는 영국이 홍콩을 유지한다는 성명을 내고 시민들에게 홍콩에 머물도록 독려함과 동시에 상세한 작전계획을 수립해 미군에 홍콩 방위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인민해방군 선발대가 홍콩에서 다리를 건너 선
요나구니 섬은 일본 영토의 최서단에 위치한다. 도쿄에서 직선거리가 2000km가 넘지만 대만 일란현 쑤아오 진까지는 약 111km, 맑은 날에는 수평선 위로 우뚝 선 대만의 섬 그림자를 볼 수 있다. 면적 30㎢에 못 미치는 외딴 섬이지만 끝없이 펼쳐진 해상의 길은 대만과의 오랜 역사를 이 섬에 안겨주었다. 제주와 요나구니 섬의 인연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남아있다. 그것은 1477년 2월 요나구니 섬에 표착한 제주도 주민 3명이 이 섬에서 오랫동안 보호받고 당시 류큐왕국의 슈후 슈리를 거쳐 조선에 보내졌다는 호의적인 일화다.이
국가라는 환상2018년 세상을 떠난 문충성 시인의 시 중에 ‘우리는 때로 우리를 토벌했습니까’라는 시가 있다. “우리는 때로 우리를 토벌했습니까/우리는 때로 우리를 습격했습니까/제주 섬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산폭도가 되고 빨갱이가 되고/산간 마을들 불탔습니까 그 섬마을 사람들/총에 맞고 죽창에 찔려 죽임을 당했습니까 비록/ 그 비참한 삶이 지난 세기 1940~50년대뿐이겠습니까”‘우리는 때로 우리를 토벌했습니까’ 중‘우리가 우리를 토벌했습니까/우리가 우리를 습격했습니까’라고 묻는 시인의 말은 단순히 4.3의 비극을 말하기 위한
지리산은 한반도 남단에서 가장 높고 깊은 산이다. 또한 지리산은 지리적인 높이와 깊이의 수치 이상으로 장대한 역사적 서사를 품고 있으며, 특히 현대사의 깊은 상처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지리산둘레길’이라는 독특한 문화적 자산이 있다. 그것은 지리산 주변을 굽이굽이 휘감고 도는 약 300km에 거리의 걷는 길이다. ‘지리산둘레길’은 걷기라는 신체적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마을 공동체와 마주하며, 자연을 다시 만나는 과정에서 마침내 우주와 생명의 뜻을 새기고자 하는 수행의 장이다. 이러한 ‘지리산둘레길’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어 자세를 바로잡아 몸 뒤에 둔 조개껍데기에 살짝 손을 얹고 있다. 그의 온화하면서도 힘찬 얼굴에 빛이 쏟아지며 향상되는 정신이 활짝 피어 있다. 그것은 당시 약진하는 대만 사회에 대한 작가의 기대와 상상을 구현해 대만 미술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일본에서 미술을 배운 최초의 인물황투수이(黃土星, 1895-1930)는 일제 강점 첫 해 타이베이시 멩지아 주쉬의 뒷골목(현재의 완화)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만 미술의 선구자일 뿐 아니라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랑스러워했고, 조국 사람들을 위해 섬의 아름다움에 걸맞
앞서 말했듯이 홍콩의 사회적 모순은 역사화 시각에서 찾을 수 있다. 이번에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변화를 살펴보자.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패전과 항복을 선언하고 대동아공영권이 붕괴되면서 곳곳에서 정치세력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중국은 전승국의 하나로 일본으로부터 대만과 만주를 되찾았고, 구미 열강의 지배하에 있던 조계지 일부도 이 시기에 정식으로 반환됐다. 그러나 한반도처럼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었지만 소련과 미국이 개입해 수립한 두 독립된 정권이 전쟁을 거쳐 현재까지 분단 상태가 지속되는 것과 같이 우여곡절을 겪
1929년 교토제국대학의 카나세키 타케오는 오키나와 각지에서 류큐인의 유골을 수집해 교토로 가져왔다. 이들 중에는 오키나와 섬 북부에 있는 나키진 촌의 무무자카 바카 무덤에 묻혀 있던 유골도 포함된다. 절벽 중턱의 동굴을 이용해 만든 이 묘소는 16세기 이전에 이 지역에서 활약한 유력 인사와 그 일족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이 행위는 무덤 파헤치기라고 할 수 있지만, 대학의 권위를 배경으로 학술연구에 이바지한다는 명목이 있었기 때문에 자료의 수집으로서 정당화되었다. 오키나와 현 당국이나 경찰은 카나세키의 행동
대만의 미술신에서 담수강변에 위치한 죽위공작실(竹圍工作室)과 마거릿 샤오(샤오레이훙, 蕭麗虹)는 항상 불가분의 명칭으로 회자되어 왔다. 담수강이 자라는 석양처럼 저녁놀들이 서로를 비추고 있다. 지난달 타이페이 문화상의 올해 수상자로 마거릿 샤오가 발표됐으나 수상을 앞둔 8월 30일 병 때문에 싱가포르에서 별세한 사실이 알려졌다. 향년 75세. 모든 것이 갑작스럽고, 안타깝고, 슬프다. 대만과 아시아에서 ‘미세스 마거릿 샤오’로 불린 그녀는 나눔을 마다하지 않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았으며, 항상 자신보다 남을 배려하는 선배였다. 마
지난번 칼럼에서 말했듯이 홍콩은 여러 정치 세력이 교차하고, 군사 권력이 일상생활에 늘 눈앞에 있는데도 전쟁은 거의 보이지도 않고 있다(視而不見)는 점에서 이 무관심은 현실과 대조적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보이지만 보지 않는다'는 것은, 전쟁이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 단순히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그리고 평화)에 대한 성찰적 공간의 부재 또는 무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전쟁에 대해, 예를 들어 그들의 전쟁과의 관계를 어떻게 말하는가와 관계한다. 과거에 왜 전쟁이 일어났는가? 그것은 역사에 무엇을 남
'망해가는 류큐녀의 수기'라는 소설이 도쿄의 저명한 잡지 '부인공론(婦人公論)'에 실려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1932년이다. 작가인 쿠시 후사코(久志芙沙子)는 1903년에 일찍이 류큐라고 불렸던 오키나와의 고도 슈리의 무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교원을 거쳐 1930년대에 도쿄로 이주하여 문필로 생계를 이어가려고 투고한 작품이 출판사의 눈에 띄었다. 소설의 원제는 ‘한쪽 구석(片隅, 편우)의 비애’였지만 출판사는 그것을 ‘망해가는 류큐 여자’라는 스캔들에 오를만한 단어를 제목으로 (쿠시에 따르면 한마디 상의도 없
2020년 여름. 유난히 길었던 여름장마의 한가운데서 정재철은 그 많은 꿈들을 접고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1년 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1주기전은 그의 30년 예술 인생을 압축적이면서도 풍부하게 펼쳐보였다. 주어진 시간에 비해 탄탄하게 조사연구를 거쳐 정재철 세계의 큰 그림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호평을 얻었다. 지난 20년간 정재철과 동행해온 미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의 1주기전이 ‘사랑과 평화’라는 제목으로 이뤄진 것에 각별한 공감의 열기를 느꼈다. 사랑과 평화가 맞다. 정재철이 평생을 찾아다녔던 세계는 그 어떠한
2015년 복간을 기념해 열린 심포지엄에서 김석범은 오키나와 헤노코 반대 투쟁을 언급한다. 김석범은 오키나와 섬 경찰로는 부족해 외부에서 경찰을 부르는 처사를 “일본 정부의 국내 식민지 정책”이라고 규정한다.(신지영, 「『변화 없음』이라는 역동성;복간기념 심포지엄, 「전후 일본문학과 김석범 『화산도』에 참가하여」申知瑛, 「『変化なし』というダイナミズム:復刊記念シンポジウム「戰後 日本文學と金石範 『火山島』に參加して)『화산도』 복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오키나와 헤노코 반대 투쟁을 언급하는 이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김석범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최근 며칠 새 급속히 변해 세계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미국은 20년에 걸친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수렁에서 철수를 결정했다. 미국이 철군하자 탈레반은 즉각 수도 카불을 맹렬히 점령했고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국외로 달아나 카불국제공항의 혼란스러운 광경이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국제사회는 통제를 되찾기 위해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카불의 탈레반이 또 다른 주목을 받고 있다.역사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의 목표는 독립 그리고 영토와 왕좌의 안전에 있다. 그것은 러시
홍콩은 전쟁과 먼가? 이것은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홍콩 사회에서는 공식, 비공식 할 것 없이 전쟁(과 평화)이 그리 주류의 화두는 아니다. 이 거리는 안전과 안정을 자랑하는 이데올로기로 가득 차 있는 듯하여, 일반인들은 전쟁이 언젠가 정말로 이 도시에 영향을 주게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으며(기껏해야 주식시장이 며칠 변동하는 정도일 것이라고), 현재의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거리를 열화시키는 전쟁 광경은 아마도 미디어의 스펙터클로서만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홍콩은 정말 전쟁에서 먼가? 전쟁을 국
오키나와는 COVID-19 봉쇄에 실패해 7월 31일 현재 인구 140여만명의 오키나와에서 24,761명이 감염되고 236명이 사망한 위급한 상태에 있다. 공공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공문서관도 임시 휴관해 시민들은 지식과 문화의 인프라를 이용할 수 없는 상태다. 그러나 소규모 민간 갤러리는 감염 예방 대책을 충분히 배려한 다음 전시회를 개최하는 예도 있다.6월 하순 오키나와갤러리에서 한 화가의 개인전이 열려 큰 호평을 받았다. 그것은 오키나와에 사는 사람들이 작품을 가까이에서 감상하는 전람회를 갈망하고 있던 것도 물론 있지만,
제주에서 나고 자란 청년 양동규가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환경운동 시민단체에서 영상과 사진 매체를 다루는 활동가로 출발하여 15년 전에 영상감독으로 데뷔를 하였으며, 10년 전부터는 사진가로 본격 활동해온 예술가이다. 그는 청년에서 중견으로 이력을 쌓는 동안 창작한 수많은 작업들 가운데 대표작들을 골라 사진집을 내고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 (2021.7.16.-8.5, 포지션민제주)는 풍경과 사건을 통하여 제주의 역사와 삶을 이야기해온 예술가 양동규의 세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전시다. 10여
‘점령군’이라는 말이 한국 대선에서 논쟁이 될 줄은 몰랐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점령군’ 발언이 보도되자 조선일보를 비롯한 극우 언론은 이념 대결을 부추겼다. 최장집, 심지연 교수의 발언을 인용해 여권 대선 주자들의 ‘미군=점령군’ 인식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대선 레이스 초반의 이념 논쟁의 빌미가 된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발언은 간명했다.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 정부 수립 단계와는 좀 달라 친일 청산을 못 하고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사실 그 지배체제 그대로 유지하지 않았느냐”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발언이 보도되었을
코로나19는 1년 이상 세계를 황폐화시켰다. 지난해 초부터 세계를 휩쓴 바이러스는 인류의 생존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대만은 5월 초부터 영국 알파 변이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아왔다. 전염병 방역은 해외로부터의 바이러스 유입을 통제하기 위해 공항 경계선을 엄격히 지키고 지역 사회 감염을 억제하기 위해 PCR 테스트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다. 대만 전역에 걸쳐 솽베이 캐피탈서클에서 확산된 환자 수는 현재 1,000여 명에서 14,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CDC의 일일 기자 회견 정보와 강력한 국가 방어 능력으로, 이 전염병은 3단계 전
올해는 1989년 베이징의 천안문사태로 알려진 6.4사건 32주년이 된다. 홍콩에서는 매년 6월 4일 밤,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리나 홍콩 정부는 지난해부터 방역을 이유로 집회를 금지하고 있으며, 올해는 사람들이 자연 발생적으로 추모할 것에 대비해 대규모 경찰력을 투입해 현장을 봉쇄했다. 그래도 이날 밤 적지 않은 시민이 촛불을 들고 행사장 밖에 섰다. 또 각 지역에서 소규모 추모 활동이 이뤄졌으며, 인터넷에도 많은 추모 글이 올랐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6.4사건이 홍콩사회의 감정의 고비가 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어, 현실 정치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