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연미
(22) 어떤 직유 / 장영춘 낯빛만 봐도 그 사람의 마음을 알 듯 단풍만 보고서도 올 한 해 바람을 알 듯 지는 해 하늘을 보면 떠난 이의 마음을 알 듯 고요한 마음속에 고요하게 밀물이 들 듯 하나가 되기 위해 나이 반쪽을 비워두듯 노랗게 물든 잎새가 내 발등을 적신다 -장영춘 전문 펜으로 그린 그림이 있다. 자세히 보면 거친 선들이 아무렇게나 모여 있는 것 같지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보면 뚜렷하게 드러나는 풍경이 보인다. ‘노랗게 물든 잎새가 내 발등을 적시는’ 그림 한 장. 그림 속에 거...
(21) 고요 / 이종문 붉은 고추를 먹은 잠자리 한 마리가 억 년 고인돌에 슬그머니 앉는 찰나 바위가 우지끈, 하고 부서질 듯 환한, 고요 - 이종문, 전문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진 글은 이해가 쉽다. 뜻하는 바가 아무리 깊고 심오해도 전달이 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거의 자폐증적인 작품을 써놓고 독자의 이해 수준을 탓하는 요즘 문단의 세태에 이종문님의 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처음 이 시를 대했을 당시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고요’라는, 맛도, 형태도,...
(20) 능소 / 박명숙 피고 지는 꽃으로 넝쿨은 북새통인데 밧줄에서 내리거나 밧줄을 올라타려고 꽃들은 꽁무니마다 서로 물고 늘어지는데 발톱 다 빠지도록 한여름을 기어올라 마침내 방호벽 너머 턱을 내건 꽃 한 채 첫울음 길어 올리듯 뙤약볕도 자지러진다 - 박명숙 [능소] 전문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것들의 비애를 생각해 본다. 세상이 다 가진 등뼈 하나 내려 받지 못하고 돌담이든, 벽이든, 나무든 그 무엇이든, 서 있는 것들의 발 뒤꿈치를 타고 올라야만 굽은 허리 겨우 세울 수 있다고 할 때, 그렇게 되기까지...
(19) 지느러미 남자 / 조한일 아침부터 당도한 문자 열나흘째 폭염 특보 오늘도 동문로터리 붐비는 수산시장 삼십 분 무료 공용주차장 귀퉁이에 오래된 봉고 Ⅲ 1톤 탑차 부축해 앉혀둔다 흐르는 땀 눈에 들면 어찌나 따가운지 이마에 버프 질끈 두르고 은갈치 상자 나르는데 머리 많이 아프우꽈? 물어보는 주인아줌마 아무래도 우리 땅에선 이 모습이 낯선 걸까? 배달엔 젬병인 날 물끄러미 쳐다본다 잠깐만 잠깐만요, 비켜주세요, 외쳐 봐도 꿈쩍 않는 밭담보다 더 길어진 제주땅 중국인 행렬 배워둘 걸 중국어, 왁자지껄 좁...
(18) 채밀/ 김영순 어떤 꽃은 밤에도 향기를 쏟아낸다 새벽, 벌장 가다 말고 힐끗 본 꽃숭어리 단물 다 빨렸는데도 꽃은 그냥 멀쩡하다 솔가지를 태운다, 오늘은 꿀 따는 날 꿀 한 모금 들락날락 부웅 붕 날갯짓 소리 수동식 채밀기 돌려 훔친 꿀을 훔쳐낸다 벌침 몇 방 맛봐야 꿀 한 통을 얻느니 내 안에 밀봉된 채 다독여 온 사랑아 종낭꽃 채밀의 시간 탈탈 털린 사려니숲 - 김영순, [채밀] 전문- 두 줄로 늘어선 벌통 위에 앉아 뚜껑을 열어 벌을 돌보는 모습. 몇 해 전, 사려니 숲을 걷다 본 풍경이다. 부...
(17) 수박밭둑/ 장철문 물큰한 썩은 내, 애기 수박들이 예쁘다. 파랗게 질린 넌출들이 막무가내로 밭둑을 기어오르고. 엄마 저승은 어느 쪽이에요? 아직 떠나지 못한 영혼들이 말똥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푸른 밭둑 무녀리 애장터. - 장철문 [수박밭둑] 전문- 여름 더위가 한 풀 꺾이기 시작하면 수박밭들도 뻗었던 넝쿨들을 거둬들이기 시작한다. 폭염에 시달렸던 줄기들이 더러 마르기 시작하고, 크고 잘 생긴 것들에게만 쏟아지는 손길 옆, 보호받지 못하고 상처 입는 수박들 몇 그 상처에 목숨을 놓는 것들도 있다. ...
(16) 열대야 / 이서원 어느 적도 우림의 야자수 이름 같다 따 내리면 주르륵 코코넛의 단내처럼 이 뜨건 불면이 밤을 향기롭게 보듬을 사자의 목덜미를 낚아채듯 올라타고 사바나의 밀림을 지나 포효하며 내달리다 생시의 꿈같은 밤을 휘영청 넘고 싶다 한 점 고요만이 평정하는 깊은 시간 자객의 칼날처럼 섬뜩한 초승 뒤로 어느새 푸른 초원이 창문 틈을 엿본다 -이서원 [열대야 전문]- 덥다.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덥다. 몇 해 전만 해도 30도가 최고점이었던 제주도 날씨가 어느 해부터 야금야...
(15) 호미의 훈장 / 정미정 제초작업 마치고 돌아가는 바구니 속에 고추 한 줌, 깻잎 한 줌, 숨 돌리는 햇살 한 줌 고단한 호미자루도 다리 뻗고 누웠네 나대던 호미질도 그때서야 철이 들고 결마다 앉은 더께 훈장처럼 빛날 무렵 저녁 해 돌담 사이로 눈 마중을 나왔네 -정미정, 전문- 무엇을 심어도 잘 자라주지 않는 텃밭에 상추와 고추가 실하다. 자애로웠던 날씨는 이미 옛날 이야기가 된 듯 물이 모자란 데는 아주 모자라게, 물이 많은 데는 아주 많게, 기분 내키는 대로 패악질을 하는 날씨 속...
(14) 하눌타리 / 김미향 하얀 달빛 아래 하얗게 물든 꽃송이 새벽 산책길 쫓아 툭 떨어지는 간밤에 앞집 아저씨 푸념처럼 아픈 꽃. 무슨 서러움이 그리도 많았는지 아프게 아프게 갈래지며 꽃이 필까 하얗게 밤을 지새도 다 하지 못한 말처럼 -김미향 전문- 하얀 달빛, 하얀 꽃송이, 하얀 밤이 아픔에 귀결된다. 창백하고 창백한 하눌타리의 표정이 서늘하다. ‘간밤에 앞집 아저씨 푸념’이 ‘밤을 지새’며 이어지고, 그 푸념에 담긴 아픔은 꽃잎의 끝을 갈래갈래 찢어놓고 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툭 떨어...
(13) 접시꽃/ 박권숙 낮달을 이마에 올린 수녀원 담을 따라 오후의 기울기가 쓸쓸해진 네 시 무렵 금이 간 그리움처럼 빈 접시가 붉었다 바람의 무게중심이 바뀔 때마다 휘청 받쳐 든 절대고독 반쯤 쏟다 남은 자리 또다시 붉게 고이는 여름 적막 한 접시 -박권숙 전문- 담장 너머 붉게 핀 접시꽃, 오후 네 시, 바람 한 줄기, 세 개의 소재를 가지고 절대고독의 적막을 표현해내는 것은 시인이라 가능할 것이다. 고수들은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법, 바람 한 줄기 지나갔을 뿐인데, 절대고독과...
(12) 호박네 식구 / 한희정 씨앗 하나 심었더니 초록 우산 들고 온 식구 나눠 마신 물 반 컵에도 감지덕지 떡잎을 펴며 며칠 밤 두고 본 사이 한 매듭을 올린다 공한지 땅값조차 수직상승 한다는 요즘 과수원 돌담 위를 더듬더듬 거리더니 봉긋한 애호박덩이가 출산일을 알린다 - 한희정 [호박네 식구] 전문- 이야기의 초점을 아무래도 땅값 상승에 맞추어야 할 듯하다. 어느 때든 만만하게 고개 숙인 적 없던 땅값과 물가였지만 지금에 비한다면 5, 6년 전만 해도 한량이었다. 돈 좀 모으면 어디 저 중산간 지대에 가...
(11) 민들레 / 홍성운 빗장 푼 대궁이 끝 달뜬 솜사탕 같은, 행인 발길 조심하라 노란 조끼 덧입혔던 그 아이 꿈을 먹는다 하얀 꽃씨 날리는. - 홍성운 [민들레] 전문- 하필이면 행인들의 발길이 쏟아지는 곳에 뿌리를 내린 민들레.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기까지 수많은 발길을 피해야 한다. 목숨을 부지하는 게 최대의 목표. ‘나 여기 있어요.’ 무지막지한 발길들에게 소리치듯 서둘러 노란 꽃을 피우고, 드디어 씨앗을 물기까지 얼마나 많은 조바심에 시달렸을까. 생채기 가득한 얼굴이 가엽다. 그 노심초사의 마음이...
(10) 행복한 하루/ 김강호 자벌레 걸음으로 술 사 오시는 할아버지 가시는데 반나절 오시는데 반나절 마중 온 할머니 보고 웃는데 또 반나절 -김강호의 전문- 느리게 느리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날이 있다. 손발을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혹은 누운 자리에서, 가능하면 생각조차 느리게 하루를 보내고 싶은 날이 있다. 생각해 보면 세상은 얼마나 빨리 돌아가는가. 시간은 또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가. 내가 밟고 서 있는 이 지구덩어리가 돌고 있다는데, 그 회전의 속도는 또 얼마나 빠를 것...
(9) 오래된 지문을 줍다 / 최길하 지문이 꾹 눌린 토기조각을 주웠네 꾹 눌러 문을 열고 꾹 눌러 호적을 뽑듯 그대가 열려고 했던 미로는 무엇인가 먼 별빛 그 너머 몇 백 광년을 두고 온 등고선 비밀지도를 찾아가는 길인가 꾹 눌린 미로 한 조각 강 노을이 번졌네 지문은 뼛속 울음이 골목 끝에 모인 마을 그의 체온 위에 내 지문을 얹었을 때 그대의 문이 열리고 나도 문을 열었다. -최길하 전문- 퍼즐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도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걸까. 오랫동안 누구의 시선도 끌지 못한 ...
(8) 감꽃, 눈에 익다 / 강은미 바람이 손끝마저 놓아버린 입하 무렵 ‘곱은다리’ 감나무도 겨운 듯이 굽은 저녁 아기 새 노란 부리로 감꽃들을 쪼았지 감꽃에 허기 달래던 내 아우가 생각난다 비 오면 빗길에서 고무신 접어 배를 띄우던 그 어느 감꽃 지는 밤 그 배 타고 떠났지 사람은 다 떠나도 감나무는 거기 있었네 이십 리 등하굣길 먼발치 눈인사처럼 귀 밝은 감꽃 하나가 손금 위에 놓이네 - 강은미, < 감꽃, 눈에 익다> 전문- 추억 이미지와 연결되는 단어 감꽃, 감나무. 마당 한 켠 어디, 뒤뜰 어느 구석...
(7) 무꽃 / 문순자 송구하고 송구한 건 하늘도 마찬가지 거저 줘도 안 뽑아가는 천여 평 월동 무밭 여태껏 못 갈아엎고 누리느니, 이 호사! -문순자 전문- 갑자기 눈이 환해졌다. 미세먼지와 황사 가득한 날씨. 뻣뻣하게 긴장을 놓지 않던 눈가의 주름들이 무장해제 당하듯 풀어졌다. 밭 하나를 가득 채운 하얀 꽃. 무꽃이다. 유채꽃 다 지고, 봄의 화려함을 지우며 계절은 여름을 향해 가는데, 뒤늦게, 혹은 뜬금없이 들판 한쪽에 피어난 꽃이다.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걸린 미련처럼 꽃은 화려함의 극치를 달린...
(6) 강철도서관 / 서정택 그가 읽는 책들은 거의 금속성이다 침 바른 기계칼로 책장 넘기다 보면 어쩌다 늙은 당나귀 말라 죽은 파리 한 마리 누군가 물어뜯는 상처도 듬성 있다 강철로 만든 책을 무슨 수로 뜯었는지 칼날이 스칠 때마다 뜨겁게 책이 운다 델 것처럼 서러워 그만 덮고 싶었지만 그래도 읽어야 사는 비정규직 인부 멀리 들깨 밭 까만 깨들이 톡,톡, 튀고 있었다 -서정택 전문- ‘금속성’에는 물기가 없다. 날카롭고 뾰족하고 단단하다. 촉촉한 숨결이나 부드러운 살결이 스며들 여지도 없다. ...
(5) 중년 / 서숙희 파도가 한 번 밀려왔다 밀려갔다 그 사이 순간인 듯, 영원인 듯 그 사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랬을..., 뿐이다 -서숙희 전문- 설령, 내 앞에 바위가 있어 그 바위에 부딪쳐 몸 산산이 부서지더라도 달려들기를 멈추지 않던 직진의 시기. 그 청년기를 지나, 이제는 되돌아가야 하는 길만을 남겨둔 잠시 멈춤 상태. ‘파도가 한 번 밀려왔다 밀려’가는 ‘그 사이’ 중년이다. 누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싶겠는가. 꿈 위에 꿈을 얹고 성장의 길이를 끝없이 연장해 가면서 길 어디쯤 희...
(4) 공약 / 김정숙 사람답게 사는 법 펼쳐 보이겠다며 인가 근처 터 잡은 신출내기 뻐꾸기가 막 익은 보리밭 향해 "떡국! 떡국!" 외친다. - 김정숙 전문- 이제 막 익기 시작한 보리밭에서 뻐꾸기 소리 들린다. 그런데 그 소리는 여느 때와 같이 ‘뻐꾹, 뻐꾹’이 아닌 ‘떡국! / 떡국!’이다. 울음소리가 좀 이상하다는 것 외에는 아주 단순하게 읽히는 시다. 그러나 따져보자. 뻐꾸기는 왜 하필 떡국을 부르며 울까. 울음소리에 꽂혔던 시선이 이제 막 익은 보리밭을 돌아 사람답게 사는 법을 펼쳐 보이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