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룡 지사 다웠다. 누구보다 언론의 생리를 잘 알고, 이벤트에도 능한 그였다.‘전국적으로 뜨고 싶은’ 원 지사로서는 극적인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날씨까지 받쳐줬다. 화창한 일요일 오전 송악산 앞. 전쟁과 학살, 개발의 상흔이 중첩돼있는 송악산은, 난개발에 마침표를 찍겠다는 선언 장소로는 제격이었다. 송악산이 어딘가. 1980년대말 군사기지 건설 논란은 굳이 돌이킬 필요도 없다. 개발의 역사로만 봐도 30년 가까이 광풍이 잘 날 없던 대표적인 핫 플레이스였다. 바로 이곳에서 다음세대를 위해 청정 제주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으니 언론의
유럽이나 미국의 주거지역에서는 웬만하면 고층 아파트를 짓지 않는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른바 ‘고층 아파트의 사회적 해악’을 다룬 글이다. 고층 아파트가 저층 아파트 보다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효과가 훨씬 크다는 게 글의 요지 중 하나였다. 즉 고층 거주자들이 ‘상대적으로’ 이웃과의 교류가 적고, 남을 도와주려는 의지나 빈도도 적다는 것이다. 입증된 팩트임을 강조하려 함인지 선진국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기도 했지만, 정서적인 공감에 머문 걸 보면 식견 부족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는 돈을 좇는 사업자들의 욕망을 언급한 대목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처음 만나 어색해 할 법 한데도, 동향의 취재진을 반갑게 맞아주며 구슬프게 을 부르던 할머니의 소원 한 가지는 이뤄졌다. 고향 제주의 4.3평화공원에 한번 가보는 게 할머니의 꿈이었다.[제주의소리]가 창간 15주년 특집으로 기획한 ‘생존수형인 4.3을 말하다’ 인터뷰를 위해 경기도 안양에 사는 할머니를 찾아간 게 지난해 3월 중순, 할머니가 4.3공원을 방문한 건 그해 4월3일이다. 보도 덕분인지 할머니에게 초청장이 날아든 것이다. 4.3생존수형인이었던 변연옥 할머니(95). 그
공짜가 묘미는 있을지언정 자칫 감흥을 잃을 수 있다. 다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직접 겪어봐서 안다. 경험에 의하면, 공짜표는 몰입도를 떨어뜨린다. 영화도 그렇고, 공연도 그렇다. 졸음을 쫓으려는 사투의 강도도 달라진다. ‘덤’이라는 내 안의 인식이 마음가짐을 흐트려놓았을 수 있다. 제 값을 치르는 게 당연지사가 된 요즘과는 거리가 있었다. 어느덧 지금은 공짜를 바라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세상이 되었다. ‘제 값’에는 관객을 위해 애쓴 이들에 대한 예의가 내포되어 있다. 즐기는 입장에서 보면 응당 내야 할 비용이다. 여행도 마찬가지
코로나 19를 물리치려면 결국 백신 밖에 답이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국내 최고의 생태학자로 꼽히는 최재천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대한민국 대표 석학 6명이 코로나 19 이후 신 인류의 미래를 논한 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인류가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최 교수의 통찰이 녹아있다.그에 따르면, 백신은 늘 뒷북을 칠 수 밖에 없다. 바이러스의 창궐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를 떠올려보라. 앞으로 또 어떤 바이러스가 인류를 덮칠지 모른다. 그것도 머지않아. 백신의 안전
과거 학생들은 ‘그저 따르는 존재’였다. 당시 학생은, 엄밀히 말해 인격체가 아니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인격을 갖춘 개체’로 취급받지 못했다.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물리적 고통이 뒤따르기 일쑤였다. 워낙 강압적인 시절이라 정작 학생 자신도 인격체임을 자각하기 어려웠다. 매를 피하려면 고분고분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부모들은 한술 더 떴다. 심한 경우 자식을 소유물처럼 여겼다. “내 아이 내 맘대로 한다는데 뭔 상관이야” 부모의 표독스러운 항변에는 진심어린 충고도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101세 현경아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이다. 솔직히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그 보다 생사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72년 전 소식이 끊겼다. 4.3의 광풍이 휘몰아친 1948년 11월, 경찰서로 끌려간 게 마지막이었다. 명예회복이 보다 현실적인 희망이다. 재심을 통해 무고한 남편에게 덧씌워진 법적 올가미(국방경비법 위반)를 걷어내는 일이다. 이 또한 녹록지 않다. 일단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져야 하고, 정식 재판에서 공소 기각 결정이 나야 한다. 백을 넘긴 할머니에겐 하루하루가 시간과의
국민연금은 기금 규모로 세계 연기금 중 3위 안에 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말 기준 적립금이 737조원에 이른다. 4년 후면 1000조원을 돌파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그만큼 탄탄하다는 얘기다.그렇다고 청신호만 있는 건 아니다. 극단적으로, 고갈 우려도 나온다. 물론 30여년 후를 내다본 추계다. 급속한 저출산, 고령화 등 불길한 징조 탓이 크다. 이런저런 추계와 주장에는 정치적 계산도 깔려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무튼 국민이 맡겨둔 노후자금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이걸 못해서 국민연금에 대한 극도의 불
지난 7월, 제주에 대기업 신규면세점 허용 방침을 결정한 기획재정부의 논리는 옹색했다. 코로나 19로 지역 상권은 물론이고 면세점들도 초토화된 시기였다. 기재부는 도리어 ‘코로나 카드’를 들고나왔다.“코로나 19로 면세점 상황 악화에도 불구하고, 특허 결정 이후 특허 공고 절차 및 사업 준비기간 등을 고려할 때 향후 코로나 19 이후의 시장에 대응이 필요하다는 점”을 내세웠다.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 ‘친절한 금자씨’가 따로 없었다. 기재부가 또 언제 이처럼 능동적이고 선제적으로 움직였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 신
오스트리아 화가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1928~2000)가 ‘건축 치료사’로 불린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건축가이도 한 그는 도시의 메마른 건축물에 생명을 불어넣기로 유명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이 땅의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한다’는 신념을 건축에 녹여냈다. 이른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다. 튤립나무 아래 잠듦으로써 죽음마저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 한 ‘환경운동가’ 훈데르트바서가 굉음이 요란한 2020년 제주 우도의 모습을 봤다면 어떤 반응을 나타냈을까. 감탄을 할지, 통탄을 할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
보릿고개 시절의 한끼라면 모를까.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22일 제주지역 어린이집 보육교사들이 부실 급식 증거라며 공개한 사진은 충격 그 자체였다. 주장에 의하면, 한 어린이집은 급식의 대다수가 죽이었다. 반찬없이 죽만 제공되는 날이 허다했다. 물기조차 빠진 희멀건 죽을 보니 개밥도 이보다 낫지 싶었다. 처음엔 식사 때마다 죽을 새로 쒔지만, 나중엔 ‘조리 2시간 후 폐기’ 원칙도 팽개쳤다. 오전에 만든 죽을 데워서 오후에 다시 내놓는 식이다. 학부모들에게 보내는 식단표와는 달랐다.달랑 국밥만 있는 사진도 아연실색케했다. 먹을 게
달변(達辯)과 다변(多辯)에 대해 칼럼(“‘미래통합당 최고위원’ 원희룡 지사”, 2020.2.18)을 쓴 적이 있다. 정치인이 달변을 좇다가 그만 다변으로 흘렀을 때 도사리는 위험을 경계하자는 내용이었다. 원 지사가 달변이라거나, 달변을 추구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다만, 원 지사도 다변이 문제라고 나름 진단했다. 엄격히 구분해야 할 점이 있다. 다변의 사전적 의미는 ‘말이 많음’이다. 이를 원 지사에 빗대 내 식대로 풀어보면, 원 지사는 말이 많은 게 아니다. 그냥 다변이라고만 해버리면 온갖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사람 같다는
오래된 일인데도 기억이 또렷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제주사회의 원로 부재를 탓할 때 늘 예외로 치는 장정언(85) 전 제주도의회 의장의 청렴한 의정상(像) 얘기다. (국회의원까지 지냈으나, 무의식적으로 ‘의장님’ 소리가 먼저 나온다)당시 도의회를 출입했던 선배 기자들의 전언을 요약하면 이렇다.지방의회가 부활한 1991년, 제4대 도의회에 입성한 그는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생각하기 힘든 전·후반기 의장으로 4년을 보내면서 판공비(업무추진비)를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수당이 따로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당시 지방의
“자산가치 70조가 넘는 은행이 1조7000억에 넘어갔다”“말이가~”서울지검 양민혁(조진웅 분) 검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말이 되느냐는 거였다. 하지만 그는 곧 거대한 금융비리의 실체와 마주하게 된다. ‘대한은행’ 헐값 매각 사건. 대한은행은 설정이다. 실제 모델은 외환은행이다. 영화 ‘블랙머니’는 2003년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보다는 2012년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사건’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장장 17년이다. 한국 정부와 론스타는 8년 넘게 소송(ISDS, 투자자-국가 소송)을 벌이고 있
개그 코너로 잘 알려진 ‘봉숭아 학당’은 이의어(異義語)다. 경우에 따라 좋은 의미 혹은 나쁜 의미, 정반대로 해석된다. 고유명사처럼 콕 집어 ‘그 무엇’을 가리키는 낱말은 아니다. 주로 비유적으로 쓰인다.얼마전 언론에 봉숭아 학당이 자주 오르내렸다. 사실상 정계를 떠난 한 사람 때문이었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 정치부 기자들에게 문희상은 격의없는 소통의 대명사로 각인된 모양이다. 초선의원 시절 문 전 의장은 의원 사무실을 활짝 열어놓았다고 한다. 출입 기자들은 그곳에서 취재도 하고, 정국에 대해 열띤 토론도 벌였다. 발을 들이는
“정책협의회가 무산된 것에 대해 그 원인과 이유를 떠나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원희룡 제주도정을 향해 따끔한 경고와 훈수를 즐겨하던 김태석 도의회 의장이 이번에는 자신이 고개를 숙였다. 15일 정례회 개회사에서였다. 제주도의 제안을 덜컥(?) 수용했다가 의원들의 반발로 무산된데 따른 뉘우침의 표시였다. 말이 무산이지, 사실상 일방의 보이콧이었다. 보기드문 광경이었다. 언제부턴가 개·폐회사는 의장이 집행부를 준엄하게 꾸짖는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집행부에겐 응수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팩트나 맥락이 틀렸어도, 상황이 종료되고 만다.
내성 탓일 수 있다. 아니면 촉이 무뎌졌거나. 언제부턴가 공무원 비위를 접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습성이 생겼다. 언론인으로서 쓰임새가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고백한다. 습성과 별개로, 공무원 비위 하면 일벌백계, 무관용 원칙, 제식구 감싸기, 솜방망이 처벌과 같은 낱말이 줄줄이 떠오른다. 마치 연관검색어처럼. 서슬이 퍼렇다가도 결국 썩은 호박도 못베는 칼날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리라. 민선6기 제주도정 첫 해인 2014년 10월29일. 원희룡 지사가 각 부서에 특별 지시를 내렸다. 공직기강 확립을 위한 주문이었다. 도청 관계자의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6.13선거)를 앞둔 2018년 3월14일 제주도의회 행정자치위원회. 손유원 의원이 모처럼 소신 발언으로 주목을 받았다. “선거라는게 참신한 인물을 뽑는 의미가 있는데, 무더기 무투표 당선이 현실화한다면 존속 여부를 포함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완곡한 표현을 썼지만, 교육의원을 폐지해야 할지 말지 공론화할 때가 됐다는 취지였다. 손 의원의 예상은 석달 뒤 현실화됐다. 5개 선거구 가운데 4개 선거구에서 무투표 당선자가 나왔다. 특히 1개 선거구는 같은 인물이 2회 연속 무투표로 당선됐다.이처럼 교육의원은
흔히 ‘코드 인사’는 ‘낙하산 인사’와 거의 동일시된다. 사전적으로 봐도 그렇다. 능력이나 자질, 도덕성 혹은 전문성과 ‘무관’-없다는 말이 아니다-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둘 다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정치적 이념이나 성향이 비슷한 사람을 임명하는 것이다. 무슨 결사체를 조직하는 것도 아니고, 거창하게 들릴 수 있다. 까놓고 말해 제 입맛에 맞는 사람을 쓴다는 의미다. 먼저 사견임을 밝혀둔다. 정치적 이념 또는 성향을 따지는 것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 국정을 뒷받침할 주요 인사들의 코드가 다른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2000년 11월24일, 제주경찰청 앞에서 경찰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그 전까지 경찰의 시위 과잉 진압 등을 비판하는 집회는 간간이 있었으나, 오로지 경찰을 타깃으로 면전에서 핏대를 세우는 것은 보기드문 광경이었다. 수백명이 모인 집회 명칭은 ‘제주경찰사(史) 4.3역사 왜곡 규탄 도민대회’. 그해 10월 제주경찰청이 [제주경찰사] 개정판을 내면서 약 10년 전 초판의 4.3 왜곡 내용을 그대로 실은 게 발단이었다. 4.3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제주4.3특별법이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