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끝에 맞이할 더 큰 영광을 바라보겠다”함축적이었다. 엊그제 취임한 고은숙 제주관광공사 사장의 이 한마디는 여러 의미를 내포했다. 문장의 앞 부분은 공사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보다 더 나빠질까 싶을 만큼 공사는 지금 호된 시련을 겪고 있다. 그렇다고 앞날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현재 시점에서 ‘더 큰 영광’은 언감생심이다. 그가 말한 대로 공사의 존재 이유를 따져봤다. 관광산업 육성, 지역경제 발전, 주민복리 증진. 공사 누리집엔 ‘미션’으로 적혀있다. 2008년 설립 이후 미션을 얼마만큼 수행했는지는 잘 모
원희룡 지사 다웠다. 누구보다 언론의 생리를 잘 알고, 이벤트에도 능한 그였다.‘전국적으로 뜨고 싶은’ 원 지사로서는 극적인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날씨까지 받쳐줬다. 화창한 일요일 오전 송악산 앞. 전쟁과 학살, 개발의 상흔이 중첩돼있는 송악산은, 난개발에 마침표를 찍겠다는 선언 장소로는 제격이었다. 송악산이 어딘가. 1980년대말 군사기지 건설 논란은 굳이 돌이킬 필요도 없다. 개발의 역사로만 봐도 30년 가까이 광풍이 잘 날 없던 대표적인 핫 플레이스였다. 바로 이곳에서 다음세대를 위해 청정 제주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으니 언론의
유럽이나 미국의 주거지역에서는 웬만하면 고층 아파트를 짓지 않는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른바 ‘고층 아파트의 사회적 해악’을 다룬 글이다. 고층 아파트가 저층 아파트 보다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효과가 훨씬 크다는 게 글의 요지 중 하나였다. 즉 고층 거주자들이 ‘상대적으로’ 이웃과의 교류가 적고, 남을 도와주려는 의지나 빈도도 적다는 것이다. 입증된 팩트임을 강조하려 함인지 선진국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기도 했지만, 정서적인 공감에 머문 걸 보면 식견 부족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는 돈을 좇는 사업자들의 욕망을 언급한 대목
“백두에서 한라까지”에서 볼 수 있듯이 한라산은 백두산과 함께 한민족의 영역 범위를 상징한다. 그리고 한라산은 ‘제주!’하면 떠오르는 제주이미지 상징 1위이자, 가장 대표적 제주문화상징이다. 한라산은 제주사람들에게 정복하기 위한 산이라기보다는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가고픈 영원한 모성이며 그리운 고향이다.한라산은 제주민간신앙의 본향당신 할로산또(한라산신)의 발상지이자, 제주를 창조한 설문대할망 전설, 신선 사상의 불로초와 백록 전설, 불교의 오백나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한라산은 보는 위치와 시간에 따라 천태만상의 얼굴을 가지기 때문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처음 만나 어색해 할 법 한데도, 동향의 취재진을 반갑게 맞아주며 구슬프게 을 부르던 할머니의 소원 한 가지는 이뤄졌다. 고향 제주의 4.3평화공원에 한번 가보는 게 할머니의 꿈이었다.[제주의소리]가 창간 15주년 특집으로 기획한 ‘생존수형인 4.3을 말하다’ 인터뷰를 위해 경기도 안양에 사는 할머니를 찾아간 게 지난해 3월 중순, 할머니가 4.3공원을 방문한 건 그해 4월3일이다. 보도 덕분인지 할머니에게 초청장이 날아든 것이다. 4.3생존수형인이었던 변연옥 할머니(95). 그
모든 사람은 법 앞에 정말로 평등한 것일까칼레의 시민‘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의미한다. 본래 19세기 왕정시대 프랑스에서 유래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불과 20년 전만해도 우리에게 생소했지만 지금은 우리 표준어사전에 공식적으로 오를 정도로 친숙한 말이 됐다. 그만큼 민주화가 정착되면서 사회상류층에 대한 민초들의 사회적 위치와 마음가짐이 달라졌음을 반영하는 지표인 것이다. 하지만 본래 엄격한 신분제의 산물이며 귀족문화를 미화하는데 사용됐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공짜가 묘미는 있을지언정 자칫 감흥을 잃을 수 있다. 다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직접 겪어봐서 안다. 경험에 의하면, 공짜표는 몰입도를 떨어뜨린다. 영화도 그렇고, 공연도 그렇다. 졸음을 쫓으려는 사투의 강도도 달라진다. ‘덤’이라는 내 안의 인식이 마음가짐을 흐트려놓았을 수 있다. 제 값을 치르는 게 당연지사가 된 요즘과는 거리가 있었다. 어느덧 지금은 공짜를 바라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세상이 되었다. ‘제 값’에는 관객을 위해 애쓴 이들에 대한 예의가 내포되어 있다. 즐기는 입장에서 보면 응당 내야 할 비용이다. 여행도 마찬가지
코로나 19를 물리치려면 결국 백신 밖에 답이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국내 최고의 생태학자로 꼽히는 최재천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대한민국 대표 석학 6명이 코로나 19 이후 신 인류의 미래를 논한 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인류가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최 교수의 통찰이 녹아있다.그에 따르면, 백신은 늘 뒷북을 칠 수 밖에 없다. 바이러스의 창궐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를 떠올려보라. 앞으로 또 어떤 바이러스가 인류를 덮칠지 모른다. 그것도 머지않아. 백신의 안전
며칠 후면 코로나 시대에 맞는 첫 추석이다.추석은 민족대이동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큰 명절이고 고향 방문은 의무처럼 됐다. 추석 민족대이동은 산업화가 낳은 현상이다. 1960~1970년대 산업화로 농어촌지역에 살던 많은 젊은이들은 고향을 떠나 서울이나 큰 도시로 떠나 노동자로 살았다. 쉴 틈 없이 일하던 어린 노동자들에게는 떠나온 고향을 갈 수 있는 추석은 꿈에 그리던 날이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과 가족들에 대한 각인효과는 머무는 시간보다 오가는 시간이 많았던 시절에도 사람들을 고향으로 이끌었다.하지만 이제 민족대이동이란 말은
과거 학생들은 ‘그저 따르는 존재’였다. 당시 학생은, 엄밀히 말해 인격체가 아니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인격을 갖춘 개체’로 취급받지 못했다.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물리적 고통이 뒤따르기 일쑤였다. 워낙 강압적인 시절이라 정작 학생 자신도 인격체임을 자각하기 어려웠다. 매를 피하려면 고분고분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부모들은 한술 더 떴다. 심한 경우 자식을 소유물처럼 여겼다. “내 아이 내 맘대로 한다는데 뭔 상관이야” 부모의 표독스러운 항변에는 진심어린 충고도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101세 현경아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이다. 솔직히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그 보다 생사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72년 전 소식이 끊겼다. 4.3의 광풍이 휘몰아친 1948년 11월, 경찰서로 끌려간 게 마지막이었다. 명예회복이 보다 현실적인 희망이다. 재심을 통해 무고한 남편에게 덧씌워진 법적 올가미(국방경비법 위반)를 걷어내는 일이다. 이 또한 녹록지 않다. 일단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져야 하고, 정식 재판에서 공소 기각 결정이 나야 한다. 백을 넘긴 할머니에겐 하루하루가 시간과의
자기 진영을 비판할 때는 종종 비판의 칼날이 무뎌진다. 때론 외면하고 때론 덮어버린다. 어느 사안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해명하면서 정당화를 시도한다. 진보 진영이 상대 진영을 비판할 때 사용했던 도덕적 언어들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진보 진영은 도덕적 비판에 대해 도덕적 언어로 대응하지 않았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이중 잣대다. 상대에게는 법적 기준보다 높은 도덕적 기준을 들이댔으나, 자신에게는 그러질 못했다. 법을 어기지 않았으니 도덕적 비판을 그만하라고 했다. 말과 행동이 달랐다. 말처럼, 글처럼 행동이
국민연금은 기금 규모로 세계 연기금 중 3위 안에 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말 기준 적립금이 737조원에 이른다. 4년 후면 1000조원을 돌파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그만큼 탄탄하다는 얘기다.그렇다고 청신호만 있는 건 아니다. 극단적으로, 고갈 우려도 나온다. 물론 30여년 후를 내다본 추계다. 급속한 저출산, 고령화 등 불길한 징조 탓이 크다. 이런저런 추계와 주장에는 정치적 계산도 깔려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무튼 국민이 맡겨둔 노후자금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이걸 못해서 국민연금에 대한 극도의 불
지난 7월, 제주에 대기업 신규면세점 허용 방침을 결정한 기획재정부의 논리는 옹색했다. 코로나 19로 지역 상권은 물론이고 면세점들도 초토화된 시기였다. 기재부는 도리어 ‘코로나 카드’를 들고나왔다.“코로나 19로 면세점 상황 악화에도 불구하고, 특허 결정 이후 특허 공고 절차 및 사업 준비기간 등을 고려할 때 향후 코로나 19 이후의 시장에 대응이 필요하다는 점”을 내세웠다.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 ‘친절한 금자씨’가 따로 없었다. 기재부가 또 언제 이처럼 능동적이고 선제적으로 움직였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 신
우리 의료진들과 국민들이 총력을 펼쳐서 코로나 1차 대유행을 막아낸 바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살신성인의 자세로 코로나 위기로부터 국민을 지켜낸 당시 의료진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최근에 코로나 19 방역 모범국으로 꼽히던 우리나라, 특히 코로나 청정지역임을 자부하던 제주도의 코로나 확산세가 심상치 않다. 8.15 광화문집회와 사랑제일교회에서 불붙은 코로나 확산이 전국을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고, 일부 게스트하우스와 산방산온천에서 퍼지기 시작한 코로나가 제주도 전역을 휘몰아치고 있다.8월 31일 중앙방역대책본부 발표에 따르
일본의 ‘졸개’에 안주하는 세력의 여전한 힘을 과시한 올해 광복절 행사제 발 저림일흔 다섯 번째 광복절을 보냈다. 해마다 맞이하는 수많은 국경일 중 하나지만 올해는 유별히 분위기가 뜨거웠다. 밋밋한 ‘쉬는 날’로만 여기던 두터운 타성을 깨고 그날 선조들이 느꼈을 순수한 감격의 기쁨이 올해 들어 새삼 ‘처음처럼’의 마음으로 온전히 다가왔기 때문은 아니었다. 격이 떨어지는 말일지 모르지만, “퀴퀴한 방귀를 뀌고도 도리어 성을 내는 놈들”이 많아서였다. 둔감한 필자의 눈에는 이번 광복절이 제 발 저린 도둑놈이 잔칫상에 재를 뿌린 매우 특
은 미국 생물학과 교수인 개렛 하딘이 1968년 12월 13일 사이언스지에 실은 논문이다. 그 후 공유지의 비극은 50년 넘게 경제학 뿐 아니라 생태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 없이 인용되면서 한 번쯤 들어 봤을 유명한 이론이 됐다.공유지의 비극이 여러 분야에서 수없이 인용되며 유명해진 데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숱한 공유지의 비극이 벌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또 다른 증명이기도 하다.공동체가 자유롭게 양을 키우며 함께 사용하던 목초지에 누군가 욕심을 부려 더 많은 양을 놓기 시작하면 너 나 없이 개인 이득을 위해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스티클리츠(Joseph E. Stiglitz)는 그의 책 ‘불평등의 대가’에서 필자가 보기에 재미있는 상상을 했다. “자본은 전혀 이동할 수 없고 노동력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면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각국은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려고 경쟁할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세금을 적게 거두겠으며 좋은 학교, 좋은 환경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할 것이고 여기에 필요한 재원은 자본에게 높은 세금을 매겨서 거둔 수입으로 충당할 것이다.”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의 모습이다. 자본과 노동의 이동 비대칭은 인건비가 적게
오스트리아 화가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1928~2000)가 ‘건축 치료사’로 불린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건축가이도 한 그는 도시의 메마른 건축물에 생명을 불어넣기로 유명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이 땅의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한다’는 신념을 건축에 녹여냈다. 이른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다. 튤립나무 아래 잠듦으로써 죽음마저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 한 ‘환경운동가’ 훈데르트바서가 굉음이 요란한 2020년 제주 우도의 모습을 봤다면 어떤 반응을 나타냈을까. 감탄을 할지, 통탄을 할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
보릿고개 시절의 한끼라면 모를까.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22일 제주지역 어린이집 보육교사들이 부실 급식 증거라며 공개한 사진은 충격 그 자체였다. 주장에 의하면, 한 어린이집은 급식의 대다수가 죽이었다. 반찬없이 죽만 제공되는 날이 허다했다. 물기조차 빠진 희멀건 죽을 보니 개밥도 이보다 낫지 싶었다. 처음엔 식사 때마다 죽을 새로 쒔지만, 나중엔 ‘조리 2시간 후 폐기’ 원칙도 팽개쳤다. 오전에 만든 죽을 데워서 오후에 다시 내놓는 식이다. 학부모들에게 보내는 식단표와는 달랐다.달랑 국밥만 있는 사진도 아연실색케했다. 먹을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