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4월 중순 나는 전남 광주 31사단 소속 육군 신병훈련소에 사병으로 입대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6월 초순경 모슬포 주둔 에 배속되었다. 소위 안방 군대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의 사병으로써의 군대생활은 초장부터 결코 순탄치가 않았다.작전과(과장 김철우 대위, 부산 출신)에서 나를 차출하여 작전서기병으로 근무케
요즘 제주에서는 김도백의 유치 결정을 간단한 제비뽑기식 여론조사로 마무리해버린 처사로 인해서 각계각층의 각양각색의 찬반여론으로 뜨거운 '도가니탕'이 되어 버렸다.오죽하면 기도와 설교에만 전념해야 할 카톨릭 사제단 사제들이 해군기지 유치를 반대하며 단식에 돌입하게 되었을까? 제주4.3항쟁 때에도 카톨릭 신부는 본국에다 남몰래 편
내가 태어난 집은 모슬포(상모리와 하모리로 나눠짐)에서도 하모리 가장 윗동네 일곱 채 가옥이 뚝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모두 고부이씨 종친들끼리 모여 사는 곳이었지요.나의 집에서 바닷가에 가려면 한 참을 걸어서 내려가야 하지요. 어렸을 적 거리감각으로는 꽤나 멀었지요.당시에는 수돗물이 없어서 모슬포 주민들은 모두 '신영물'이란 수원지에서 식수도 얻고 또
미자야.승환이 승진이 모두 청년이 되어서 군대에도 가도 그러는구나...그 애들하고 너희들이 뉴욕에서 함께 지내던 때가, 한 15~6년 됐나 봐, 엊그제 같은데...나는 그때 40대 초반(?)...걔들이 나더러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니까 참으로 쑥스러웠는데...'젊은 할아버지'였지. [너의 외할머니와 나의 아버지는 13살이나 차이가 났다. 나의 아
말로는 참 쉬운데 사실 실제 생활에서는 가장 힘든 게 두가지 있다. '사랑'과 '용서'.오죽했으면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을까.용서는 사랑보다도 몇 배나 더 힘든 것이구나.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용서한 것같이 남을 용서하라"고 한다. 나 자신의 힘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초중
국민학교(요즘은 초등학교)를 언제 졸업할꼬 손꼽아 기다리던 적이 엊그제 같은데...그리고 졸업식을 하면서 왜 그렇게도 슬피 울었던고...마치 부모님 곁을 떠나는 것처럼...[왜 당시 선생님들은 모두 훈육주임 같았었는지, 엄청 많이 얻어 맞은 기억밖에 별로 좋은 추억들이 없거든. 국민학교 2학년때 나의 집 앞에 삼촌벌 되는 애가 1학년으로 막 입학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