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렛돌’은 아무 데나 있지 않았다‘고렛돌’은 ‘고레’를 만드는 돌이다. ‘고레’는 곡식을 가는 데 쓰는 도구인 맷돌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맷돌을 ‘고레’라고 한다. ‘고레’는 ‘골다’(磨)의 명사형이다. 맷돌이나 ‘고레’는 둥글넓적한 돌 두 짝을 포개고 윗돌 아가리에 갈 곡식을 넣으면서 손잡이를 돌려서 간다. 제주도 사람들은 제주도 일정한 지역에서만 ‘고렛돌’을 마련하여 ‘고레’를 만들었다.구좌읍 행원리 ‘질난밧’ 남동쪽, ‘높은술’(행원리 41, 42번지) 동녘의 동서로 긴 능선을 이룬 동산을 ‘고렛동산’이라고 하였다. 고시홍
‘구제기물에’의 도전‘구제기물에’는 제주도 해녀들이 물속으로 들어가 맨손으로 또는 ‘골갱이’라는 호미로 구제기를 잡아내는 도구라는 말이다. 제주 역사 속에서 구제기는 진상 품목에 들지도 않았다. 그러니 제주 역사 속에서 제주 해녀 사회에서 ‘구제기물에’는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조선 시대 때, 제주 해녀들에게는 판매와 진상을 위한 미역과 전복, 스스로 먹기 위한 모자반, 밭에 거름으로 쓰기 위한 해조류 정도가 주요한 채취물이었다. 1911년 강제병합 직후 자료 (南鮮寶窟濟州島)에는 전복 30톤, 해삼 33.9톤의 생
‘구제기’와 ‘소라’‘구제기’는 제주도 바다에서 살고, ‘소라’는 제주도 이외 육지부 남해안과 서해안 바다에서 산다. 구제기와 소라는 생태적으로 썩 다른 종자이기 때문이다. 구제기의 뚜껑이 석회질이다. 소라의 뚜껑은 각질이다. 구제기는 미역이나 감태 등 바다풀을 먹으며 자란다.소라는 바지락조개나 게 따위를 잡아먹으며 자란다.구제기의 식성은 초식성(草食性)이고, 소라의 식성은 육식성(肉食性)이다. 그러니 제주도 바다에서는 소라는 한 마리도 살지 않고 있고, 제주도 이외 육지부 남해안과 서해안 갯벌 바다에서는 구제기가 한 마리도 자라지
“제주도 사람들은 그물을 사용하지 않았다. 산과 바닷속이 험악하니, 물고기는 낚고 들짐승은 활을 쏘아 잡았다”(不用網罟. 山險海惡 不用網罟. 魚則釣 獸則射). 윗글은 조선왕조 영조 41년(1765)에 편집된 (김영길 번역본, 제주문화원)에 들어있는 내용이다. 제주도는 화산섬이다. 그래서 이형상(李衡祥)은 화산섬 제주 바다는 칼날 같은 돌들이 묶여 서 있더라고 기록하였다. 칼날 같은 돌들이 묶여 서 있는 화산섬 제주 바닷속으로 그물을 드리우기가 사나우니, 물고기는 낚시로만 낚았다는 것이다. 화산섬 제주 바다
제주 여자들의 운반 관습은 옛 문헌에서도 기록되었을 만큼 제주도 이외 육지부 지역과 썩 달랐다. 김정(金淨, 1486∼1521)도 (濟州風土錄)에서, ‘부이부대’(負而不載)라고 기록하였으니 말이다. 부이부대란 제주 여자들은 운반 대상의 물건을 등에 질지언정 결코 머리에 이어 나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주도 이외의 육지부 남자들이나 제주도 남자들의 운반 관습은 어떠한 물건을 지게 또는 바지게에 올려놓고 등에 지어 날랐으니, 김정은 부이부대라 하여 제주 여자들의 운반 관습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원초 경제사회 때 제주 여자들
‘촌물내기’는 여름 동안에 불어오는 남동풍에 따른 해수 피해로 여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밭을 말한다. ‘촌물내기’에서 ‘촌물’은 짠물을 말하고, ‘-내기’는 ‘신출내기’, ‘서울내기’의 그것처럼 짠물이 끼치는 바람에 농사를 그르치는 밭을 낮잡아 이르며 붙이는 말이다. 지역에 따라 ‘여름밧(여름밭)’이라고도 한다. ‘촌물내기’와 ‘여름밧’은 남동풍이 짠물을 끼얹는 우도와 제주도 남동부지역 해안지대에 분포한다. 우도와 제주도에서 남동풍은 청명(4월 5일경)부터 추분(9월 23일경) 사이 부는 여름 계절풍이고, 북서풍은 추분부터 청명
도구는 일할 때 쓰는 연장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이 글에서 다루려는 도구는 기계에서 가공하여 만든 공산품(工産品)은 아니고, 원초 경제사회 때의 것들이다. 원초 경제사회란 백성들이 삶에 필요한 자원을 자연에서 마련하며 살았던 시대이다.나는 최근에 라는 책을 내놓았다. 는 1982년부터 내 삶의 대부분을 박물관 연구원으로 보내는 동안, 부끄럽지 않으려고 제주도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어르신들에게 도구에 대해 가르침 받았던 내용으로 채워졌다. 제주도 도구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제주도 이외
‘그차진’의 ‘그치다’는 ‘끊다’[斷] 또는 ‘베다’[割], ‘잇으다’는 ‘잇다’[繼]의 제주어이다. ‘그차진 목을 잇으다’는 ‘끊긴 목을 잇다’라는 말이다. 정치를 담당하는 권력자들의 세계에서는 망나니를 두어 생사람의 목을 치는 수도 있었지만, 제주도 백성들의 세계에서는 산짐승, 미역, ‘코지’까지도 끊긴 목을 잇는 일이 전승되었다. ‘코지’는 바다 가운데로 뾰족하게 나간 육지이거나 갯바위이다.다만 제주도 백성들의 세계에서도 사회생활에 필요한 식자재 확보 수단으로 ‘피쟁이’를 두고 마소 따위의 목을 치고 도살하는 수가 있었을 뿐이
남풍은 남쪽, 또는 남동쪽에서 기원하여 북쪽, 또는 북서쪽으로 부는 바람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남풍 또는 남동풍을 ‘마보름’이라고도 일렀다. 이하 ‘마보름’을 남풍이라고 일관한다. 남풍은 따스하고 물기가 많은 축축한 바람이다. 그리고 북풍은 북쪽, 또는 북서쪽에서 기원하여 남쪽, 또는 남동쪽으로 부는 바람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북풍, 또는 북서풍을 ‘하늬보름’이라고 일렀다. 이하 ‘하늬보름’을 북풍이라고 일관한다. 북풍은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다. 제주도에서 남풍 계절은 청명(4월 5일경)부터 추분(9월 23일경)까지, 그리고 북풍
고씨 어르신에게 가르침 받은 제주도 토종 감1996년 어느 날, 나는 제주시 건입동에 사시는 고○○(1931년, 남) 어르신에게 제주도에서 전승되는 재래종 감을 가르침 받았다. 지금은 돌아가신 고씨 어르신은 살아생전에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으셨지만 나에게 큰 가르침을 한없이 주셨다. 고씨 어르신에게 나는 제주도 토종 감도 가르침 받았다. 제주도 토종 감은 ‘고레감’, ‘쉐불감’, ‘폿감’, ‘조밤감’ 네 가지가 전승된다는 것이다. 나의 필드 노트에 적어 놓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고레감’은 ‘고레’처럼 납작한 감이지.(제주도
‘두모악’의 등장‘두모악’을 논문으로 맨 처음 발표한 사람은 한영국(韓榮國)이다. 한영국(韓榮國)은 1981년 『한우흔 박사 정년기념 사학논총』(韓㳓欣博士停年紀念私學論叢)에서 「‘두모악’고」(‘頭毛岳’考)를 발표하였다. 그 내용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조선 시대 때 ‘두모악’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두모악’(頭毛岳)은 ‘두무악’(頭無岳, 頭無惡), ‘두독야지’(豆禿也只)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두모악’은 제주도를 떠난 이들이다. 원래 거주지였던 제주도를 불법적으로 이탈하여 전라도나 경상도 해안에 거주하던 제주도민을 가리키는
마을마다 이름을 갖고 있다. 제주도 여러 마을 이름에는 자연발생적 이름과 인위적 이름이 있다. 자연발생적 마을 이름은 그 마을 주변, 곧 제주도 사람들이 지은 이름이다. 인위적 마을 이름은 마을 사람들의 합의에 따라 지은 이름이다. 옛날 마을 주변 사람들이 하나의 마을 이름을 지은 까닭은 여러 마을을 구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자연발생적 마을 이름은 오랫동안 통용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 무렵에 이르러 제주도 여러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 마을 이름을 짓는 수가 많았다.제주도 여러 마을의 자연발생적 마을 이름 속에는 제주도
‘촐’(꼴)은 주로 소에게 먹이는 월동 사료 풀이고, ‘새’(띠)는 표준어로 띠에 해당하는 초가지붕을 덮는 풀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비곡’의 ‘비다’는 베다[刈]의 제주어다.제주도 사람들은 ‘촐’과 ‘새’를 밭에서 마련하였다. 밭은 곡류, 채소, 풀을 심어 농사를 짓는 땅이다. 제주도에서 농사를 짓는 밭은 네 가지가 있다. 제주도 이외의 육지부 농가에서 농사를 짓는 땅은 밭과 논 두 가지만 거느리고 있는 것과 달랐다. 제주도의 밭은 마소의 월동 사료인 촐을 가꾸거나 자라는 땅인 ‘촐왓’, 그리고 초가지붕을 덮는 풀인 ‘새’를 가꾸
제주도의 산짐승제주도 사람들은 산야에서 산짐승을 잡았을 때, 이웃 사람들에게 산짐승의 고기를 나누어줄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산짐승의 고기를 나누어주기를 ‘분육’(分肉)이라고 하였고, 나누어주지 않기를 ‘비분육’(非分肉)이라고 하고자 한다. 제주도 사람들이 사냥물을 놓고 이루어졌던 ‘분육’과 ‘비분육’에는 법도(法道)가 있었다. ‘법도’는 법률을 지켜야 할 도리라는 말이다. 왜 제주도에서는 ‘분육’과 ‘비분육’의 법도가 작용하였을까. 그 배경의 속내로 쑥 들어가 보고자 한다. 이 글은 제주도 사람들이 삶에 필요한
제주 선조들의 땀내 나는 일상을 살펴온 ‘서민 생활사 연구자’ 고광민 선생의 연재 ‘제주 생활사’가 8년 만에 [제주의소리]를 통해 돌아온다. 바로 ‘고광민의 제주 생활사’다.‘제주 생활사’는 지난 2010년부터 2014년까지 도내 일간지와 간행물을 통해 연재됐다가 총 112편으로 중단된 바 있다. 이후 2016년 제주지역 출판사 ‘한그루’를 통해 책으로 묶어 발간됐다. 책 ‘제주 생활사’는 “주류의 역사나 정치사회사가 아닌, 고단한 생업의 현장에서 하루하루를 꾸려나갔던 옛 제주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그 속에 담긴 지혜”를 6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