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성 문화유적100] (74) 용수리 절부암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제주여성과 그들의 삶이 젖어있는 문화적 발자취를 엮은 이야기로, 2009년말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펴냈습니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2008년에 이미 발간된 『제주여성 문화유적』을 통해 미리 전개된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필진들이 수차례 발품을 팔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제주가 있도록 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의 협조로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을 인터넷 연재합니다.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주의소리

▲ 절부암제를 지내는 장면 ⓒ장혜련

절부암(節婦巖)은 제주 고씨(高氏)의 절개를 기리는 바위다. 시간을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저지촌에 살던 고씨는 19세 되던 해 같은 마을의 강사철(康士喆)과 혼인한다. 어부였던 강사철이 하루는 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죽고 말았다. 애통하고 절통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던 고씨는 몇날 며칠 식음을 전폐하며 남편의 시체라도 찾아보겠다고 헤매 다녔다. 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자 남편의 뒤를 따르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고 용수리 바닷가 속칭 ‘엉덕동산’ 바위 나무에 올라 목을 매어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다. 운명은 야속하게도 그녀가 죽자 홀연 강사철의 시체가 이 바위 나무 밑에 와 멈췄다. 그러자 사람들은 지아비를 향한 고씨의 절절한 그리움에, 또한 두 사람의 정신의 아름다움에 감복하였다. 그리고 고씨 부부를 합장하여 장사지냈다. 1869년(고종 6) 판관 신재우愼載佑는 고씨의 넋을 기리기 위해 바위에 절부암이라 새겼다. 이는 제주도 유일의 전서로 조각된 마애명이다.

언제부터인가 마을사람들은 고씨의 정신을 아름답게 기려 마을제를 거행하고 있다. 고순남(1945년, 여)에 의하면 예전에는 제를 지내지 않다가 마을해녀들이 중심이 되어 1전, 2전 돈을 모아 밭(약 450평)을 사서 제비祭費를 마련하여 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예전에는 이장이 중심이 되어 밭을 운영하였으나 지금은 부인회에서 소작을 주어 경영한다.

마을제는 매년 음력 3월 15일로 오전 10시부터 시작하여 오후 3~4시경까지 지낸다. 부녀회, 해녀회, 청년회가 함께 주관하여 용수리 전주민이 참석하는 마을축제이다.

절부암은 어찌 보면 조선시대라는 한 시대를 살다간 여인의 비극적 운명의 상징물이다. 조선은 종법(宗法)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여성의 지조와 정절을 시대가 지향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여 여성들을 억압하였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열녀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당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홍살문이나 열녀비로 승화되어 추앙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부암은 한 여인이 간직했던 시대를 초월한 사랑을 기리고자 하는 우리의 염원과 잇닿아 있는 아름다운 정신을 담고 있기에 뜻 깊은 유적이다. / 장혜련

*찾아가는 길 - 용수리 포구 → 김대건신부기념관 좌측 → 박달나무 군락지 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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