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몽골을 만나다] 몽골지배 100년 이후의 여운

최영이 목호토벌을 위해 제주에 와있는 동안 개경에서는 공민왕이 시해되고 열 살밖에 안 된 어린 우왕이 추대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제주는 최영이 목호를 토벌하고 떠난 뒤에도 반(反)고려·명(明) 분위기가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목호 잔존세력이 합세하거나 주도한 반기가 잇달아 일어났고, 제주사람들도 고려를 향해 선뜻 발길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최영의 평정 때 제주사람들도 많이 희생됐고, 관리의 수탈과 행패는 여전했을 뿐만 아니라, 목호세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뒤 제주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말을 바쳐야했기 때문입니다.

최영의 목호 평정 이후 명은 탐라 말을 계속 가져갔습니다. 1379년(우왕 5)부터 1392년(공양왕 4)까지 고려가 명나라에 바친 말 3만여 필 가운데 2만 필 이상이 탐라 말이었으니, 그 광경을 지켜봐야 했던 제주백성들의 심정이 상상되고도 남습니다. 

1386년(우왕 12) 고려 조정은 명나라의 탐라 말 요구에 차질 없이 대비하고 제주백성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제주토착세력들의 자식을 불러들여 달래기도 했으며, 다음해에는 성주인 고신걸의 아들 고봉례를 데려다 벼슬을 주기도 했습니다. 고봉례는 탐라의 마지막 성주였지요.

제주에서 고려와 명에 대한 반기가 멈추고, 고려 정부가 제주관할에 자신감을 가진 것이 이때부터입니다. 명도 고려의 제주관할권을 비로소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로써 제주는 명실상부하게 고려에 다시 귀속됩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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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로능동산묘 ⓒ김일우·문소연

탐라의 마지막 성주가 잠든 곳  거로능동산방묘

거로마을 능동산에 무덤 두 기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무덤들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방묘(方墓)이기 때문입니다. 방묘는 밑둘레가 네모난 모양의 무덤을 일컫는 것인데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무덤양식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곱게 단장되어 있지만, 고분은 수차례 도굴된 채 오랫동안 방치돼 있었고, 두상이 없어진 문인석상과 제단석, 묘비기단석 등이 주변에 널려있었다고 합니다.

무덤 사이에 “이곳은 탐라성주 고봉례의 묘로 추정되는 고분으로 1996년에 발굴·조사한 후 원상복구”했다는 내용의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족보에 나타난 고봉례의 묘 위치도 같은 지점이라고 하네요. 1411년(태종 11)에 사망한 고봉례는 탐라의 마지막 성주였습니다. 다른 한 기는 고봉례의 부인 남평 문씨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두 고분을 발굴조사했을 때, 조선초기의 백자대접조각 1점, 백자조각 2점, 청자조각 1점이 출토됐다고 합니다.

▲ 거로능동산묘 ⓒ김일우·문소연

최영이 목호를 평정한 이후 제주에 반(反)고려 분위기가 누그러지지 않자, 1387년(우왕 13) 고려 조정은 제주토착세력을 회유하는 차원에서 당시 성주 고신걸의 아들을 데려다 벼슬을 줍니다. 그 고신걸의 아들이 바로 이 무덤의 주인공인 고봉례였던 것이지요. 이에 고봉례는 1388년(창왕 즉위) 군기소윤(軍器小尹)[종4품]이라는 벼슬을 받아 관직생활을 했습니다.

이 방묘는 몽골과 제주의 만남에서 비롯된 역사가 담긴 의미 있는 유적이자 제주에서 유일하게 탐라성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소중한 유적입니다. / 김일우·문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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