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몽골을 만나다] 몽골지배 100년의 여운

이 무렵 명나라는 고려에게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반납하라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몽골이 강제로 점거했었던 것을 공민왕이 회복했는데, 이전에 원나라 땅이었던 지역은 모두 명나라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나선 것입니다.

최영은 명나라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반발하며 요동정벌을 주장했고, 이성계는 최영의 주장에 반대했습니다. 최영을 의지하고 있던 우왕은 최영의 손을 들어주어 1388년(우왕 14)에 요동정벌이 진행됩니다. 

그런데 최영이 전쟁지휘와 감독을 위해 서경(西京)[평양]으로 나아가자 우왕도 굳이 따라 나섭니다. 그리고 요동 지역의 전장으로 나가려는 최영을 적극적으로 만류합니다. 선왕인 공민왕이 시해당한 것은 최영이 제주목호를 토벌하러 제주로 갔기 때문이었다며 최영과 하루라도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최영은 할 수 없이 우왕과 함께 서경에 남고 이성계에게 군대를 내주어 요동정벌 길에 나서도록 했습니다.

북쪽으로 가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장마를 만나 섬에 갇히게 되고 군대를 전진시킬 수 없게 되자 고려조정에 여러 차례 회군 의사를 보냅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회군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원치 않는 전쟁 길에 올랐던 이성계는 왕명을 거역하고  군대를 돌리는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게 됩니다. 이후 이성계 세력은 최영을 요동정벌의 주모자로 몰아 제거하고 정국구도를 이성계 중심으로 이끌어 마침내 조선을 건국하게 된 것이지요.

결국 제주목호의 반기가 뒷날 고려멸망과 조선건국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위화도회군을 가능케 하는 기회를 불러오게 된 셈입니다. 이어 제주는 조선시대를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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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무후무한 헌마공신  의귀리 김만일묘역

▲ 의귀리 김만일묘역 ⓒ김일우·문소연

김만일묘역은 나지막한 구릉 위에 마삭줄 등 덩굴식물이 멋지게 얽혀있는 산담을 네모지게 두르고 문인석 2기가 마주서서 지키고 있습니다. 봉분과 문인석, 비석, 혼유석 등을 묶어 ‘의귀리 김만일묘역’이라는 명칭으로 2009년에 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묘역 내에 동자석도 있었는데, 2004년에 누군가 훔쳐 가버렸다는군요.

문인석은 조선시대 제주 고유의 석물문화를 밝히는 데, 무덤은 17세기 중반 방형 산담을 가진 봉분의 축조양식을 살피는 자료로써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니 눈여겨볼만 합니다. 비석은 보통 봉분 앞에 놓이기 마련인데 여기에 있는 비석은 담장에 거의 붙다시피 세워져 있습니다. 봉분 앞 상석과 봉분 사이에는 ‘넋이 나와 놀도록 하는 돌’이라는 ‘혼유석’이 놓여있습니다. 봉분이 꽤 큽니다. 일반적인 봉분은 직경이 3m 내외인데, 이 봉분은 직경 5.4m 높이 1.5m에 이르러, 봉분 주인의 위상을 짐작케 합니다.

▲ 김만일 묘역 ⓒ김일우·문소연

▲ 김만일 묘역내 문인석 ⓒ김일우·문소연

이 묘역의 주인공 김만일은 조선시대 때 ‘헌마공신(獻馬功臣)’의 칭송을 받으며 제주출신 가운데 가장 높은 벼슬을 지낸 인물입니다. ‘헌마공신’은 오직 제주에만 존재했던 특별한 공신입니다. 김만일은 ‘말의 고장’ 제주의 역사와 그 면모를 엿보게 하는 인물인 셈이지요.

1550년 의귀리에서 태어난 김만일은 말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라는 전설이 전해질만큼 탁월한 목축전문가였던 모양입니다. 중년 무렵에는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말 목장을 운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 김만일 묘역내 혼유석 ⓒ김일우·문소연
당시 조선정부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부터 인조대(1623~1649)에 이르기까지 말 때문에 고충을 겪어야 했습니다. 잇단 전쟁으로 가뜩이나 말이 필요한데 명나라까지 많은 말을 자꾸 요구했고, 게다가 육지부 목장은 전란의 와중에 그 기능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때에 김만일이 많은 말을 국가에 바쳤으니, 나라로서는 극한 가뭄에 만난 단비가 아닐 수 없었겠지요. 김만일의 헌마는 임진왜란 2년 뒤인 1594년을 시작으로 1627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문헌기록에 분명하게 나타난 것만 해도 1,240마리가 넘습니다.

시대적인 요구에 맞물린 면도 없지 않겠지만 자신이 평생 일군 재산인 말을 선뜻 내놓는다는 것은 웬만한 통찰력과 결단력 없이는 어려운 일이겠지요. ‘말의 고장’ 제주의 통 큰 인물 김만일은 그렇게 국난극복에 적극적으로 기여한 공로로 헌마공신으로 일컫는 칭송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울에 올라가 종1품 벼슬까지 지내는 등 사회적 지위도 최고조에 다다랐습니다.

나라에 말을 바친 김만일의 공적은 그의 대에서 그친 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들 김대길이 1658년 국가로부터 산마장의 감목관을 제수 받은 것을 시작으로 후손들이 세습해나갔습니다. 산마장은 김만일의 목장에서 비롯된 말 사육목장으로 당시 감목관은 현감과 같은 종6품이지만 제주사회에서는 최고 지위에 해당하는 직책이었습니다.

▲ 탐라순력도 '산장구마' ⓒ김일우·문소연

산마감목관은 1897년 그 직책이 없어지기까지 218년 동안 김만일 가계 집안에서 모두 83명이 역임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까지 제주도내에서 김만일 가계 집안만큼 높은 관직을 계속 이어가며 실질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던 일가는 찾아볼 수 없다는군요. 200년 넘게 뻗친 김만일의 기운도 상당하지만 제주의 전통적 근간산업이었던  말 사육이 지녔던 영향력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 김일우·문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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