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용진의 제주음식이야기] 50년대 이후 제주 사람들의 먹거리

해방이후 격변의 시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제주의 음식문화는 자급자족 형태에서 근대적인 유통체계를 병행하여 식재료를 공급받는 과도기적인 형태를 보이게 된다. 특히 칠성로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일본인 상권에서는 근대적인 상업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왜세문화가 확산되면서 제주 토박이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실질적으로는 대다수의 제주사람들은 그 영향권 밖에 있었으며 주로 성안 사람들이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 가운데 토박이 관료계급과 일본을 직접 왕래했던 계층, 보통학교이상의 교육을 경험한 교육 수준이 비교적 높았던 신여성을 중심으로 변화의 욕구가 강했는데 이러한 욕구는 내선일체를 부르짖었던 일본제국주의 교육방침에 따른 일본본토문화에 대한 동경이라기 보다는 생활의 편리함과 화려함과 풍요로움에 대한 단순한 동경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제주사람들의 식생활에서 일본의 문화에 동화되어가는 상황은 그다지 진척되지 않았다. 그 원인은 패션이나 교육, 예술 등 전문가 그룹이 만들어가는 일반적인 고급문화와 달리 식생활문화는 기본적으로 그 량(量)적인 조건을 먼저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곤궁한 식량상황에서 피지배계층이 바라보는 지배계층의 풍요로운 음식문화는 그 질적인 면의 동경보다는 늘 량적인 면의 동경이 앞설 수밖에 없음은 당연할 것이고 그렇게 식재료의 확보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식생활의 변화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성밖의 시골에서 식탁의 변화는 요원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나마 성안에서도 생활수준이 약간이나마 여유롭던 무근성 지역에서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 것인데 당시 상황이 전시였기 때문에 무근성지역 역시 활발한 변화는 일어나지 못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미 직, 간접적으로 경험한 새로운 식생활 문화에 대한 변화의 욕구는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여건이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도출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맞게 된 해방은 제주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시련의 시발점이었다. 특히 일본에 거주하던 도민들이 대거 귀향하고 동경의 대상이었던 칠성로와 북신장로와 산지천 일대의 상가와 적산가옥들을 토박이들이 차지하면서 일본인들의 생활문화를 답습할 것처럼 보였으나 얼마 가지 못하여 좌, 우의 사상대립과 4.3으로 인한 제주도 전체의 혼란상태로 식민지시대보다 더 열악한 경제상황이 이어졌고 그로인한 식량자원 확보도 많이 힘든 상황이 전개된다. 특히 산간 마을이 소개되고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해안 마을로 집중되면서 식량사정은 눈에 띄게 악화되고 민심도 흉흉해지면서 자연물의 채집을 통한 먹을거리 확보가 생존의 목적이 되다시피 했다.      

▲ 1950년대의 식사모습. 밖에서 일하다 들어와 마룻바닥에 늘어놓은 채 쪼그리고 앉아서 먹고있다. 잠잘 때 외에는 머릿수건을 풀지 않는 제주여성의 억척스러움 이 묻어난다. (제주도여성문화 게재) ⓒ양용진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먹었던 구황음식의 종류를 살펴보면 섯보리(앞쏠(아래아))밥,너패(넓패)밥, 속밥, 톨밥, 파래밥, 감저밥, 감태밥, 놈삐(무수)밥, 콩밥(봄에는 보리콩(완두), 여름에는 두불콩, 가을에는 강낭콩), 전분쭈시밥, 체밥, 무개기(빼때기쭈시밥), 곤포(다시마)밥, 강냉이(가루)밥 등 보리쌀이나 조 등에 섞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섞어 그 량을 불려 먹었으며 그나마도 밥을 지을만큼의 곡식이 없는 경우도 많아서 송피(송기-소나무 속껍질)죽, 섯보리죽, 속죽, 호박죽, 피죽, 강냉이죽, 풀죽(명아주, 비름, 개자리, 난시, 꿩마농 등), 깅이죽, 보말죽, 문게죽 등 다양한 죽을 만들어 먹었다.

▲ 톳밥과 강냉이죽. 강냉이죽은 미국의 원조로 들여온 옥수수가루로 끓인다. ⓒ양용진

또한 그냥 먹기 힘든 잡곡들은 가루를 만들어 다른 작물들과 섞어서 범벅을 만들어 먹었다. 범벅의 재료는 메밀가루나 보리가루가 이용되었는데 주로 메밀가루가 많이 이용되었다. 메밀은 재배기간이 짧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자라고 싹부터 대, 열매에 이르기까지 버리는 것이 없다. 특히 가루는 조금만 열을 가해도 잘 익어서 옛어른들은 “모(아래아)밀은 품에 안았당도 먹는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다른 먹을거리들을 가열해서 익히다가 메밀가루를 풀어넣기만 해도 퍽퍽한 밥 대용식이 될 수 있었다.  범벅에 함께 버무려졌던 재료는 감저, 무, 넓패, 호박, 톳, 파래, 속, 깅이, 누룩낭 등 실로 다양하며 메밀이나 보리가루조차 없을 때는 무릇(믈릇)과 너패를 섞은 무릇범벅을 만들어 먹거나 는쟁이(느쟁이)로도 범벅을 만들어 먹었고 전분쭈시를 물에 불려 시고 아린맛을 우려낸 후 말려두었다가 이것을 다시 가루를 내어 보리가루에 섞어먹기도 했다.

▲ 깅이 범벅과 감저 범벅. 깅이범벅은 보리가루를 섞었다.ⓒ양용진

그러나 무근성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경우 해방이전에 지방 관료로 누려왔던 특권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양호한 식생활을 누릴수 있었는데 보리쌀과 메밀가루 등을 시장을 통해 구입하고 타지방에서 들여온 물산을 통하여 쌀, 소금 등도 확보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한국전쟁

이렇게 곤궁한 와중에 맞게 된 한국전쟁은 제주도 전체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제주에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래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인구유입을 경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50년 전쟁 발발당시 산지천 서쪽 제주주정공장자리에 육군 제15훈련소가 창설되고 이듬해 3월 모슬포에 육군 제1훈련소가 들어서면서 군인과 피난민 등 15만명 이상의 인구가 몰려 든 것이다. 갑자기 몰려든 피난민들로 인하여 수용시설과 식량의 부족현상은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지면서 성안 사람들도 힘들기는 매 한가지였다. 특히 무근성에는 옛 물통을 중심으로 사방 100여 미터에 이르는 공간에 피난민들이 거주하는 판자집들이 집단을 이루면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는데 이 피난민촌은 70년대 초반까지도 존재하다가 새마을 운동이 그 절정에 달하던 70년대 중반에 자취를 감추었다.

▲ 옛 피난민촌이 있었던 무근성 물통 터. 키낮은 판자집들이 붙어있었고 한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양용진

이 피난민촌에는 지리적인 특성상 호남 출신의 피난민들이 많았는데 이들 중 대다수가 용담동으로 이주하면서 먹돌새기와 다끄네 등에 새로운 촌락을 구성하게되고 이로 인하여 서초등학교 출신자들 중 현재 4~50대의 소위 386세대들의 본적과 출신지를 조사해 보면 무려 40%이상이 고흥, 완도, 해남, 진도 등 호남출신으로 집계된다.

이렇게 많은 수의 외지인들의 인구유입은 한때 토박이들과의 잦은 마찰로 이어지곤 했는데 음식물의 도난에 의한 시시비비를 가리는 분쟁이 대부분이었다. 우영밭의 채소와 건조 중인 해산물을 훔쳐가는 일들이 비일비재했고 무근성의 토호세력은 피난민촌에 대하여 매우 심각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어서 자녀들의 엄격한 통제와 함께 접촉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먹을거리를 구하기 힘든 피난민들의 입장에서는 자연물의 채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탑동과 한드기, 버렝이깍 등으로 나가 보말, 깅이, 구젱기 등 해산물을 닥치는대로 채취하여 그 흔하던 자원도 많이 고갈되기에 이르러 토박이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 1950년대 탑동의 모습. 무근성 피난민촌의 거주자들은 어린아이들도 탑동에 나와 해산물을 채집하는 것도 중요한 일과였다. (2009년 제주시 발간, 사진으로보는 제주의 옛모습(김홍인 사진)에서 부분인용) ⓒ양용진

음식이 산업이 되다

이렇게 극심한 식량의 고갈은 그만큼 많은 량의 먹을거리를 단기간에 필요로하게 된 사회구조의 변화에서 비롯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오히려 제주도의 먹을거리가 산업화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식품이 산업화 된다는 것은 음식 또는 음식의 재료가 규격화되어 공장에서 일괄적으로 대량 생산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생산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인은 지속적인 대량 소비처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대량의 군인집단을 필요로 하고 이들 군대를 먹여 살리기 위하여 음식물을 안정적으로 대량 생산 해내야하기 때문에 결국 식품산업이 형성되게 된다. 제주에서도 사상초유의 거대한 집단인 육군 훈련소가 들어서면서 이러한 식품산업이 활발하게 성행하게 되는데 1950년과 51년에 걸쳐 산지천변과 무근성, 졸락코지, 버랭이깍 등에서 그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45년 해방이후 산지천변에는 일제시대로부터 명맥을 이어온 북신장로와 칠성로로 이어지는 서쪽도로가에 과거 오일장으로부터 지속되어온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고 해방이후 모슬포에 창설된 국방경비대 제9연대등에 물품을 공급하는 군수창고 역할을 지속하게 되며 칠성로 끝 광제교 너머의 동쪽 동문로에서 주정공장에 이르는 천변으로도 상가와 공장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이곳에 두부공장과 콩나물 공장등이 들어서게 된다. 졸락코지에는 황하소주공장, 무근성에는 호남양조장과 유기공장, 버랭이깍에는 도살장이 세워지고 후일 유창산업으로 바뀌어 종합식품회사로 바뀌게 되며 일제시대부터 있었던 간장 공장도 생산량이 줄었지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51년 모슬포에 육군 제1훈련소가 세워지면서 많은 인구가 모슬포로 이동하게 되면서 제주성안의 식품산업은 자연히 피난민과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유통구조가 바뀌게 되는데 앞서 말한 기존 상권이 자연스럽게 상설시장이 되어 동문재래시장이 되었으며 무근성의 기존 토호세력과 용담동에 새로 보금자리를 잡아가는 피난민들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서문상설시장이 54년 정식으로 이름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시장들은 치열한 생존의 현장으로서 동문상설시장과 서문상설시장을 막론하고 피난민들이 생존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상업활동에 참여하여 결국 호남출신 피난민들의 경제적 부를 축적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쟁을 계기로 제주에 미군 기지가 들어오면서 미군의 전투식량과 옥수수가루와 밀가루 등 식량 원조의 영향으로 기존에 접하지 못했던 서양음식을 접하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특히 맥넵기지에서 흘러나온 양키물건들 중 상당수가 먹을거리였는데 텐가루, 설탕, 커피, 분유, 치즈와 쵸콜렛, 햄, 사탕 등을 주로 모슬포에 연고를 두고있는 사람들이 유통시키곤 했는데 이 물건들의 주 소비처가 무근성과 칠성로 일대였다.   

그리고 전쟁의 화마속에서 구호사업이라는 명칭으로 사회사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예로 나사로병원 북쪽 옛 일식집을 개조해서 난민구호소로 식량을 나누어줬던 배급소와 전쟁고아 900여명을 보살피던 전농로에 있었던 한국보육원을 들 수 있다. 이곳이 음식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집단급식을 실시했다는 것이다. 전쟁통이긴 했지만 미국에서 원조해준 물자들을 정부에서 받아와서 수백명의 일반인들에게 매일같이 먹이는 일은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며 그 주변에는 다시 식품과 연관된 일들, 이를테면 운송, 납품, 보관, 후처리 등의 연관작업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식량배급소는 독립유공자이며 해방이후 조천면장을 지낸 윤석호선생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현 탐라사료 윤태현 회장의 부친이기도 하다. 또한 한국보육원은 한국사회복지사업의 어머니로 불리며 한국 최초의 사회사업가로 선정돼 세계사회사업가 한국대표, 한국사회복지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신 원불교에 몸담고 있던 황온순선생(팔타원 황정신행 종사, 2004년 102세로 타계)에 의해 운영되었다.

화교와 중국식당

50년대는 한반도 전체가 혼란에 빠져 있었는데 그 와중에 우리나라 음식문화에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사건이 조용히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화교의 등장이다. 중국대륙에서 국공내전에서 국민당 정부가 패하여 공산당을 반대하던 중국인들이 대거 이웃나라로 피신하는데 거리상 가까운 우리나라에도 많은 수의 화교가 밀려왔다. 48년부터 50년 사이가 가장 많았다고 기억하는데 공교롭게도 한국전쟁과 시기적으로 일치하면서 많이 불안해 했고 지리적으로 안전할 것 같은 제주에 몰리게 된다. 이들이 한국에서 종사했던 직업이 대부분 중국음식점이었는데 창업시기가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부터 1960년대 초반에 몰린다. 제주의 경우 화교들의 2세들이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인 1965년 화교소학교가 개설될 정도로 세력을 형성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업체가 아주반점을 비롯한 칠성로의 중국식당들이었다. 청요리집이라 불렸던 중국식당들은 이후 저렴한 밀가루를 이용한 면요리들을 주력상품으로 서민들과 급속하게 친숙한 서민형 식당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제주읍성 이외에 한림읍에도 화교들이 중식당을 열어 지금까지도 성업중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국식당들의 약진이 눈에띄는 곳이 서울과 인천, 부산이외는 제주지역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에 걸쳐 산지천에 2~3층의 건물을 반 복개하듯이 세우고 이곳을 원래동이라 불렀는데 이 상가에 중국음식재료상이 들어서서 한국인들에게는 재료를 공개하지않고 오직 화교에게만 재료를 팔아 화교상권을 철저히 보호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70년대 초반 박정희 정권의 화교자본 압박정책에 따라 미국이나 캐나다 등 화교들이 이미 뿌리를 튼튼히 내리고있는 지역으로 많이 떠나고 그 자리를 한국주방장들이 차지하게 되며 외식산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 60년대 산지천에 다리를 내리고 지어지는 건물들. 원래동이라 불렸던 이 건물에 새로운 식당들이 들어서고 중식재료상이 있었다. ⓒ양용진

무근성이 앞장서다

5~60년대 외지인구의 유입은 다양한 문화의 유입을 나타내는 것이었지만 전쟁의 후폭풍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저 생명유지를 위한 맹목적인 삶을 유지하고 있어 그다지 문화적인 특징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6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하고 특히 5.16혁명이후 강력한 군사정권의 강압적 사회정화에 따라 모든 경제활동이 량적인 증산정책 위주로 변하면서 비교적 고립적이던 제주 고유의 문화는 사라지고 점차 현대화라는 명목으로 모든 것을 개량하게 된다.

주거환경의 변화에 따라 화장실이 개량되고 우영밭이 사라지게 되며 초가집이 스레트집으로 바뀌고 장독대가 사라지는 작업이 제주읍성을 중심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예가 조리설비의 변화, 특히 화구의 변화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연료 변천 과정을 보면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에서는 간데기(숯풍로)를 쓰거나 토박이들은 장작이나 그 밖의 지들커를 이용하였고 해방이후에도 일정기간 이어져 왔다. 60년대에는 연탄이 일반화 되어 제주시내에 연탄공장만 대동연탄, 대륭연탄, 삼성연탄 등 대략 6곳 정도로 기억된다. 60년대 후반 들어서면서 석유곤로가 나타나는데 이는 연탄과 함께 사용되었고 70년대 중반에는 좀 더 편리한 가스레인지가 나타났다. 불과 20년 사이에 오랜 세월 이어져온 흙바닥 정지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무근성과 중앙통 일대의 비교적 인텔리계층의 지방 관료와 신흥 부자들이 주거환경 개선을 선도하면서 식생활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일어난다. 
                   

▲ 50년대후반 제주여고의 가사실습시간. 이때도 간데기를 사용하고 있었다.(제주여성문화) ⓒ양용진

이른바 ‘혼분식 장려운동’과 ‘식생활개선운동’, ‘쌀증산(자급자족)운동’과 ‘가정의례간소화운동’ 등이 그것이다. 어떻게든 식량자원을 확보하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던 박정희 정권은 비축미의 확보를 위하여 70년대 초반 전국적으로 혼분식장려운동을 펼치고 도시락 검사등을 통하여 보리등의 잡곡을 의무적으로 섞도록 강요했고 일주일에 한 두차례 옥수수빵을 배급해주어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제주의 경우 이러한 조치는 오히려 불필요한 조치였는데 다만 북초등학교의 경우에는 6~70%의 학생이 이미 70년대 초에 쌀밥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 가정에서는 도시락 밥을 따로짓는 진풍경도 보였다.

식생활 개선 운동의 경우 육영수여사의 적극참여로 한국부인회등의 여성단체를 결성하고 각 지역별로 여성회관이라는 교육용 건물을 신축하여 각종 계몽운동의 전초기지로 활용하는데 이곳에서 영양빵 등 밀가루를 이용한 음식, 소나 돼지를 대신할 초식동물(토끼) 요리, 과잉생산된 양파 등 신품종 채소를 활용한 요리 등을 교육시키는데 이러한 계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처음에는 제주성안 사람들, 특히 무근성 사람들이 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전업주부로 행사에 참가할 시간적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70년대 초 토끼고기요리강습을 진행하는 모습과 76년 12월 관덕정뒤 시청앞에 있었던 여성회관에서 치러진 식생활개발세미나 행사 후 관계자들이 촬영한 모습 ⓒ양용진

가정의례간소화운동은 가정의례준칙이라는 행동강령을 만들어 이를 준수하도록 사회분위기를 조장하는데 기본적으로 음식을 많이 만들지 말라는 지시사항이 주를 이루었다. 이로 인하여 한동안 제주의 관혼상제는 국수 한 그릇으로 치러내는 경우가 많았고 빙떡이 사라지고 고깃반이 사라지고 몸국이 사라지는 수모를 겪었다. 이러한 강압적인 사회적 분위기는 8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데 쌀 자급자족 100% 달성과 86, 88 국제행사 유치 등 사회 전반의 유화적인 분위기에서 80년 여의도에서 전두환정권의 대국민 불만 무마용 행사로 평가받는 ‘국풍80’이라는 행사를 통해 각 지방의 전통음식들을 되살려 한달 동안 서울에서 선보이고 이를 계기로 전통음식문화를 다시 복원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흔적 20년이 지나서 나타나다

60년대 중반 무근성에서 나타난 재미있는 현상은 일본문화의 영향력이 새롭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혼란스럽고 곤궁한 생활이 조금 정리되면서 사회적으로 안정되자 과거 지배계층의 일본인들의 생활을 돌아보며 그 중 편리한 것들을 골라서 답습하기 시작했다. 특히 60년대 중후반 이미 무근성의 많은 집들이 냉장고를 갖추고 있었고 전기밥통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70년대 초반 보온도시락을 당연시 가지고 다녔을 정도였다. 이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았을 때 대단한 특권의식으로 무장되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일본으로부터 들여오는 조미료와 긴꼬망간장 등은 무근성에서는 매우 일반화 되어 있었고 특히 아이들은 일제 돔보우 연필과 모리나가 캬라멜이 최고의 선물이었을 만큼 일본문화가 뿌리 깊게 잔재하고 있었다.

생활수준에 여유로움이 생기면서 나름대로 차 상위 문화를 동경하는 행위로 받아 들여질 수도 있겠으나 오랫동안 부엌살림에 시달려온 제주여성들이 살림의 편의성을 쫓아간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일본 제품의 구매 욕구는 이후 국산 가전제품의 선택과 구입을 위해 국산품장려운동을 펼치면서 그 선봉에 서는 사람들도 무근성의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밖의 무근성의 변화

▲ 양용진 제주향토음식 보존연구원 부원장 ⓒ제주의소리
한때 무근성에 산다는 것 만으로 부러움을 사던 때가 있었다. 부와 권력이 집중된 지역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6~70년대 서사라가 개발되면서 상당수의 신흥 인텔리계층이 빠져나가고 70년대 후반 신제주가 개발되면서 신흥자본가들이 빠져나가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어 이후 전국에서 지가가 가장 저렴한 주거지로까지 거론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무근성의 현실이다.

그러나 무근성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상징적인 의미가 쇠퇴하진 않을 것이다. 외세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으면서 나름대로 걸러낼줄 알았고 토박이들끼리의 말없는 결속력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반문한다면 나름대로 제주사람들의 생활 문화가 뿌리째 뽑히지 않고 이정도라도 지켜지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한다. / 양용진 제주향토음식 보존연구원 부원장

<제주의소리/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