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관성.투명성.집단성 갖춘 '메뉴얼'을 짜자

지금 제주사회는 적자생존으로 대변되는 세계화라는 생태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과거 섬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내세워 주입된 왜곡된 폐쇄적 특성에 얽매여 특유의 진취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연고주의(緣故主義) 향수에 더욱 깊숙이 빠지면서 모든 현안을 배타적이고 근시안적인 자기안위라는 틀로 재단하는 가치관의 틀 속에 갇혀 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서 비롯되는 지역정책의 일관성(一貫性) 결여는 도정의 정체성과 정책기조를 헝클어뜨리고 실패와 좌절로 연결시키고 있다. 결국 증폭되는 도민갈등과 엄청난 사회비용의 부담을 초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책의 일관성은 왜 중요한가. 그것은 업적을 창조하고 성공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레이건이 루스벨트, 케네디에 이어 세 번째로 위대한 미국 대통령으로 꼽히게 된 데에는 일관성을 바탕으로 한 세상과의 소통과 설득과 실천의 리더십에 있었다. 그는 옛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규정해 초지일관 군사력 강화로 압박했다. 결과는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그리고 동유럽의 민주화를 이뤄 냈다. 국민과 소통하고 그들을 설득하고, 희망과 비전을 가지고 국력을 한 방향으로 결집시키는 리더십이었다. 지금 이러한 일치된 리더십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곳이 바로 우리사회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 교수는 "최선의 경제 정책이 뭔지는 모를 수 있지만 확실한 차선(次善)의 정책은 경제주체들에 예측 가능성을 줄 수 있는 '일관성 있는 정책'"이라고 말한다.

제주 도정이 정치·사회의 안정을 도모해 나가면서 분명한 정책의지 표명과 일관된 정책시행을 통해 경제주체들의 미래에 대한 예측력을 높일 수 있는 경제 환경을 지속적으로 조성해 나가야 하는 이유이다.

3·11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사태가 던진 최대 화두인 ‘매뉴얼(manual)’이 업무흐름의 일관성 확보라는 특장성을 가지고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된다. 엄청난 대참사 속에서 일본 국민들이 보여준 침착함과 성숙한 시민의식은 세계를 감탄시켰다. 특히 일본 사회는 그동안 ‘매뉴얼’을 통해 국가 체제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면서 전후 사회의 재건과 경제 부흥의 기적을 이뤘다.

그러나 일본의 관료주의는 ‘매뉴얼’에 대한 맹신으로 인해 ‘매뉴얼 함정’에 빠져 사고의 경직성을 낳고 창의적인 대응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결과적으로 ‘메뉴얼 사회’인 일본을 21세기에 문제해결 능력을 보이기 어려운 국가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우리는 일본 사회가 이같이 ‘매뉴얼’의 덫에 걸려 허우적거린다고 해서 ‘매뉴얼의 가치’를 평가절하해서는 안된다. ‘매뉴얼’은 '과거 노하우(know-how)의 축적'이다. ‘매뉴얼’은 철저한 사전 준비와 계획을 통해 상황 대응능력을 키우며 현실적인 임기응변을 가능케 한다. 또 집단의 힘을 극대화하고,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상황에서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자연재해의 예방과 사후처리 등 재해 발생과 관련된 모든 과정에서 일사분란하고 일관된 행동을 할 수 있는 ‘매뉴얼’을 준비하고 이에 따라 대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자연재해 및 재난은 소중한 인명과 재산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피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국가적 재난을 맞았을 때 일본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대응 시스템을 갖추고 있을까? 여태껏 재해는 천재(天災) 그 자체보다는 인재(人災)에 의한 피해가 더 큰 실정이다.

첫째 예로서 자연재해를 예방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관리당국의 근시안적 사고와 행정으로 피해가 발생한 경우이다.

올해 7월 9일 경남 밀양시 상명동 양지마을에서 산사태가 발생해 아랫마을 주민이 사망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조상제사를 위해 모인 가족들이 제사를 준비하다가 산사태로 집이 쓸려가 버린 것이다. 주민 이야기에 의하면 밀양시는 2007년 마을 뒷산 자락에 380m의 임도(林道)를 만들었다. 당국은 산불이 나면 진화용 소방차가 다닐 수 있고 목재운반도 편리해진다면서 주민을 설득한 것이었다.

그러나 산사태 전문가인 이수곤 서울시립대 교수는 “관리당국에서 산에 길을 내면서 산사태 대비를 소홀히 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에 의하면 380m 임도 가운데 5곳은 시멘트 포장 대신 자갈만 깔았는데, 폭우가 내릴 경우 빗물이 모두 임도 아래로 흡수되면서 지하층의 흙의 점성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폭우가 계속되면 지반 유실로 이어져 산사태가 발생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관리당국에서 당초 임도를 설치할 때 미리 산사태 가능성을 치밀하게 예측하고 점검해 비포장 임도의 위치를 조정하거나, 예산을 더 확대해 산사태에도 안전한 임도를 설치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토지개발의 경우 자연을 훼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관리당국은 개발행위를 허가하는 과정에서 법률적인 사항만 기계적으로 검토할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복합적으로 고려해 허가여부를 결정하는 ‘매뉴얼’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둘째 사례는 ‘매뉴얼’ 없이 시간을 낭비하다가 구할 수 있는 생명을 잃어버린 경우이다.

2011년 7월 4일 강화도 해병대 해안초소에서 총기사고가 발생했다. 박모 상병은 총상을 입은 후 2시간 35분 동안 생명이 유지된 것으로 밝혀져 한국군의 응급체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부 외과 전문의들은 가슴에 총상을 입은 박 상병이 1시간 이내에 전문가에게 수술을 받았다면 회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번에 사고를 당한 박 상병은 11시 45분경 가슴에 총상을 입고 119 구급차를 타고 인근 강화읍의 간이 민간병원으로 옮겨졌다. 이 병원은 수술할 시설과 의료진도 갖춰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 때문에 박 상병은 이 병원에서 단지 수혈 등 응급처지를 받고 오후 1시 50분쯤 헬기를 이용해 오후 2시 45분경 국군수도병원에 후송됐다. 사고 후 가장 중요한 2시간을 허비함으로 인해 국방의무를 수행 하던 꽃다운 젊은이가 안타깝게 숨졌다. 총상 직후 헬기로 수술이 가능한 병원으로 바로 옮기는 응급체계가 갖춰졌더라면 박 상병의 귀중한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셋째 사례는 1차 재난은 ‘매뉴얼’에 따라 대처를 잘 했으나 2차 재난시 ‘매뉴얼’ 부재로 혼란을 겪었던 경우이다.

올해 3월 11일 발생한 일본의 쓰나미는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지진 등 자연재해에 대한 준비가 세계에게 가장 완벽하다는 일본도 상상을 초월하는 쓰나미의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일본 국민의 높은 질서의식은 세계인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쓰나미로 인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사태에 대해 일본 당국은 우왕좌왕 하면서 시간을 소비했다.

과거 소련의 체르노빌, 미국의 스리마일 원전사고의 공통된 원인도 냉각처리시설의 작동 중지였다. 냉각수가 제때 공급되지 않으면 원자로의 노심이 노출되고 감압설비가 폭발하고 방사능물질이 노출된다. 일본당국은 냉각수 부족이 문제가 되자 바닷물의 사용여부를 놓고 의견이 맞서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급박한 상황에 대비한 준비된 ‘매뉴얼’이 없었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현안을 처리하는 데는 한계를 드러냈다.

일본 정부가 비상사태에 대비해 전문가들의 판단을 미리 확보해 두었더라면 자국 국민과 인근 국가를 혼란과 불안에 빠뜨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은 인근 주민들과 농축수산물이 방사능에 노출되는 극한 상황을 자초한 셈이 됐다. ‘위기 대처 매뉴얼’이 잘 준비된 일본조차도 예상치 못한 긴급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 유비무환의 자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넷째 사례는 자연재해 및 재난에 대비하는 데에는 공공기관뿐만 아니라 기업의 경영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경우이다.

갑작스러운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타격을 받지 않고 계속 업무를 하기 위해 위험관리 대비책의 하나로 BCM(Business Continuity Management : 업무연속성경영) 전략이 선진국을 중심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2001년 9.11 때 모건스탠리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내 총 50개 층을 빌려 사용하고 있었다. 모건스탠리는 북측 타워가 육중한 보잉 747 여객기에 의해 강타 당하자 곧 북측 타워에 근무하던 직원 1000여 명을 대피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직 공격을 받지 않은 남측타워 직원 2500여 명도 즉시 대피시켰다.

평소 업무연속성경영 프로그램에 따라 3500여 명의 직원들은 인근 뉴욕의 브루클린 백업센터로 신속하게 대피해 지휘본부를 재가동하면서 업무를 정상화시켰다. 이 같은 조치로 임직원 3500여 명 중 실종자는 15명에 그쳤고 보험헤징(hedging)으로 손실은 1억 달러에도 채 안됐다. 모건스탠리는 전무후무한 재난의 직격탄을 맞고도 하루 만에 업무를 정상 재개해 투자자들의 무한신뢰와 관심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교훈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제주사회에서도 ‘매뉴얼’의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제주 사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첫째,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실행되면서 축적된 적절한 임기응변과 위기대처 방안을 종합적인 시각에서 ‘매뉴얼’로 전환하고 실천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융합시대의 다양다기한 상황 변화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협력해 서로 간의 경계를 허물면서 지구촌 시대의 변화에 창조적으로 대응하는 사회시스템을 만들어 가야 한다.

최근 TV인기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 참여하는 가수들이 완벽에 도전하는 혼(魂)으로 청중과의 창조적 소통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성공의 기적을 낳고 있다. 새로운 ‘매뉴얼의 창조’에도 열정과 혼을 담아야 지역사회에 감동을 주고, 선진 사회로 진입하는 데 촉매제가 될 수 있다.

둘째, ‘매뉴얼 정비 및 운용’의 중심에 있는 공직사회 곳곳에 뿌리 내린 관료주의의 개혁이 필요하다.
공직사회의 역할은 도민 전체에게, 때로는 미래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구촌 시대를 맞아, 세상의 문이 서로에게 활짝 열리는 글로벌 개방시대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공직사회도 국제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혁신적 사고방식과 치열한 도전정신, 철저한 합리주의로 무장해야 한다.

셋째, ‘매뉴얼 정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대다수 도민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매뉴얼의 중요성’에 대한 교육과 홍보를 통해 이들의 실천의지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매뉴얼 행동수칙’을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정규교육 과정에 포함시켜 자연스럽게 생활화를 유도해야 한다. 또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공무원의 안내에 따를 수 없는 돌발적인 상황에 대비한 준비도 필요할 것이다.

이와 같은 국가위기관리 시스템 구축 여부가 국가 경쟁력 및 신용도 평가에 중요한 기준이 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어느 사회에서건 모든 정책과 제도의 변화가 기득권층과 신진계층 간을 구획하고 불화와 갈등을 야기하는 게 현실이다. 요즘 제주사회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많아지고 있다.

정책이나 외부환경의 변화가 생길 때마다 사회전체가 홍역을 치르지 않으려면 일관성·투명성·집단성을 담보하는 ‘매뉴얼’의 효율적 정비와 운영을 통해 고질적인 비리와 부패의 추방, 공정사회를 구현해 나가야 한다.

   
이제 제주를 지구촌 시대의 반석에 올려놓고 경쟁의 우위에서 화합과 평화의 낙원으로 돋보이기 위해서는 즉흥적인 정책 남발을 지양하고 지도자의 독선과 포퓰리즘을 자제하는 사회시스템 구축에 도민의 역량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3·11 일본 대지진과 이를 수습하는 일련의 과정은 결코 우리에게 강 건너 불이 아닌 살아있는 교훈이다. 우리에게 준비의 시간과 마음가짐을 주는 절호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고운호 전 한국은행 제주본부장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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