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영 칼럼] '진실추구' '참회'와 '용서'

해마다 음력으로 칠월 칠석이 되면 대정읍 상모리 '사계공동묘역' 남쪽에 위치한 '백조일손지지'에서는 어김없이 '위령제'가 진행된다.

내가 어릴 적에는 할아버지를 따라 아무도 몰래 백조일손지지를 찾아 부서진 묘비 뿌리에다 삼배도 드리고 소줏잔도 부었다.

왜 인간은 이렇게 잔인한 것인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곰곰히 생각했다.

내가 이모님이 준 꿀을 먹을 때면 아버지의 영정 사진속 입술에다 젓가락으로 묻혀서 발라드리곤 했다.

한 겨울 대정 초등학교 운동장에 함박눈이 가득 내렸다. 수업하다 말고 쉬는 시간에 나아가서 아이들과 어울려 눈싸움박질을 했다. 내가 단단하게 손바닥으로 굴려서 만든 눈볼을 날렸을 때 한 학생의 얼굴을 명중했다. 그 아이는 달려가서 자기 담임선생에게 울면서 고자질했다. 그 학생 담임 선생이 나를 불러들여서 호통을 쳤다.

"아버지 이름이 뭐야?"

"아버지 없습니다"

"호로자식이구먼!"

'호로자식?' 그것이 홀어머니 자식이란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순간부터 '아버지'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왜 우리 곁을 떠나셨나요?'

좀더 커서는 아버지가 그리울 때는 달밤에 '백조일손지지'를 찾아가곤 했다. 캄캄한 밤에는 무서워서 찾아가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네살박이 어린애기가 아장아장 50년동안 걸어서 한 '원로장로' 앞에 나타나서 "당신이 우리 아버지를 죽였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그런 일이 실제로 2001년 3월 28일 서울 상도동 소재 '해병 기독회 중앙회관'에서 일어났다.

그는 "6.25 사변이라는 것이..."하면서 자신의 과오를 조금도 후회하거나 참회하는 심정이 아니었다.

나에게 그는 두 번씩이나 '화해'의 제스쳐로 피묻은 오른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두 번 다 거절했다.

"당신이 모슬포 나의 아버지 공동묘역에 와서 참배하고 우리 유족들에게 용서를 빌면 그 때 나는 당신과 악수를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보다 더 한 용기를 가지고 가겠다"고 나와 약속했다.

그는 위령제를 며칠 앞둔 8월 어느 날 내 손전화로 '인민재판'이 두려워서 갈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를 결코 용서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의 참회를 촉구하고 있다.

몇 달 전 정신과 의사인 이중오 선생님이 나의 심중을 깊이 헤아리고는 뉴욕시내까지 9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자동차로 달려와서 꼭 읽어 보라면서 책 한 권을 전해주고 갔다.

중국사람들이 어떻게 일본 전쟁범죄자들을 처리했는가를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 다큐멘터리였다.

[전쟁과 인간: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노다 마사야키/서혜영 역, 길, 2000)이었다.

1945년 종전후 중국인들이 소련으로부터 중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전쟁포로들 1062명을 인계받고 그들의 범죄사실을 재판하였다. 신기한 것은 사형이나 무기를 받은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중 악질적인 45명이 유기형에 처해졌는데,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어떻게 대우를 했는지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964년 4월 9일까지 모두 일본으로 되돌아 갔다. 그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전쟁범죄자들을 가두고 감시감독을 한 이들은 거의 모두가 유가족들이었다.

전쟁범죄자들을 평상시 일본인 습성데로 대우를 해 주었다. 배가 고프다고 하면 자신들은 강냉이를 먹으면서도 쌀밥을 더 만들어 주었다.

그들에게 백지를 나눠주고 '반성문'을 쓰게 했다. 저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때는 전쟁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였다.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를 전혀 느끼지 못하였다. 즉 '죄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전범들을 고문하거나 고통을 주어 '죄'를 추궁하지 않았다. 오로지 가해와 피해의 사실에 대한 인식을 요구했다.

다른 가능성이란 고문이나 총살을 당해 죽어가는 인간의 고통을 느끼는 자신이다. 가식적인 참회나 회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써의 감정을 회복하고 그 고통이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저들은 자신들이 한 행위를 뉘우치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전법들이 참회를 하고 나서야 중국인들은 저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들 가운데는 반전운동에 가담하여 활발하게 활동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자신의 행위를 재해석하고 인간의 깊은 상처를 헤아리게 되었다. 그들은 인간으로써의 진정한 '감정'을 회복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상당수가 중국 본토로 다시 가서 유가족들을 만나고 용서를 구했다.

나는 진정한 참회와 용서란 무엇일까? 지금도 '화두'로 삼고 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너희들을 용서한 것같이 남을 용서하라"고 한다.

내일 백조일손 55주기 위령제에는 경찰악대가 나온다고 전해들었다.

"참, 세상이 많이 바뀌었네요. '화해'의 제스춰인가요?" 물었다.

"글쎄?"

아직도 우리 아버지네를 학살한 군부대인 해병대가 그때 그 자리에 용트림하고 눌러 앉아 있다.

해병대 사령관이든 해군사령관이든 해군참모총장이든 아니 국방부장관이든 찾아와서 '참회'하고 과거의 죄를 빌어야 한다.

현 '참여정부'의 수장인 노무현 대통령은 경선후보 당시 백조일손 묘역을 참배하고 "내가 대통령후보가 되고 또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다면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보상하겠다"고 약속하고 갔다고 우리 유족대표들로부터 전해들은 바 있다.

조만간 그 일들이 이뤄지길 기원한다.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형님 누님, 저들이 울려주는 진혼곡이 진정한 진혼곡이 되길 또한 기원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붙이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모슬포 절간창고에 갇혔다가 음력 6월 12일(양력 7월 26일) 군에 인계된 후 행방불명된 50여명의 시신을 찾아 함께 모시는 일이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산방산 기슭에서 해병대에 의해서 총살 암매장 되었다(해병 2기 김숙원 증언).

물론 당시 제주읍과 서귀포 성산포 등지에서 행방불명된 분들의 시신도 찾아서 안장하는 일이다.

4.3항쟁때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서 아군경에 의해서 총살당하거나 행방불명된 '제주인'들도 찾아내야 한다. 아직도 '진실추구'는 요원하다.

'진실추구' 이것이 바로 '살아남은 자의 도리'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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