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의회, 협의체 구성-공권력투입 자제부터 시작하자

 서귀포시가 제주해군기지 사업부지 안 농로의 용도폐지를 수용했다. 중덕해안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농로를 용도폐지해 주민들의 출입을 막기 위한 것이다. 서귀포시장은 정부가 담당공무원들에 대한 형사처벌과 징계, 행정적 재정적 불이익을 가하겠다고 위협해온 사실을 밝혔다. 제주도에서도 정부의 예산이 잘리게 생겼다고 압박했다. 이런 위협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인다고 했다.

 시장 개인으로서는 그랬을 것이다. 아무 죄 없는 담당공무원들이 징계를 받는다면 그들의 장래에 큰 상처가 될 것이니 부담이 컸을 것이다. 행정적 재정적 불이익은 어떤 형태일지 모르나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시장은 서귀호의 선장으로서 선원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승객들을 잊고 말았다. 폭풍을 만나 배가 곤두박질치기도 하고 암초에 부딪치기도 하면서 배 안에서 이리저리 내팽개쳐져 만신창이가 된 승객들, 선장은 물론 선원들 중 누구 하나 챙겨주지 않는 상태에서 4년 이상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승객들 말이다.

 선원들이 징계를 당하거나 형사처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땅을 뺏기고, 구속당하고, 5천만원의 벌금을 내고, 거액의 손해배상소송을 당하고, 공사방해금지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지면 공사장 근처에 가는 것만으로 1인당 하루에 5백만원을 내야 하는 승객들은 잊고 말았다. 선장은 승객들을 배 밑창에 내버려둔 채 선원들과 함께 구조선에 오르면서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서귀포시가 이런 결정을 한 것은 인명피해가 우려되는 상황 앞에서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제주도의회가 '갈등해소평화해결기구' 구성을 제안해 어렵게 제주도의 동의를 받아낸 뒤였다. 마지못해 동의한 티가 역력한 제주도와 함께 의회가 실무협의를 진행하기로 한 것이 이틀 전이었다. 해군기지 건설에 긍정적인 한나라당마저 민주당과 불상사를 막기 위해 초당적 협력을 약속한 때였다. 야5당 국회진상조사단의 보고서 발표도 코 앞에 두고 있었다. 모두가 불상사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시도하고 있을 때였다.

 제주도정의 태도는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1년이 지나도록 해군기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겨우 화순과 위미, 사계리에 주민투표를 제의했다가 거부당한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 그리고는 이미 물 건너간 일이라고 남의 일 얘기하듯 했다. 도의회와 가진 정책협의회에서는 해군기지 문제만 다루는 도의회 임시회 개최를 제시했다. 도지사는 빠진 채 의회가 회의를 한들 알맹이 있는 결론이 나올 게 없다. 비공개회의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알 수 없지만 협의체 구성에 겨우 합의했다. 그나마 실무협의를 통해 협의체를 구성한다는 것이 한가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인다.

 일단 합의한 대로 시급하게 협의체를 구성해야 한다. 협의체 구성 뒤에 첫 번째로 할 일은  경찰력을 동원해 해결하려 하지 말 것을 정부에 요구해야 한다. 중앙 정치권에서도 여러 채널을 통해 경찰력 투입 자제를 요청해놓은 상태이니 도지사가 도의회와 함께 해결 방법을 찾겠노라고 하면 그마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강경방침을 고수하기는 정부도 부담을 느낄 형편이다. 그리고 나서 도지사가 중심이 된 협의체에서 일정 시한을 정해 해결책을 마련해내는 것이다.

 국책사업이라고 해서 지방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아니다. 국책사업도 변경된 전례가 있다. 방사선폐기물저장시설 문제가 그렇다. 방사선폐기물 처리는 그야말로 시급한 국가적 과제였다. 지난 2003년 7월 전북 부안군수의 유치신청으로 정부는 부안군에 방폐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주민들과 환경단체의 반발로 만 2년 동안 반대투쟁이 계속됐다.
 
 정부는 부안을 후보지에서 철회하고 방폐장이 건설되는 곳에 한국수력원자력자원공사 본사를 이전한다는 인센티브를 제시했다. 유치를 신청한 군산과 경주에서 주민투표를 통해 찬성주민이 많은 경주가 선정됐다. 대형국책사업이라 하더라도 지역 주민이 반대하고 미래가치에 걸맞지 않다면 공론을 거쳐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이후 부안군은 신재생에너지 메카로 도약했다.

 해군기지 문제는 부안 보다 더욱 간단치 않다. 지역주민들의 반대는 물론이고, 국책사업이라고 하면서도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해 이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점, 세계자연유산에다 절대보전지역 등 환경과 관련한 문제 외에도 국가지정 멸종위기동식물들이 잇따라 새롭게 발견되고 있는 점, 국방정책의 개혁에 따라 해군의 지향하는 방어목표가 바뀐 점, 제주의 지역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과 달리 오히려 관광수입 등 경제적인 피해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점 등 재검토해야 할 이유가 한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 고희범 전 한겨레신문 사장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미 도민들과 약속했던 대로 윈-윈책을 마련할 마지막 기회다. 아무 것도 해보지 않은 채 "물 건너 갔다"고 할 만큼 상황이 녹록치 않다. 그 생각 먼저 버려야 길이 보인다. 마지못해 하는 척만 할 것이 아니라 진정성을 갖고 접근하면 된다. 도의회가 나서지 않았는가. 도지사가 적극적인 자세로 도의회와 힘을 합치면 왜 길을 찾을 수 없겠는가. 이번 주에 발표될 야5당 국회진상조사단의 조사결과보고서도 참고하면 길은 가까이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희범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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