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0주년 '4.3쉰들러' 문 서장 묘 확인
1966년 쓸쓸히 사망, 한라산 중산간 안장

▲ 독립운동가이자 '4.3의 쉰들러'인 문형순 서장의 묘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 제주의 소리
광복 60주년을 맞아 전국이 60년전 그날의 감격에 휩싸인 8월 15일. 만주벌판에서 국민부 중앙호위대장이자 조선혁명군 집행위원으로 일제에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가 문형순(1897~1966)의 묘는 한 없이 초라했다.

누가 보면 과연 이 묘가 1930년대 만주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며 한민족의 기개를 떨쳤던 국민부(國民府) 문형순(文亨淳·이명 文時映) 중앙호위대장의 묘일까 의심할 정도로 혈혈단신인 그는 한라산 중턱에서 잡초만 무성한 채 쓸쓸히 광복 60주년을 보내고 있었다.

제주4.3당시 모슬포경찰서와 성산포경찰서장을 지내며 수백명의 양민을 구해 낸 '4.3의 쉰들러' 이자 독립운동가인 문형순의 묘가 처음으로 공식 확인됐다.

# 국민부 중앙호위대장·조선혁명군 집행위원 묘 외부에 첫 모습 드러내

'제주의 소리'는 광복 60주년인 8월 15일, 지난 40년간 문형순의 묘를 관리해 왔다는 전정택(79·全晶澤) 제주지구평안도민회장과 함께 제주시 아라동 평안도민회 공동묘지를 처음으로 찾아갔다.

독립운동가로만 알려진 문 서장이 1930년대 만주 한인사회 준 자치정부인 국민부 중앙호위대장이자 조선혁명군 집행위원이었다는 사실이 14일 처음으로 확인된데 이어 그동안 '어디 어디에 묻혀 있다고 하더라'며 소문으로만 떠돌던 그의 묘가 이날 처음으로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1ⓒ 제주의 소리
문 서장의 묘는 제주시 아라동 소재 3700평 규모의 '평안도민회' 공동묘지 한편에 커다란 소나무를 뒤로한 채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었다. 70여년 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제에 맞섰던 독립운동 지도자라고 하기에는 우리 사회가 너무나 죄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 그의 묘비에는 '故 南平文公亨淳之墓'라고 뚜렷이 적혀 있었다. 또 좌측에는 '西紀 1897년 1월4일 平南 安州 出生. 1966년 6월20일 死. 一平生 抗日 獨立鬪士 大韓民國 樹立 後 摹瑟浦 城山浦 警察署長 歷任' 이란 단출한 약력이 그가 살아온 69년의 세월을 웅변했다. 

국민부 중앙호위대장이자 조선혁명군 집행위원인 그의 빛나는 이력은 '一平生 抗日 獨立鬪士' 란 비문만이 대신해 주고 있었다. 그동안 언제 돌아가셨는지 몰랐던 그의 사망은 묘비를 통해 1966년 6월 20일 타계했음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문 서장의 유족을 찾고 있는 국가보훈처도 지금까지 독립운동가인 문 서장이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르는 상태이다.

# 1966년 사망 첫 확인, '一平生 抗日 獨立鬪士' 비문만 독립운동가 대변

이날 문 서장의 묘를 안내 해 준 전 회장을 통해 그동안 베일에 싸였던 문 서장의 이력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게 가장 큰 성과였다.

전 회장은 '제주지구 평안도민회장'이란 그의 직책이 말해주 듯 평북 용천 출신으로, 1948년 북한에서 내려와 서울을 거쳐 그해 12월 26일 경찰의 일원으로 제주에 첫 받을 내딛은 인물이었다.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인 4.3 광풍이 불던 당시 문 서장과 마찬가지로 제주에서 경찰을 지내다 5.16 군사쿠데타가 발발하던 그해 봄 경찰 옷을 벗은 전직 경찰 출신이었다. 그는 '제주도참전경찰유공회장'이란 또 하나의 직책을 갖고 있다. (그에 대해서는 뒷부분에 기술하기로 하자)

전 회장을 만나면서 가장 궁금했던 게 문 서장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였다.

▲문 서장의 묘는 제주시 아라동 평안도민회 공동묘지 좌측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 좌측 소나무 앞에 있는 묘비가 문 서장의 묘ⓒ 제주의 소리
"문 서장은 경찰을 그만 둔 후 무근성에서 경찰에게 쌀을 나눠주던 쌀 배급소에서 일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경찰에게 월급을 제대로 주지 못하던 때라 쌀로 봉급을 대신 주기도 했지요. 집은 산지천에서 칠성통으로 들어가는 입구 부근에서 남의 집 단칸방에 살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경찰서장(경감)을 지냈다고는 하지만 지금처럼 퇴직금도 없었고 그 분은 돈을 전혀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상당히 힘들었죠. 그런데 내가 제주를 떠나 육지에서 생활하다 돌아와 보니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 경찰 떠난 후 쌀배급소 일하다 쓸쓸히 세상 등져

전 회장의 기억이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제주의 소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문 서장은 1950년말 성산포경찰서장에서 물러난 후 당시 김호겸 서귀포경찰서장의 권유로 함께 경남경찰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고 이곳에서 함안경찰서장을 1년 동안 지낸다. 그리고 함안경찰서장을 그만 둔 후 다시 제주에 내려와 경찰 쌀배급소에서 일하게 된다. 

어쨌거나 전 회장이 경찰을 그만 둔 후 육지로 올라갔다가 다시 1966년에 제주에 내려왔으나 그 때 문 서장은 이미 유명을 달리한 때였다. 

"저가 제주도에 다시 내려온 후 문 서장의 이야기를 들으니 상당히 쓸쓸한 상태에서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그 당시 문 서장의 장례를 해줬던 분들 중에는 여경 경사였던 이춘홍씨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나중에 들었는데 독립운동을 했고 경찰서장이 돌아가셨다는 내용을 중앙에 보고했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하사금을 보내줘 평안도민회가 금일봉을 보태 당시 건입동 공동묘지였던 황세왓에 묻었다고 그래요. 저도 제주에 다시 내려와서 도민회 총무를 맡은 후에야 문 서장의 묘를 봤습니다"

▲ 문 서장의 묘를 40년 동안 관리해 온 전정택 평안도민회장ⓒ제주의 소리
"그런데 어느 날인가 문 서장의 묘비가 누군가 해머로 내리쳐 두 동강이 나 있었습니다. 두번 내리친 자국이 선명했죠.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 문 서장의 묘비를 고의적으로 깨뜨렸다고 생각해서 1976년 4월 5일 평안도민회 공동묘지였던 지금의 제주대학 자리로 옮겼다가 다시 대학이 들어서면서 공동묘지를 옮기게 돼 지금의 자리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 독립군 출신으로 일제 앞잡이었던 경찰·군간부도 함부로 못 대해

그는 문 서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정의감이 많고, 의리가 있었던 상관으로 기억납니다. 같은 경찰서에 근무를 하지 않았지만 제가 함덕지서에 근무할 때 지나가다가 차를 잠깐 세워 '근무를 잘하고 있느냐'로 물어볼 정도로 정도 많았던 분이었습니다. 이북 사람들이 대게 그렇듯이 욕을 잘해 '문 도깨비'란 별명을 달고 다녔습니다.

문 서장은 당시 경찰은 물론, 군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했었죠. 다 알다시피 그 당시 경찰이나 군 간부라는 게 대부분 일제치하에서 일경을 하거나 군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잖습니까. 때문에 독립군 출신인 문 서장에게는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를 못했습니다. 일제의 앞잡이들과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성산포경찰서장 당시 예비검속자들을 총살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것도 그 같은 독립군의 기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독립군 출신이 아니었다면 감히 계엄치하 군의 명령을 거부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 전 회장은 문 서장은 정의감이 강하고 의리있는 독립운동가였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제주의 소리
이 부분에서 조심스럽게 문 서장이 어떻게 제주에 내려왔는지를 물어봤다. 일각에서는 문 서장이 이북출신임을 염두에 둬 혹시 '서청(서북청년단)과 관련이 있을게 아니냐'는 의혹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청과 문 서장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리 문 서장이 변명할 수 없는 고인이고 이북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제주도민들에게 '서청'이 가져다주는 느낌을 생각할 때 독립운동가인 문 서장에게 '서청'을 말하는 것은 너무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북에서 내려왔다고 모두를 서청이라고 몰아버린다면 참 답답합니다. 저 역시 이북 출신이고 4.3 발발 직후 경찰자격으로 내려왔습니다만 서청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요"

# "그에게 서청을 말하는 것은 독립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아니"

그는 서청 이야기가 나오자 다소 상기된 듯 한 표정이 역력했다.

"물론 문 서장이 어떻게 제주에 내려왔는지 내가 정확히는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추정할 수는 있습니다. 해방직후 미군정은 상해임시정부나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김구 선생 같은 분도 개인자격으로 귀국했고요. 문 서장도 아마 북을 거치지 않고 서울로 바로 내려왔을 거예요. 당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그랬으니까요. 그러다가 아는 이들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경찰에 받을 디딘 후 제주에 내려왔다고 볼 수 있죠. 분명한 것은 그와 서청을 연관시키는 것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도 아닙니다."

전 회장은 1966년 제주로 내려온 후 지금까지 문 서장의 묘를 관리하고 있다. 추석절을 앞둬 성묘때가 되면 으례 문 서장의 묘를 찾는다.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도 문 서장이 같은 고향이자 독립군출신이잖습니까. 그런데 자손이 없어 아무도 그의 묘를 돌 볼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 뿐입니다. 만약 이 분이 후손이 있어 독립유공자가 됐다면 지금처럼 이런 대접을 받겠습니까. 적어도 국립묘지나 충혼묘지로 옮겼겠죠. 독립운동을 한 게 분명한 사실인데도 후손이 없어 독립유공자 신청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 있는 한 벌초는 계속 할 것입니다"

# 전 회장도 독립운동가 집안

▲ 전정택 회장 ⓒ 제주의 소리
전 회장은 이야기 도중 일본이야기만 나오면 목소리를 높였다. 그를 집으로 모셔드리는 도중 차안에서 이유를 물어봤다. 그랬더니 전 회장 역시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말하기 쑥스럽지만 저가 어렸을 때 저희 5촌 당숙이 저희 집에 들르실 때면 항상 일본 경찰이 쫓아왔어요. 독립운동을 했던 거죠. 지난해 처음으로 독립기념관을 찾았더니 '제5 전시실'에 저희 당숙의 사진이 걸려 있더군요."

전 회장이 말하는 5촌 당숙은 전덕원(全德元,1871~1940) 선생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3도유약소(十三道儒約所)에서 최익현(崔益鉉) 등과 함께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의병을 모아 관서지방에서 활동하다가 1906년 체포돼 15년 형을 받고 황주(黃州)로 유배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그 후 만주로 망명해 대한독립단 군사부장으로 무장항일 활동을 했으며, 대한통군부 재무부장과 동의부 경무감 및 참모부감을 지녔으며 의군수 군무총감으로 일본경찰서를 습격한 인물이다.

또 국내에 있는 일본 고관 암살을 계획하던 중 일경에 체포돼 12년의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독립사를 편찬하며 항일운동을 재개하다 다시 체포돼 옥중에서 사망한 전형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그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그의 형 용택(작고)씨는 해방 후 북에서 조만식 선생과 함께 반탁운동을 전개하는 등 전 회장 집안 역시 문 서장 못지않은 독립운동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기자의 차에서 내리기 직전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 마디 던졌다.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솔직히 말하면 저는 4.3당시 단 한 발의 총도 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북에서 박해를 받고 동생과 함께 내려왔는데 제주에 와서 보니 도민들도 험한 꼴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북에서 우리 자신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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