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철의 제주해안 따라가기(15)] 옹포해안

▲ 한림리와 옹포의 경계를 이루는 옹포천과 옹포천 하구 한라산 소주공장.ⓒ홍영철
한림리와 옹포리의 경계에는 옹포천이 흐르고 있다. 옹포천의 다른 이름은 건남도(아래아)릿내로, 다리를 이르는 제주방언인  '도(아래아)리'가 있어서 이름 지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옹포천 하류는 상시 물이 흐르고 수량도 비교적 풍부해서 옹포천 하구에는 제주에서 생산되는 소주인 '한라산' 공장이 있다. '한라산소주'의 예전 명칭은 '명월소주'였는데,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지금의 한라산 소주가 있는 옹포와 명월은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옹포천은 명월리의 팽나무 군락지로 더 유명한 명월천과 이어지며 옹포리의 포구인 '독개'는 예전 지명이 '명월포'로 명월진성과 이어지는 통로역할을 했다.

▲ 옹포바다에서 바라본 해안도로. 옹포와 한림간 새로 만들어진 해안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옹포천하구의 모습도 달라졌다.ⓒ홍영철
최근에 한림항서쪽이 매립되고 조간대를 가로질러 4차선의 해안도로가 생겨났다. 옹포천 하구는 비교적 넓은 조간대가 자리한 곳이었는데, 이 도로가 생김으로 인해서 조간대는 바다와 단절되고 도로중간의 작은 통로를 통해서 겨우 숨을 쉬고 있다. 옹포천 하구는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으로 염도에 따라서 다양한 조간대 생물들의 생활터전이다. 하지만 여기에 있었다는 '도(아래 아)리알원'이 있다는 기록을 보고 더듬어 찾아보려 했지만 해안도로를 만들면서 사라져버렸는지 찾을 수가 없다. 수 많은 과거의 기록 속에 있는 것들을 지금의 모습에서 더듬에 찾아내려 해도 번번이 좌절할 뿐이다. 4차선으로 휑하게 뚫린 도로는 차량이 없이 한적하고 도로 옆 인도에는 널어 놓은 밭 작물인 '날래'가 자리를 채우고 있다. 미래를 위해서 넓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조간대의 생태가 파괴되고 생활의 소중한 자료들을 없애면서 감내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인가? 이 해안도로를 만들면서 외치는 '미래'는 어떤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일까?

▲ 바다로 멀리 흘러나간 파호이호이 용암과 파호이호이용암의 튜물러스구조와 옹포동쪽에서 바라본 비양도의 모습.ⓒ홍영철
해안도로의 옆에 간신히 걸린 옹포마을의 빌레해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 곳에서부터 마치 거북등 처럼 생긴 평평한 해안 용암이 펼쳐진다. 이러한 해안 지형의 형성은 '파호이호이용암' 때문인데, '파호이호이용암'은 점성이 낮아서 잘 흐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용암도 평평한 모습인데, 거대한 타원형의 방패모양을 하고 있어서 마치 고래등에 오른 느낌이다. 이런 모양을 전문용어로는 '튜물러스'라고 하는데, 여기 옹포리 동쪽에서부터 시작하여 협재리와 금능리를 지나 월령리 일부까지 이러한 용암류가 이어진다. 이러한 용암류는 바다와 만나서도 멀리 흘러나가 곳곳에 코지(곶)를 이룸으로써 이런 곳에서는 모래가 해안에 퇴적되어 아름다운 모래사장을 이룬다. 바다로 달리는 길고 평평한 용암암반인 '빌레'사이사이에 옥빛으로 빛나는 모래사장은 누구도 감탄사를 멈출 수 없는 제주의 아름다움이다.    

▲ 옹포 포구의 모습.ⓒ홍영철
옹포리의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옛 지명이 '독개'인 '옹포포구'가 나온다. 사실 옹포라는 지명자체가 포구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옹포포구'는 동어반복인 셈이다. '독개'의 '독'이나 '옹포'의 '옹'이나 똑 같이 항아리를 말하는 것이다. 포구가 항아리 모양으로 생겨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이 포구가 '독코지'라는 해안으로 길게 뻗은 암반에 의지해서 만들었기 때문일까? 마을 분들에게 물어도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현재 지명인 '옹포'라는 지명으로 미루어 항아리 모양이라서 이름 붙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 옹포 독개포구 입구에 있는 전적지 비문. 삼별초항쟁과 목호의 난에 관계된 이곳의 역사를 알려준다.ⓒ홍영철
여기 '독개'는 역사적으로도 유서가 깊은 곳이다. 역사기록에는 '명월포'로 쓰여있는데, 원래 '독개'는 옹포리의 위에 위치한 명월의 군항(軍港)이었다. '명월리'는 1300년 고려 충렬왕 때 명월현으로 되어 제주서부의 중심지의 역할을 했고, 16세기까지 그 명성이 이어졌다. 17세기 초부터 현재의 금악리가 분리되어 졌고, 18세기 초에 현재의 '옹포리'인 독개가 분리되었다고 한다. 역사기록에 '명월포'라고 기록되어 있는 '독개'는 두 번의 커다란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된 곳이다. 하나는 '삼별초대몽항쟁'이고, 또 하나는 '목호의 난'이다. '독개'에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북제주군에서 세운 비석이 있다. 여기에 보면 1270년(고려 원종)때 삼별초 장군 이문경이 삼별초의 선봉대를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관군과 전투 후 승리하여 삼별초군이 최초로 점거한 곳이다. 그리고 삼별초가 제주에서 최후까지 몽고에 항거하다가 패배하는데, 그 이후로 제주는 100여년 간의 몽고의 직간접적인 지배를 받게 된다. 몽고가 세운 '원'나라는 제주를 군마(軍馬)를 키우는 곳으로 선택하는데, 그 때 말을 관리하던 제주의 몽고인을 '목호'라고 불렀다. '원'이 몰락한 이후에도 제주에 남아 있던 '목호'는 제주에 토착하여 생활하게 되는데, 고려의 과도한 군마징수 요구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킨다. 이 난을 '목호의 난'이라 칭하고, 1374년(고려 공민왕) 최 영 장군은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2만5000의 대군을 이끌고 제주에 상륙하게 된다. 그 때 이 곳으로도 상륙하여 격전을 치룬다.

▲ 조간대를 매립한 옹포포구. 인공의 시설물은 자연재해를 한층 강하게 하는 역할도 한다.ⓒ홍영철
2005년 2월 9일에 발생한 '옹포 유사해일사건'도 화제가 되었다. 제주 남쪽 해상에서 장파가 발생하면서 이 곳에 정박하였던 어선이 땅 위로 올라온 사건이 있었다. 장파의 명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진에 의한 쓰나미(해일)는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 제주의 다른 해안도 분명 영향이 있었을 텐데, 이곳만 유독 심하게 피해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곳의 포구를 보고 사건의 원인을 나름대로 유추해 보았다. 옹포포구는 해안가를 철저하게 매립해 마치 사각의 수영장처럼 만들어 졌다. 그리고 좌우로는 방파제와 '독코지'라는 자연지형이 밀려온 장파가 분산되지 못하고 포구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 때의 어리둥절한 사건은 인간이 자연적인 해안우ㅏ 모습을 변행시켜 발생한 인재(人災)다. 해안 곳곳에 들어서는 인공구조물들과 해안도로가 앞으로 작은 자연적인 현상이 재앙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 독개의 양 옆에서 서있는 방사탑 왼쪽이 서쪽 방사탑이고, 오른쪽이 동쪽 방사탑이다.ⓒ홍영철
'독개'의 심란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독개'의 동쪽과 서쪽에 방사탑 2기가 의연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쪽의 방사탑은 눈에 잘 띠는 곳에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으나, 동쪽의 방사탑은 건물들도 가려 있어서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을분 들에게 물어서 찾아내었다. 마을분이 말씀하시기를 2기의 방사탑이 허물어져서 추스려 다시 쌓았다고 하고, 예전 보다 작게 만들어졌다고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서쪽의 방사탑은 비교적 원형대로 남아있으나, 동쪽은 많이 허물어졌다. 두 개의 방사탑 모두 인공적인 지형물인 방파제 앞과 매립된 지역의 앞에 있어서 다시 복원한다고 하더라도 이후에도 태풍이나 해일이 올 때,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올해(2005년) 발생한 지진해일인 '쓰나미'에 의해서 무분별한 해안개발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제주해안을 다니다 보면 곳곳에서 해안을 매립하고, 포구를 확장하는 것이 경쟁적으로 보인다. 비록 마을단위에서 보면 작은 규모이겠지만, 모두 합친다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조간대가 콘크리트에 덮히고 있다. '조간대'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가 '해일'과 같은 자연재해를 줄이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여야 한다.

※ 홍영철님은 제주의 새로운 관광, 자연과 생태문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대안관광을 만들어 나가는 (주)제주생태관광(www.ecojeju.net )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제주의 벗 에코가이드칼럼’에도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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