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경 칼럼] 세계속의 일본이란 나라의 현주소(1)

일본은 지금 어떤 나라가 됐나? 세계 속 일본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 건가? 또 '일본(日本)' 이란 브랜드가 가장 빛난 때는 언제 였는가?

이 문제를 생각하려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지구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 봐야한다.

19세기 중엽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21세기 초반인 지금 우리들은 정보화혁명(IT혁명) 속에 살고 있다. 산업혁명 이전의 사회는 '농경 사회' 였다. 산업혁명 이후의 사회는 '공업화 사회'이다. 지금 우리들은 공업화 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넘어가는, 정보화혁명(IT혁명)속에 살고 있으며, 앞으로의 사회는 '정보화 사회'이다.

산업혁명 이전의 '농경사회'. 토지 많이 가진 사람이 부자였고, 농사를 짓고 곡식을 일구어 배불리 먹고, 부자 혹은 양반이라는 사람들은 '맹자曰' '공자曰' 했던 시대였다.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토지였다.

현재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쓰고 있는 문명의 이기들, 전기 수도 자동차 등등의 것은 상상도 못한 시대였다. 시간도 천천히 흘러갔을 것이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시대였다.

조선시대에서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 본다면, 일본이 그리 대단한 것 없었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지만, 대단히 잘 나아서 조선을 침략한 것이 아니다.

조선은 한양 중앙정부가 변방 제주도까지 완전히 장악하는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를 가지고 태평성대를 누리면서 당파 싸움이나 했다. 그때 일본은 전국(戰國)시대였다. 허구헌 날 순박한 백성들 몰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죽여가며 땅 따먹기 전쟁을 한, 전쟁에는 아주 숙달된 친구들인 것이다. 전쟁을 잘 했기에 조선도 또 중국도 한번 해 볼려고 한 것이다.

그 후에 '조선통신사'가 조선정부에서 일본으로 오게 된다. 이 조선통신사들을 보면, 우리 문화가 일본보다 완전 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수백명이 부산에서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에 상륙, 도쿄(東京)를 향하게 되면, 조선통신사들이 가는 곳곳에서 융성한 대접을 받게된다. 또 융성한 대접을 하겠다며 지방부호들이 손을 들고 나선다. 융성히 대접하면서, 글 하나, 그림 하나를 받으면, 이것은 영원한 가문의 영광, 가문의 보물이 된다. 지금도 조선통신사 일행이 써 준 글씨 하나, 그려준 그림 하나를 가졌다고 꽤나 어깨를 으쑥대고 있는 사람들 집안들이 있다.

우리 문화가 일본보다 위에 있었기에 그들이 앞을 다투어가며 통신사 일행을 대접할려고 아우성을 친 것이다. 한류 스타의 원조는 배우 '배용준'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조선통신사' 인 것이다.

19세기 중엽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시작되는 사회가 '공업화 사회' 가 된다. 이 '공업화사회' 가 되면서 일본은 대박을 맞게 된다. 또 이때 일본은 명치 유신(메이지 유신)을 하면서 근대국가로 굳혀 나간다. 이 명치유신이 일본의 대박에 더욱더 가속도를 붙쳐 준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전기 수도 자동차 기차 등은 이 공업화 시대의 산물이다. 공업화 시대는 물건을 만드는 시대이다. 또 과학도 발달하게 된다.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서 써보니 무지하게 편하고 좋다. 계속 새로운 물건을 만들게 되고, 새로운 물건을 만들기만 하면 팔리고, 팔리면 이익이 생기는 사회인 것이다. 이런 공산품들은 회사라는 시스템이 있어야 만들기 쉽고, 또 새로운 물건의 개발도 하기 쉽다. 농경사회는 토지를 많이 가진 대지주가 부자였지만, 공업화사회는 회사 사장님이 부자가 되고, 사회의 중심에 회사가 있게 된다.

회사 활동을 쉽게 할려면, 근대국가라는 국가 시스템하에 있어야 하기 쉽다. 이 근대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준 것이 명치 유신인 것이다.

20세기 = 공업화 사회 = 물건 만드는 사회, 일본사람들은 '물건 만드는데 귀신들' 이다. 그러면 일본 사람들은 왜 물건을 잘 만들까?

일본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성격이 꼼꼼하고 정직하다. 그래서 물건을 만드는데도 꼼꼼히 또 정직하게 만든다. 날치기란 것이 없다. 날치기로 물건을 만들어서 불량품이 나오는 날에는 모든 손님들에게서 손가락짓을 받는다. 그래서 불량품이 아주 적다.

또 약속 지키는 것을 목숨처럼 생각한다. 그러니 정확히 납기를 맞춘다. 납기를 넘긴다는 것은 그날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이들은 약속한 날자에 정확한 물건을 손님들에게 바친다. 같은 물건을 일본사람이 만들고, 외국사람이 만들면, 외국사람이 만든 물건은 불량이 있어도 일본사람이 만든 물건은 불량이 없다. 품질에 상하 변동이 없어 품질이 안정되여 있다. 그래서 쓰는 사람들은 일본사람들이 만든 물건은 안심하며 사서, 안심하며 쓸 수 있다.

이렇게 높은 수준의 물건을 만들수 있는 것은, 일본 소비자들이 높은 수준의 상품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응용력이 좋다. 이 세상에 없는 것을 발명하는 능력이 좋은 것이 아니라, 발명된 새로운 기술을 제품에 넣는 응용력이 좋은 것이다. 옛날에는 일본사람들은 모방의 천재라는 말을 많이 했다. 모방의 천재가 아니라 응용의 천재인 것이다. 모방이 전부라면 그들의 제품이 세계에서 판을 못쳤을 것이다.

새기술을 제품에 넣어서 새기능 하나가 더 들어간 신제품을 개발하는데 귀신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없는 것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제품에, 새로 나온 기술을 제품속에 넣어서, 좋은 기능이 하나더 들어간, 하나 더 좋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데는 귀신들인 것이다.

이들은 무엇 하나라도 이쪽으로 쳐다보고 저쪽에서 쳐다보면서 고칠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세계에서 알아아주는 '가이젠(改善, 개선) 이다. 공장이 아닌 일상생활에서도 불편한 것을 하나씩 고쳐나가는 것이 이들의 습관이다. 불편한 것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생활용품들, 이들은 아주 잘 만들어 낸다.

20세기에 들면서 이들은 급속히 서양 문물을 수입하고, 좋은 물건을 만들어 낸다. 일본 국내에서도 공업화에 성공을 하고, 전기 수도 전차등 사회 인프라가 확립이 되며, 더욱더 공업 강대국으로 전진하게 된다. 그런데 까불었다.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결과 폐허가 되고 말았다.

1945년 일본은 전쟁에서 패망하면서 미국의 점령하에 들어갔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일본은 독립을 하게 된다. 이때 한국은 6•25사변이 일어나, 이 전쟁이 일본은 폐허에서 일어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후 일본은 계속적인 경제발전으로 세계 2번째의 경제대국으로 일어서게 된다. 그럼 무엇이 폐허의 허허벌판에서 경제 대국을 만들었는가?

누구도 풍요롭게 살고 싶고, 어떤 나라도 풍요로운 경제대국이 되고 싶다. 그런데 왜 일본은 가능했던가? 일본사람들은 물건 만드는데는 귀신들이다.

1950년대이후 세계는 공업화사회 속에 고도성장시대에 들어선다. 전쟁 전에 비해서 국가간의 물건 이동(무역)이 급등하게 된다. 이때는 물건이 귀해서 물건만 만들면 팔리는 고도성장 시대였다. 또 좋은 물건은 움직이기도 좋게 된다. 운송수단도 발달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사람들 천성에서 신기능이 들어간 좋은 물건들을 만들어냈다. 무역이 매년 매년 왕성하게 성장하는 시대였기에 이들이 만들어낸 물건은 세계사람들을 유혹시켰다. 당시 한국에서도 일본제(일제)라고 하면, 죽고 못살았다. 품질이 좋으뿐 아니라, 신기능이 들어간 신제품이 계속 우리들을 유혹시켰다. 1960년대 70년대를 살아본 사람이라면 '일제'에 대한 향수가 있을 것이다. 당시 한국에는 '국산품 애용'이란 단어가 있었다. 품질이 떨어지고 나빠도 꼭 국산품을 쓰라는 것이었다.

우리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 은 그 나라 사람들을 유혹시켰다. 이들이 만들어낸 물건들은 어떤 제품이라도 '세계 넘버원'으로 잘 팔려 나갔다.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일어서는데는, 일본이 재무장을 하지 않는 대신 미국이 국방을 해주고 일본은 미국의 말을 아주 잘 듣는 나라가 되어서, 국방비 지출이 없었기에 그 비용을 경제쪽으로 돌려 경제발전이 가능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메이드 인 재팬을 세계사람들이 사주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그러면 왜 이들은 응용력이 좋을까? 머리가 좋아서? 천만의 말씀이다. 한사람 한사람 개개인을 본다면 우리 한국사람이 일본 사람들 보다 머리도 좋고 인물도 잘 났다. 또한 매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주 우수한 인재중의 인재는 의과대학으로 가 버린다. 그럼 왜 이들은 기술이 좋았고, 또 응용력마져 좋았을까? 연구의 대상이다.

한가지 요인 아닌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된 시스템이라고 보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만드는 제품을 정통해야 된다.

장인 정신이란 말이 있다. 기술자를 우대한다. 한국에서도 잘 알고 있는 대를 이어 한가지 일에 몰두 한다. 할아버지가 했던 일을 아버지가 물려받고, 아버지가 했던 일을 아들이 물려 받는다. 기술의 축척이 없을 수가 없다. 특히 중소기업에서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다. 대기업도 대를 이어 사장을 하지만, 중소기업은 특히 더 하다.

3대 100년간을 한가지 물건만을 만든다고 생각해 보자. 눈을 감고서도 그 물건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축적된 기술과 노하우는 어마어마 하다. 이 정도쯤 되어야 새로운 기능이 들어간 진짜 신제품을 만들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한가지 물건을 3대 100년간을 만들어낸 중소기업이 있을까? 일본은 수두룩하다. 음식점 식당까지도 3대 100년 이상의 식당들이 내 주변만해도 수두룩 한다. 한국은 중소기업 육성에 실패를 했고 일본은 중소기업 육성에 성공했다고 말하고 있다. 육성•실패를 한 것이 아니라, 기업의 자주 노력에 의한 성공인 것이다. 결과 현재 일본이 가지고 있는 상당수의 기술들은 중소기업들이 가지고 있으면서, 대기업에 부품으로 납품하고 있다. 또 그 부품들을 한국의 대기업도 수입하고 있다.

회사에서 이직율이 아주 적다. 대학졸업해서 한 회사에 입사하면 정년까지 한다. 그러기에 중도채용이란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중간에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은 낙오자란 딱지가 붙어서 다음 회사에 취직 자체가 어렵다. 우리 한국에서 대학졸업해서 취직한 직장에서 정년까지 하는 사람은 몇사람이나 될까? 필자도 공대 출신이지만 대학 전공과 다른 전공을 하고 있으며, 졸업해서 바로 취직한 직장을 곧 버리고 말았다.

개인 한사람 한사람이 몇십년간을 한가지 일에 몰두하며, 그것도 모자라서 대를 이어 몰두하는 사람들, 일본은 많다.

일본은 회사 간의 거래를 시작하는데, 꼼꼼히 상대방 회사를 조사한다. 당연히 신용부터 조사를 한다. 거래의 신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술의 신용인 것이다. 기술력을 평가하는 것이다. 기술력 있는 파트너와 공존하는 하는 것을 좋아한다. 만약 기술력이 있는 파트너가 곤경에 빠지면, 그 곤경을 이용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고, 도와 가면서 서로 같이 살아가는 자세를 가진 것이 일본기업들의 장점이다. 기업하면서 자금등의 문제때문에 곤경에 빠져본 경험이 없는 기업이 있을까? 이들은 그런 곤경에 빠진 파트너를 돕는다. 또 내가 곤경에 빠졌을때 도움도 받는다. 그래서 같이 공존하는 것이다. 이래서 기업하기가 한국보다 일본이 좋다. 그러기에 기술력도 축적되는 것이다.

이들은 팀 워크(Team Work)를 중시한다. 누구 하나가 튀는 것이 아니라 여러사람이 협조하면서 이 궁리 저 궁리 하면서 무엇 하나를 만들어 낸다. 이런 문화를 일본사람들은 '화(和)'의 문화라고 말하기도 하고, 일본이란 이름대신 '화(和)' 자를 쓰기도 한다. 회사 구성원들도 팀 워크를 중시하지만, 회사와 회사 사이도 팀 워크로 잘 짜여져 있다.

대기업이 있다. 이 대기업에 물건을 납품하는 중소기업들이 있다. 1년에 한  번이상, 이 중소기업 사장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빙자한 골프대회, 혹은 야유회를 한다. 서로가 협조하면서 잘 살아보자는 단합대회를 하는 것이다. 이런 테두리 속에 한번 들어가면 몇십년간은 끄떡없다. 몇십년간은 잘 납품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 테두리에 들어가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일본은 이공계 출신을 우대한다. 대기업에서 이공계 출신 사장들이 수두룩하다. 일본의 전 수상도 이공계 출신이었다.

다른 측면도 있다. 일본사람들은 상품에 대해서 눈이 높다. 좋은 물건이 아니면 볼려고도 하지 않는다. 또 납기를 어기는 기업이나 가게는 두번 다시 쳐다 보지도 않는다. 국내 시장에게 이 수준으로 트레이닝이 된 기업, 상품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누가 이런 말을 한다. 일본시장에 진출이 되면, 세계에 진출 할 수 있다고.

그러면 최고로 '일제'를 알아주었을 때가 언제였을까? 필자는 1970년대 소니가 만들어낸 '워크 맨(Walk Man)' 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당시 소니의 '워크 맨'은 세계의 젊은이들이 가지고 싶었던 최고의 물건이었다. 그것 하나 들고 거리에 나서면,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 물건을 가진 사람마져 멋있게 보였다. 필자는 당시 한국에서는 워크맨을 못가졌고, 1985년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산 물건이 워크맨 이었다.

워크맨이라고 대단한 물건은 아니다. 음향기기를 소형화 했고, 또 이어폰을 고급화해서 듣는 음질을 높힌 기계로서, 일본사람들의 물건만들기 천성과 아주 잘 맞아 떨어진 물건이었다. 그러나 세계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이때가 일본이란 브랜드가 최고로 올라갈데로 올라간 때였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이때 일본이 너무 올라갔기에 세계에서 일본(일본 상품)에 대한 배척들도 받게 된다. 그러나 배척을 해 보았던들 많은 사람들이 '일제'를 원했다.

이 피크기를 넘으면서(1970년대 후반) 일본은 서서히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왜 사양길로 가고 있을까? / 신재경

 

 

▲ 신재경 교수 ⓒ 제주의소리
 필자 신재경 교수는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京都創成大學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오사카 제주도연구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신 교수는 재일동포, 그 중에서도 재일제주인들의 삶에 대해 조사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재일동포들의 '밀항'을 밀도 있게 조사하면서 <제주의소리>에 '어떤 밀항이야기'를 연재해 왔다. 또 일본 프로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발휘 '신재경의 일본야구'를 써 왔다.    jejudo@nif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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