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밥상 다른 세상] 고용석 생명사랑 채식실천협회 대표

‘공유지의 비극’은 1968년 미국의 생물학자 개럿 하딘이 설파한 이론으로  환경위기에 대한 지구촌의 딜레마를 한눈에 보여준다. 모두에게 개방된 공유 목초지에서 사람들은 각자 더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 자신의 가축을 더 많이 방목한다. 사람들의 이러한 경쟁은 결국 과도한 방목을 초래해 종국적으로 목초지를 황폐화시키고 모든 가축들을 소멸시키는 비극적 결과를 낳는다

사실 21세기에는 핵이나 지구 온난화처럼 국가나 민족 단위로 해결 안 되는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면 ‘지구 기후’는 전형적인 공공재다. 유럽 국가들이 온실가스를 열심히 줄이면 그 혜택은 유럽만 아니라 미국 중국 남미에도 돌아간다. 다들 남들이 잘 해줘서 내가 무임승차로 득 보기를 바랄 뿐 솔선수범하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다. 전 지구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주권 국가를 넘어 선 하나의 인류라는 정체성이 절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공유지 지구는 공멸의 비극이 불가피 하다.

최근 미국과 호주 등 서구권에서는 거대사 교육의 열풍이 불고 있다 한다. 미국은 2002년 대학입시부터 거대사 시각을 반영한 세계사 과목을 상급 프로그램에 추가했고, 호주 정부는 올해 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거대사 속의 호주사’ 강의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또한 빌 게이츠의 제안에 따라 올해 전 세계 중 고교생을 위한 거대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거대사의 창시자인 데이비드 크리스천 호주 매콰리대 교수는 오늘날 학생들은 파편화된 생각들만을 배우고 있는데 이건 위험하다고 말한다. 인간중심의 세계사를 극복해야 인류와 자연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대사는 그 생각들의 연결고리와 큰 그림, 우주의 일부분으로서 인류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민족과 국가의 역사를 넘어서는 인류 공통의 역사의식 나아가 우주적인 정체성까지 고민하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거대사교육은 공유지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성찰과 노력의 일환이다.

만약 음식을 통해 거대사교육과  더 나아가 지구적 위기를 치유하는 실천적 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미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붓다 등 수많은 성인과 전통들이 음식을 통하여 이를 가르쳐왔다면 믿겠는가. ‘밥 한 그릇에 모든 세상 이치가 담겨져 있다’는 동학을 비롯하여 가톨릭, 개신교, 무슬림 등 많은 종교에서도 음식을 먹기 전에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한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살피고 그 음식이 좋은 음식인지 자비를 지키는데 도움이 될 음식인지 확인하고 자각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음식은  단지 영양소와 칼로리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경건한 것이었다. 나눔이고, 정직이고, 정체성이었다.

어쩌면 현대문명에서 음식은 가장 저평가된 필수품이다. 언제부터인가 너무나 뻔하고 단순해 우리의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러나 음식은 문명의 수단으로 늘 세상을 만들어 왔다. 도시와 문명의 탄생도 음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음식의 중요성을 잊거나 그렇지 않으면 거의 맹목적으로 음식을 무기처럼 휘두른다. 전쟁을 일으키고 토지를 정복하고 풍경을 바꾸고 체제를 전복한다. 만약 음식으로 지구를 파괴하는 대신에 선을 공유하기 위해 건설적 방향으로 사용하면 어떨까? 우리는 음식의 진정한 잠재력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음식은 어떤 의미에서 세계, 우주와 교류하는 창(窓)과 같기 때문이다.

첫째, 먹는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그것은 지구 전체의 경제 정치 생태적 질서와 연관 되어 있다. 셋째, 그렇기에 의식적으로 선택하기만하면 개인적이고 사소한 변화라도 큰 변화로 이어진다.

오늘날 음식은 글로벌한 것과 개인적인 것을 실제적으로 하나로 연결한다.  지구온난화, 생물다양성 자원고갈, 기아, 수자원고갈, 사막화, 석유정점에서 부터 도시화 지속가능,성 세계경제 위기, 정치·식량위기 공동체파괴 등을 비롯하여 건강, 삶의 질, 마음, 생명, 소비주의, 인권까지 거의 모든 것이 음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복잡계이며 비선형적이다. 음식은 일종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실타래를 푸는 실마리와 같다. 음식을 따라 풀어 가면 어느덧 전체적 그림이 드러난다. 가장 개인적 문제, 즉 ‘우리가 무엇을 먹는가’에서 출발하여 지역과 공동체 세상을 디자인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 음식은 현실적이다.

문제는 협소한 시공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과 그 음식을 생산하는 방식에 시간과 공간의 협소함을 넘어 배려와 존중을 어떻게 담아내느냐가 지구와 생명체들의 존망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는 크다.

가치 있는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이 죽자 하느님은 그를 우선 지옥으로 안내하였다. 거대한 만찬이 펼쳐져 있음에도 사람들이 지닌 젓가락이 너무 길어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굶주려 절망적이었고 그 고통은 참으로 끔찍했다. 잠시 후 하느님은 그를 천국으로 데려갔다. 놀랍게도 천국은 지옥과 똑같았다. 단지 그곳의 사람들은 모두가 잘 먹어서 행복하며 기쁨과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된 걸까? 긴 젓가락을 이용해 서로에게 먹여 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다 똑같은데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것이다.

지구의 역사를 1년으로 따졌을 때 인류는 12월 31일 자정 15분 전에 지구에 출현했다. 산업문명은 불과 자정 2초 전에 나타났다. 지구라는 호텔에 찰라 머물 뿐인 인간이 지금 호텔의 모든 투숙객들을 멸종의 위협에 몰아넣고 있는 셈이다. 마치 자신이 주인처럼 지구라는 공유지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배려와 존중이란 찾아 볼 수 없는 안하무인의 자세로 말이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 이다. 인디언들은 뭔가를 행할 때 최소 5대를 심사숙고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자연과 환경은 후손에게서 빌려 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몸이란 조상과 선조로부터 물려받아 잘 관리하여 후손과 자녀에게 고스란히 물려주는 것이다. 후성유전학에 따르면 우리가 먹는 음식이 삼대 이후까지 영향을 미친다 한다. 그럼에도 마치 자신만의 몸인 량 아무거나 먹고 마시며 마음대로 행동하는 등 모두의 몸을 훼손하고 파괴한다. 여기서도 배려와 존중이란 아예 찾아볼 수가 없다.

▲ 고용석 생명사랑 채식실천협회 대표
만약 밥상에서 지구환경과 건강, 생명과 이웃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깨어있는 소비를 한다면, 우리가 우리 몸의 필요와 이 지구의 필요를 반영한 음식을 선택한다면, 세계에서 가장 약자인 소규모 식품 생산자와 기아에 시달리는 전 세계 사람들을 지지하는 선택을 한다면, 우리는 지구온난화를 제어하고 오염을 줄이며 자원을 보호할 뿐 아니라 소중한 지구와 숱한 생명들을 보호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선택을 통해 우리는 깊은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 유대감을 느끼면 자신감도 커지고 힘도 생긴다. 음식은 우리의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주고 말과 행동을 바꿔 세상을 더욱 변화 시키는 데 기여한다. 

오래 전부터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 영혼의 스승들은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의 정신과 육체 모두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고 말해 왔다. 우리 자신은 곧 우리가 먹는 그것이다. 우리의 식사가 불필요하게 무력한 동물들을 해치지 않도록, 우리의 귀중한 자원을 낭비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 어디에서도 아이의 건강한 삶을 빼앗지 않도록 늘 주의하라. 점차적으로 모든 생명체가 하나임을 더욱 더 자각하게 될 것이다. / 고용석 생명사랑 채식실천협회 대표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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