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C대학생아카데미 열세 번째 강단에 선 서진규 희망연구소 소장.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JDC대학생아카데미 열세 번째 강단에 선 서진규 희망연구소 소장.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JDC대학생아카데미 열세 번째 강단에 선 서진규 희망연구소 소장.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JDC대학생아카데미 열세 번째 강단에 선 서진규 희망연구소 소장.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JDC대학생아카데미 열세 번째 강단에 선 서진규 희망연구소 소장.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JDC대학생아카데미] (13) 서진규 희망연구소 소장

“나는 성공했다. 성공의 원천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가난한 술장사의 딸, 첫사랑 실패로 인한 비관, 남편의 폭력과 같은 ‘고생’이었다고 답할 것이다”

엿장수 딸로 태어나 삶을 비관하며 떠난 미국 땅에서 하버드대 박사 학위를 따고 미군 장교 자리까지 오른 서진규(63) 희망연구소 소장.

굴곡 많은 인생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던 서 소장의 ‘희망 이야기’가 6일 오후 제주대학교 국제교류회관에서 열린 JDC대학생아카데미 강단에서 펼쳐졌다.

▲ JDC대학생아카데미 열세 번째 강단에 선 서진규 희망연구소 소장.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1948년 경상남도 동래군의 어촌마을에서 태어난 서 소장은 노름꾼 아버지와 억척스런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장교가 되기 위한 고된 길을 걸어가기 위한 훈련은 어릴 적 어머니에게서 받았다고 했다.

여자아이는 집에서 일하다 시집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어린 서 소장을 매섭게 때리며 새벽 밥 짓기와 한겨울 빨래를 시켰다.

서 소장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 사이 엄마 밑에서 훈련받던 때보다 지독한 고생은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지독한 환경에 서 소장은 ‘성공’을 꿈꾸기 시작한다. 그는 “여자아이도 쓸모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며 “박사가 되면 성공한 것이란 학교 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가 목표가 됐다”고 했다.

▲ JDC대학생아카데미 열세 번째 강단에 선 서진규 희망연구소 소장.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머리에 들어오지 않던 공부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성적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졸업할 즈음엔 전교 2등을 하기에 이른다.

서 소장은 “처절한 환경 속에서 나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상이 너를 버려도 나만은 너를 지킬 것이다’라는 생각이 나를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 JDC대학생아카데미 열세 번째 강단에 선 서진규 희망연구소 소장.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하지만 지독한 가난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잡지 판매 아르바이트, 가발공장 여공, 골프장 캐디 등을 전전하다 미국행을 감행한다. 당시 그의 나이 22살. 당시 미국인 가정 식모 구인 광고가 많았는데, 대부분 사창가로 다시 팔려나갔다고 했다.

서 소장은 “삶을 비관하다 죽기 위해 떠난 길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미국 땅에 도착했을 때 서 소장이 원하던(?) 비극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뉴욕의 유명 한인식당에서 일하며 대학 생활까지 하는 전기가 마련된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가 싶더니 결혼과 함께 꿈이 무참히 깨진다. 남편의 극심한 폭력에 시달린 것. 서 소장은 “어느 날은 잠자고 있던 남편을 칼로 찔러 죽여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나는 살인을 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서 소장을 구한 것은 딸이었다. 서 소장은 “순간 아기에게 무슨 죄가 있나. 왜 살인마의 딸로 자라게 하나, 생각했다”며 “‘세상이 우리를 버려도 나만은 우리를 지킬 것이다. 내 몸이 으스러져도 너를 살인마의 딸로 키우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말했다.

▲ 강연 뒤 기립 박수로 서진규 소장의 희망이야기에 응원과 공감을 표시하고 있는 수강생들.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살인마가 될 지경에 이른 서 소장 자신을 피신시킨 곳이 바로 미군이었다. 당시 딸이 8개월이었다. 낯선 이를 통해 한국의 친정으로 보냈다고 했다.

미군에 지원할 당시 서 소장은 유산한 만신창이의 몸이었다. 건장한 미국 남성 200여명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 서 소장은 “딸에게 했던 맹세를 잊지 않았다. 살아야하는 이유가 있었다”고 말했다.

두 달 후 서 소장은 1등으로 졸업한다. 4년 반 후엔 장교가 된다. 중대장으로서 미군 200여명을 훈련시켰다. 그야말로 ‘역전의 여왕’이었던 것. 이후 미군 생활 동안 일본, 독일, 중동 등 세계를 돌아다녔다.

특히 서 소장은 군인 외교가로 불리는 지역전문가로 일본에 파견됐던 경력을 자랑스러워 했다. 한국 여성 최초였다. 그는 “일본 식민지였던 한국 출신의 여자는 실패할 거라는 주위의 장담에,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오기로 뛰었다”고 말했다.

지난 2006년에는 꿈에도 그리던 하버드 박사 학위를 따냈다. 당시 그의 나이 59세. 도전 16년 만이었다.

▲ 강연이 끝난 뒤에도 수강생들은 서진규 소장에게 사진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서 소장은 더 큰 꿈을 꾸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 대통령, UN 사무총장 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미국 국무장관”이라고 했다. 그는 “통일이 됐을 때 미국의 협조 없이는 힘들 것”이라며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의 힘이 필요하다. 나는 미국 국무장관을 꿈꾼다”고 말했다.

서 소장은 “온갖 고생을 겪으며 깨달은 것이 있다”며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 아무런 선택이 없다. 죽는 다는 사실에서도 아무런 선택이 없다. 우리 인간은 이승에서 살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 밖에 없다.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 그것은 바로 내가 결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죽음이 나를 데리러 왔을 때 안 된다고 피하기 보다는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시험에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고 갈 수 있어야 한다”며 “멋지게 당당하게 살아라. 삶의 기회는 한 번뿐 삶은 연습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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