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농밭의 경작. 제주시 애월읍 중산간의 작지왓(잔돌들이 들어찬 밭이라는 제주어)에 촌로가 마늘을 심고 있다. 세계 어디에서 이런 밭, 이런 농사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제주바다의 진정한 주인 좀녜(해녀) 
왼쪽. 故 만농 홍정표 선생사진으로 70년대 녜들의 집단 입수 모습
오른쪽. 강정효. 90년대 구좌읍 해녀들의 미역해경 때 집단입수 장면
제주섬의 돗통시. 비위생적인 전근대문화의 상징이었던 제주의 돗통시. 통시 속에 모아진 사람의 인분과 음식쓰레기, 잡초들은 돼지들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훌륭한 거름이 되어 척박한 땅을 살려냈다. 
덕판배. V형의 선체를 만들어 거친 제주해협의 바다 물길을 갈라 치고, 암초가 많은 제주 해안에 배를 대기 위해 덕판을 덧댄 과학적인 배.
상명리 느지리 케인틈 할망당. 한림읍 상명리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마을의 본향당이다. 제주에는 마을마다 마을당인 본향당이 있다.
조각보를 닮은 제주의 밭들. 구좌읍 김녕리 일대의 경작지를 찍은 항공사진. 이렇게 조각조각난 토지는 소가족의 개체적 삶을 살아가게 했고, 제 때에 수눌어 가며 일을 해야 하는 척박한 땅은 공동체의식을 강화시켰다.
성산 신천리 현씨일월당. 원래 현씨 집안의 처녀신을 모신 사당이었으나, 마을 본향당으로 변했다. 나무를 신의 몸이라 생각하여 고운 물색으로 옷을 입혔다. 생활에서 추수가 끝나면 빔을 마련해 입히듯, 신에게도 고운 옷을 해서 입힌 것이다.

<김정숙의 제주신화 ④> 일만 팔천 신들의 고향 제주

 ‘일만 팔천 신들의 고향’이라고 불려지는 제주도는 무속신앙이 특히 성행한 지역이다. 이처럼 제주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무속이 성행한 것은 자연적 조건으로 인한 생활고도 한 요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제주도의 토양은 대부분 화산회토이다. 곳곳에 화산암반의 노두가 나와 있어 경지는 잘게 나누어졌다. 제주사람들이 ‘뜬땅’이라 부르는, 돌만 가득하고 함수율이 낮은 이 화산회토는 척박함의 상징이었고 부양력이 논농사보다 낮은 밭농사를 하게 했다. 고온다습한 기후로 더욱 빨리 성장하는 잡초와 척박한 땅은 쉴 새 없는 노동과 다량의 거름을 필요로 했다.

마농밭의 경작. 제주시 애월읍 중산간의 작지왓(잔돌들이 들어찬 밭이라는 제주어)에 촌로가 마늘을 심고 있다. 세계 어디에서 이런 밭, 이런 농사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척박한 땅에 인구부양력이 낮은 밭농사와 빈번한 자연재해 그리고 섬이라는 조건 속에서 부(富)에 대한 기본적 추구는 제주도의 자연조건에 맞는 수렵, 목축과 어업의 성행을 가져왔다. 많은 자연재해는 곡식의 수확에 지장을 주었고 수확에 대한 불안은 해산물의 채취와 판매를 위해서, 저승길과도 같은 까마득한 바다로 자맥질하게 했다.

이런 불리한 자연환경 속에서 제주사람들은 ‘통시’ 구조를 이용한 거름의 생산이라는 리싸이클링의 지혜, 덕판배를 만드는 과학성, 억척같은 부지런함과 절약정신과 도전성을 키워냈다. 이와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신을 통하여 위로와 안정을 얻고 살아가는 힘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제주도가 ‘일만팔천 신들의 고향’이 된 것은 이런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려는 정신의 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 제주바다의 진정한 주인 좀녜(해녀)
제주섬의 돗통시. 비위생적인 전근대문화의 상징이었던 제주의 돗통시. 통시 속에 모아진 사람의 인분과 음식쓰레기, 잡초들은 돼지들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훌륭한 거름이 되어 척박한 땅을 살려냈다.
화산섬이라는 자연환경- 생산형태를 따라가는 당

제주는 환해의 화산섬이다. 한라산은 바다에서부터 완만한 평원을 만들어 내면서 솟아 있다. 이러한 환경은 산간에는 반농반수렵, 중산간에는 반농반목축, 해안에는 반농반어업의 생산형태를 이루게 했고 농경문화와 수렵문화 그리고 해양문화의 특성을 복합적으로 가지게 했다.   

이러한 생산형태는 신의 직능별 그리고 당의 공간적 분포와도 일치하여 나타난다. 즉 산간에서 중산간 그리고 해안으로 내려오면서 산신, 농경신, 해신이 분포한다. 사실 당의 시작과 당의 분리, 신의 직능과 같은 신화의 구조들이 이처럼 지역의 생산형태, 생활문화환경과 밀접하게 나타나며 유지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돌랭이’, 소규모의 밭농사 지역- 마을 공동체가 중심인 당

제주도의 신앙은 마을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는 마을당(본향당) 신앙이 중심을 이룬다. 이는 사당이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한반도부와는 확연히 다른 특징이다.

상명리 느지리 케인틈 할망당. 한림읍 상명리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마을의 본향당이다. 제주에는 마을마다 마을당인 본향당이 있다.
한반도부의 논농사 중심의 생산형태는 대토지 소유가 고착화되면서, 대규모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이는 과거 민족, 종족, 부락 중심의 공동체의식을 사라지게 하고 대신 배타적인 혈연주의 속성을 강화시켰다.
대토지를 지키고 대규모의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을 중심을 똘똘 뭉쳐 다른 혈족과의 물꼬싸움에서 이기고, 혈족 내의 구성원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해야 했다. 결국 이것은 가부장제와, 반상의 구별, 서자의 차별,  여성 차별 등의 혈족중심체제로 구체화되고 유교의 형식주의와 결합되면서 조상을 위한 제사와,  효를 절대가치로 표방하게 되었다. 흥부와 바리데기는 그런 지배질서의 이야기다.

따라서 신앙의 면에서도 배타적인 일족신의 신앙인 모습인 사당이 더욱 성행했다.
집을 지으려면 반드시 사당을 먼저 세워야 했고 사당을 설치하지 않는 한반도부 지역의 사대부들은 심지어 문책을 당하기도 했다. 서민들도 이를 따라, 가난한 사람들도 대청 모퉁이나 적당한 곳에 사당을 세웠다.
물론 마을의 산신당이 있기도 하였으나, 마을의 지도자격이라 할 수 있는 양반들은 참여하지 않고 서민들만 참여함으로 해서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는 체제로서 기능하는데 분명한 한계를 가졌다.


제주도의 밭농사 지역은 논농사 지역과는 달리 경작지가 한 마을 안에서도 화산암반의 분포와 지대의 높낮이, 자갈의 혼합도에 따라 물의 투수상태가 달라진다. 그래서 비교적 동일한 지역 내에 있어도 밭 위치가 조금만 달라지면 진압시기, 제초시기 그리고 파종시기 등이 다르다. 
그래서 막연히 때를 기다리기보다는 밭이 가지는 개성에 따라 ‘그 밭에 가장 알맞은 때에’, 재빨리 농사일을 수눌어가며 처리해야 했다. 이런 자립에의 필요가 공동체의 협업 속에서 강한 공동체의식을 만들어 내었다.
반면 한라산 무주공야의 용암평원은 자신이 노력만 하면 자기 소유가 될 수 있었고, 조각조각 분산된 토지는 대토지의 소유를 막아 공동체 내의 갈등을 상대적으로 줄였다.

▲ 조각보를 닮은 제주의 밭들. 구좌읍 김녕리 일대의 경작지를 찍은 항공사진. 이렇게 조각조각난 토지는 소가족의 개체적 삶을 살아가게 했고, 제 때에 수눌어 가며 일을 해야 하는 척박한 땅은 공동체의식을 강화시켰다.

평등한 개성의 구현과 공동체의식의 요구는 신앙의 면에서도 제주도를 매우 특별한 지역으로 만들어 놓았다.
사당은 심지어 마을의 당으로 바꿔지기도 하였으며, 마을의 형성과 함께 시작되는 본향당은 마을의 중심이면서, 누구를 막론하고 평등하게 제의에 참여하는 진정한 공동체의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 성산 신천리 현씨일월당. 원래 현씨 집안의 처녀신을 모신 사당이었으나, 마을 본향당으로 변했다. 나무를 신의 몸이라 생각하여 고운 물색으로 옷을 입혔다. 생활에서 추수가 끝나면 빔을 마련해 입히듯, 신에게도 고운 옷을 해서 입힌 것이다.

*참고문헌: 송성대(1996), 「문화의 원류와 그 이해」(파피루스)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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