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폭발의 흔적 차곡차곡 쌓은 서귀포층

▲ 서귀포층에 남아 있는 연체동물의 화석들. 화석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지금의 서귀포 보다 남쪽 바다에 서식하는 동물들이다.

내륙에는 눈이 적지 않게 내렸다고 한다. 방송에 2월 강추위가 찾아온다고 난리인데, 서귀포에는 그저 바람이 조금 불 뿐이다.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며 아내와 서귀포로 산책을 나갔다.

아내와 서복전시관에서 정방폭포를 지나 서귀포 새연교에 이르는 길을 천천히 걸으며 해안절경을 감상했다. 그러고 보니 한나절 이렇게 같이 걸어본 지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특히 지난 가을 이래로 우린 하늘이 노랗게 보일 정도로 귤과 씨름했다. 잠시나마 둘만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도 지질기행이 가져다준 특별한 선물이다.

제주도가 화산섬이라 지형적으로 육지부의 지역들과 구분된다면, 서귀포는 제주도내서도 다른 지역과 구별된다. 길가에 자라는 열대 야자수가 이국의 정취를 더하고, 해안을 따라 길게 뻗어있는 웅장한 해안 절벽이 쏟아내는 폭포 물줄기가 삶에 지치 이들에게 활력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 앞 바다에는 범섬ㆍ문섬ㆍ새섬ㆍ섭섬ㆍ지귀섬 등이 지친 길손에게 그리움을 자극하는데, 지금도 수많은 길손들은 서귀포에서 고단한 짐을 내려놓고 잠시 삶의 위로를 얻는다.

▲ 오랜만에 아내와 한가롭게 서귀포 해안을 걸었다. 둘만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도 지질기행이 가져다준 특별한 선물이다.

진시황의 신하가 다녀간 서귀포 

1300년(고려 충렬왕 26)에 고려조정은 탐라를 동도와 서도로 나누고 대촌(大村, 제주시 지역을 지칭)을 제외한 지역에 현을 설치하였는데, 당시 설치한 14개 현 중 하나가 홍로현(지금의 서귀포시 서홍동과 동홍동 지역)이다. 서귀포는 당시부터 조선 전기까지 홍로현의 포구로 이용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서귀포라는 지명이 서불의 방문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한다. 서불('서복'이라고도 기록되었다)은 진시황의 신하였던 신존 인물인데, 전설에는 그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초를 찾기 위해 제주를 다녀갔다고 한다. 서불이 불로초를 찾지 못하고 돌아갈 때에 정방폭포 바위에 '서불과차(西巿過此)'라는 글을 남기고 떠났다고 하는데, '서귀(西歸)'란 지명은 서불 일행이 이 포구의 서쪽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런데 서불이 정방폭포 바위에 새겨놓았다는 글귀는 풍화로 인해 소실되었는지, 아직까지 서복의 글씨를 발견했다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서귀포 해안절벽에서 서복이 남긴 글씨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대신에 제주섬의 시초를 알리는 기록한 중요한 단서가 발견되었다. 제주섬이 만들어질 당시의 화산활동이 남긴 서귀포층이 그것이다.

최근에 서귀포를 방문한 많은 이들은 새연교를 따라 새섬을 방문하는데, 다리를 걸어 되돌아오는 길이면 자연스럽게 서귀포층을 포함한 절벽과 마주하게 된다. 서귀포층은 새연교의 서쪽 해안절벽에 높이 약 36m, 폭 약 1.5㎞의 규모로 노출되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해안에 절벽에서 떨어져 내린 바위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는데, 최근에는 행정에서 이 일대를 정비하고 관광객들을 위해 안내표지판도 붙였다. 하지만 관광객들은 인근 유람선과 잠수함으로만 몰릴 뿐, 아쉽게도 서귀포층을 찾는 발길은 찾아보기 어렵다.

▲ 새연교 서쪽에 서귀포층을 포함하는 절벽이 있다. 서귀포층에는 제주섬이 처음 생성될 당시 화산활동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서귀포가 감춘 것은 서복의 글씨가 아니라 제주섬 탄생의 비빌

1923년 일본인 지질학자 요코야마는 서귀포 해안 절벽에서 퇴적암층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27종의 연체동물 화석을 채취하여 학계에 보고하였다. 그리고 1930년에 일본인 하라구찌는 그 퇴적암층에 서귀포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서귀포층은 제주도 생성과 관련하여 자연이 남긴 첫 번째 기록인 동시에 제주화산학의 출발선이라 할 수 있다.

제주섬이 생성되기 전 어느 고요한 날, 한반도 남쪽의 대륙붕을 뚫고 올라온 마그마는 거대한 폭발음을 내며 물과 격렬히 반응했고, 거대한 양의 화산재와 수증기, 그리고 현무암 파편들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이같이 거대한 폭발이 보름 혹은 한 달 동안 계속되었고, 바다에 떨어진 화산쇄설물들이 수 만년 혹은 수십만 년 동안 조류에 의해 밀려와 쌓여 서귀포층을 형성했다.

그런데 서귀포층을 구성하는 퇴적물질에는 화산재와 유리질 현무암 조각처럼 화산활동에서 생겨난 물질들도 있고, 모래와 갯벌처럼 화산활동과 관련이 없는 것들도 있다. 서귀포층의 하부에서 각각 구성물질의 종류가 다른 층리들이 여러 차례 교대로 반복되는데, 최근 과학자들은 이 같은 층리구간은 화산활동 초기에 퇴적된 것이며 특정 구간에서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은 조류가 바뀔 때마다 퇴적되는 물질들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 서귀포층의 하부에는 각각 구성물질의 종류가 다른 층리들이 여러 차례 교대로 반복된다.

서귀포층에서는 북륙가리비ㆍ밤색무늬조개ㆍ반지락 등 연체동물의 화석들이 주로 발견되었고, 성게ㆍ불가사리의 화석들도 보고되었다. 화석 속의 동물들 중 상당수는 지금의 서귀포보다 더 따뜻한 남쪽의 얕은 바다에 살고 있는 종들인데, 이 사실로부터 서귀포층이 얕은 바다(수심 30~50m)에서 따뜻한 해류의 영향을 받아 퇴적된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런데 화석의 주인공들 중에는 한류의 영향이 강한 환경에서 서식하는 것들도 있어서, 서귀포층이 생성되는 와중에도 심한 기후변동을 겪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이는 서귀포층을 만들기 위한 퇴적작용이 단시일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서귀포층이 있어서 사람이 살 수 있었다

서귀포층은 초기 제주섬이 생성되던 초기의 환경을 가늠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제주도민들의 실생활에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제주의 토양은 대부분 다공질 현무암을 기반암으로 하기 때문에 비가 내려도 지하로 쉽게 스며들게 된다. 그런데 더 깊은 곳에서 서귀포층이라는 불투수층이 버티고서 지하수가 더 깊은 곳으로 스며들지 못하게 막아준다. 서귀포층에 의해 떠받쳐진 지하수가 해안에서 지표의 틈을 뚫고 솟아오른 것을 '용천수'라 부르는데, 사람들은 그 용천수를 생활에 이용했다.

▲ 정방폭포의 물줄기가 바다로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서귀포 남부 지역에 유독 하천과 폭포가 발달되어 있는데, 지하수를 떠받쳐 주는 서귀포층이 이 일대에서는 지표 가까운 곳에 분포하여 용천되는 물의 양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정방폭포에서 강정천을 지나 천제연폭포에 이르는 서귀포 남부 지역에 유독 하천과 폭포가 발달되어 있는데, 이는 이 일대에는 서귀포층이 지표 가까운 곳에 분포하므로 용천되는 물의 양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한편, 제주도 전역을 구석구석에 시추공을 뚫고 지층의 분포를 분석해본 결과, 서귀포층이 제주도 중부와 서부지역에 고루 분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만 서귀포층이 외부로 노출된 곳은 서귀포 해안 절벽이 유일하고, 그 외 대부분 지역에서는 해수면보다 평균 40m 아래 지하에서부터 연속적으로 분포한다.

그런데 제주도 동부지역을 시추한 결과, 표선과 북촌을 연결하는 선(표선-북촌 선)의 동쪽에는 서귀포층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산활동과 그에 동반된 퇴적작용에 있어서 표선-북촌 선을 기준으로 제주도 동부와 서부 지역 사이에 불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에 서귀포층이 형성될 당시에 지층에 포섭된 것으로 여겨지는 현무암 시료를 채취하여 연령을 산출해본 결과, 서귀포층은 약 100만 년 전에 형성되었다는 답을 얻었다. 신생대 제4기 플라이스토세(180년 전~1만 년 전) 초의 해성퇴적층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하다고 알려졌다.

 

**용어 풀이

U층 : 1989년에 제주도 지층에 대한 시추작업이 진행된 이후 알려진 층으로, 제주도를 구성하는 지층의 가장 하위 층에 해당한다. 수면 아래 평균 115m 깊이에서부터 분포하고 두께는 평균 135m이른다. 제주 중앙부와 서부 지역에서는 서귀포층의 바로 밑에 분포하는 지층으로, 제주섬이 생성되기 이전에 해저에 남아 있던 물질들이 굳어져서 만들어진 지층이다. 암석의 교결작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미교결층(Uncemented Sediment Formation)이라고도 부르는데, 지층이 지하에만 있고 지표에는 분포하지 않기 때문에 지명을 이용하여 부르지 못해서 U층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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