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탐라국 유산 '입춘굿'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 2012년 입춘굿축제 포스터. ⓒ박경훈

요즘 <(가칭)대탐라전>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탐라는 제주의 고대국가를 일컫는다. 그러나 이미 1천여 년 전에 사라져 버린 고대왕국 탐라는 학술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그 실체를 접하기가 매우 어렵다. 심지어 학계에서는 학문적 논쟁을 통해서 탐라국의 건국연대마저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칭)대탐라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왠지 실체 없는 허장성세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본다. 물론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 <(가칭)대탐라전>이라는 명칭을 좀 더 몸에 맞게 고칠 시간과 논의의 기회는 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제주문화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필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제주도정에서 이러한 관심을 기울이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지역 정체성의 근간이 되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역사와 문화를 발굴하고 이를 새로이 조명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요, 이미 시작되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칭)대탐라전>의 논의와 함께 이제는 도정이 탐라와 관련된 여러 가지 역사문화유산들에도 제대로 눈길을 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가칭)대탐라전>의 위상과 의미는 단순히 예총이 그동안 제주예술제-한라문화제-탐라문화제로 이어온 문화행사의 확대발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탐라문화의 정수가 어린 것들을 가려내고 이들을 <(가칭)대탐라전>의 핵심콘텐츠로 활용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마침 오늘은 임진년 흑룡의 해를 맞아 <탐라국입춘굿놀이축제(이하 입춘굿)>가 열리게 된다. 사실, <입춘굿>은 유일하게 제주에 전승되는 무형문화유산이다. 일제 때 단절의 시기를 겪기는 했지만, 복원이라는 형태로나마 과거 제주섬 사람들이 매해 치렀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 땅에서도 과거와의 오랜 연줄 하나는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이 글은, 입춘굿에 직접 참여도 하고 익히 들어,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졌지만, 정작 입춘굿의 유래와 문화사적 의미들에 대해 깊은 이해를 구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부러 입춘에 맞추어 내놓는 글이다. 또한 현재 외형과 달리 입춘굿이 처한 열악한 현실에 대해 함께 문제의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에서 작성하게 되었다.
복원된 지 14년째이니 이제 제법 입춘날 목관아 천막에서 입춘국수 맛을 보신 분들도 꽤 되나 보다. 엊그제는 지인이 전화에 대고, “박 소장! 올해 입춘국수는 멸치국수라 고기국수라?”하며 물어왔다. 이 기막힌 멸치와 고기 얘긴 이 글의 맨 뒤에 등장할 것이다. 그 웃지 못 할 입춘국수의 내력이.입춘굿은 탐라시대인 고대로부터 전승되는 축제였다. 우리나라에서 제주도에서만 전승되던 입춘절기에 행하는 굿이자 관민합동의 축제로서 이 축제의 기본성격은 농사의 풍요를 비는 풍농굿이며, 입춘날 탐라국의 안녕과 번영, 풍농을 기원하는 나라굿(國際)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탐라왕 때부터의 유습’이라는 문헌기록들, 전도(全島)의 마을이 참여했다는 규모와 <삼성신화>와의 연관성을 근거로 상상해 볼 수 있다.

▲ 입춘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미리 온 봄맞이 굿판을 보기 위해 관덕정마당에 사람들이 몰렸다. ⓒ박경훈

입춘굿, 탐라국의 유산

일제시대인 1924년 제주도청에서 발간한 《미개의 보고 제주도》에는 “매년 입춘일 목사청에 모여, 한 동리마다 흑우(黑牛) 한 마리씩을 바쳐, 목사와 도민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함과 동시에 농작물의 풍요를 산신과 해신에게 빌고, 여흥으로 가면극 형태의 고대극과 흡사한 것을 연출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시대 이원조 목사가 쓴 《탐라록》은 입춘굿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원조는“춘경(春耕)의 풍속은 고대 탐라왕의 친경적전(親耕籍田)의 유습”이라 했다. 이를 기록한 때가 1841년이니 탐라국 이후 그때까지는 입춘굿이 성대하게 치러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물론 그 이후에도 이루어졌으나, 가장 확실한 당대의 문헌기록으로 따진다면 그렇다) 즉, 탐라-고려 속령-조선 지방으로 이어지는 장구한 역사 속에서 탐라왕-지방관-호장으로 이어지는 면모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입춘날 목우를 끌고 한 해의 풍농을 비는 의례는 쉼 없이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 일제강점기 입춘굿 재현 장면. ⓒ박경훈

입춘굿이 탐라왕 때부터 전승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였을 때, 고구려의 영고, 예의 무천, 부여의 동맹과 같이 국가 단위로 공동체의 결속과 풍요를 빌었던 <나라굿>인 탐라의 <국중대회(國中大會)>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바로 탐라의 건국신화라고 불리는 <삼성신화>와의 연관성을 고려해 보면 유추가 가능하다.

<삼성신화>에서 3공주가 망아지, 송아지, 오곡의 종자를 들고 입도했다는 신화소와 3신인이 비로소 3공주를 배필로 삼아 살 터를 정하고 대업을 이루었다는 것은 <탐라국>이 그 이전의 산업체제에서 완전히 다른 산업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탐라국의 개국은 수렵(또는 해상교역, 어업)을 주업으로 삼던 삼신인으로 대표되는 집단이 새로운 농경기술을 가진 3공주로 대표되는 이주세력과 함께 농경을 전면적으로 도입해 나라를 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삼성신화의 스토리는 고대의 어느 시기-탐라국 건국기의 역사적 사실의 신화적 반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탐라왕이 몸소 ‘친경적전’ 했다는 것은 수렵 중심의 생활에서 농경을 중심으로 나라를 개국했던 사실의 반영이며, 왕이 친히 나서서 밭을 가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제주섬 전역에 농경을 국가적 산업으로 장려하고 강력하게 시도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바로 이 모의의례가 입춘굿의 핵심적인 요소인 것이다. 이로써 <삼성신화>의 신화상의 화소와 탐라왕의 유습으로 전하는 <춘경-입춘굿>의 유래가 서로 상통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축제의 기원을 탐라국 개국 시기로 소급하는 이유는 <친경적전>의 모의 의례가 탐라왕이 참여하는 <國中大會>라 할 수 있는 입춘절기의 연초 제주섬의 대축제에 중요한 의례로 자리 잡은 시기와 각 마을 신당(神堂)들이 ‘부부갈등으로 살림을 분산’하는 본향당(本鄕堂)의 주 본풀이 소재들이 정착된 시기가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농경신인 여신의 좌정담(坐定談)들은 대부분 남신으로 상징되는 수렵민(狩獵民)과의 투쟁을 담고 있고, 현재의 자연마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온 본향당의 형성도 이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곧 농경문화의 이입 이전에 광범위한 수렵문화(또는 해상교역문화)가 존재했었음을 반증한다. 왜냐하면 여성신, 즉 농경신을 마을의 본향신으로 섬기는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 자연마을의 대부분의 공통점인 바, 이는 수렵문화세력을 농경문화세력이 제압하고 <설촌(設村)>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탐라국시대에는 다섯 개의 큰 마을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러한 마을들이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전도의 빈 땅들을 채워 나갔고, 그에 따라 당신본풀이들도 확대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탐라왕이 몸소 <친경적전>했다는 것은 이 의례가 농경을 국가적으로 강조했던 어느 시기부터 시작되어 전승되다가 정착된 의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입춘굿은 한국문화의 다양성과 제주문화의 독자성을 증명하는 전승문화유산

입춘굿은 정월대보름을 중시하는 육지부의 세시풍속에 비해 국내적으로는 유독 제주에서만 오랜 기간 전승되어 오던 전통굿놀이다. 타 지역에서는 이미 자취를 감춘 것으로, 입춘굿은 한국문화의 다양성을 한 폭 더 넓혀 주는 독보적 가치가 있다. 이는 탐라문화가 다른 문화권과 다르다는 지역의 문화독자성을 뒷받침해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화콘텐츠임을 말한다. 특별자치도의 시대에 제주문화의 정체성 문제는 더욱 중요해지는데, 이는 제주도가 외부에 노출되면 될수록 그 의미가 중요해지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입춘굿은 더욱 육성하고 다듬어야 될 소중한 제주의 전통문화이다.

▲ 관덕정마당에서의 오방각시춤. 제주목관아는 입춘굿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2000년에 복원되었는데, 마치 입춘굿을 위해 복원된 듯 굿판과 잘 어우러진다. ⓒ박경훈

<입춘>은 한국은 물론 중국·일본 등 동북아 3국이 모두 중요시하는 농경세시이기도 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를 제외하고, 입춘춘첩을 써 붙이는 정도를 빼고 나면, 그 의미와 의례가 매우 간소화되어 있다. 그런 측면에서 제주도의 입춘굿은 동북아국가와 민족문화의 공통점과 지역성의 독자성을 동시에 지니는 가치 있는 것이다.

 2003년 강릉단오제의 유네스코 등재와 맞물려 한·중 두 국가 간 문화전쟁에 가까운 논쟁과 충돌이 있었다. 결국 양국 문화전통의 공통점과 차별점을 인정하는 선에서 이 일은 일단락되었는데, 그 이후 민족과 국가를 공유하는 문화유산에 대해서는 2국 또는 3국 동시 등재가 대세가 되었다. 동북아는 모두 중국문화의 아류 또는 영향 하에 이루어진다고 믿는 세계적인 오해와 속설은 이와 같은 문화적 변별력 속에서 더 이상의 설득력을 잃게 된다. 우리 민족의 문화적 독창성과 전승문화의 독자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입춘굿 또한 한층 그 존재의 의미가 커질 수밖에 없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어쩌면 향후에 중국, 일본이 입춘절 세시축제를 유네스코로 끌고 가는 상황이 온다면, 제주섬의 입춘굿은 대한민국의 입춘절 세시축제의 연고지로 더욱 그 가치를 주목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입춘굿은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탈춤문화를 가지고 있다. 두레와 농경문화에서 비롯된 탈춤은 조선 후기 한반도 전체적으로 매우 풍부하게 발전된 데 비하여 유독 제주도에서만은 이 탈춤문화가 전승되거나 문헌상으로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물론 <제주큰굿>의 전상놀이나 영감놀이 등 일부 굿놀이에서 일회적으로 종이탈이 쓰이기도 하나, 입춘굿에서 비로소 연희적 의미의 탈굿놀이를 만날 수 있다. 이는 제주문화의 다양성을 풍부하게 하는 독자적 가치를 높이는 요소이기도 하다.

<입춘>은 새해를 상징하는 절기이자 24절기의 첫 절기로 절분을 뜻하며, 농사에서의 새해를 뜻하기도 한다. 시기는 양력 2월 4일경이며, 음력으로는 섣달에 들기도 하고, 정월에 들기도 하는데 봄으로 들어서는 절기이다. 봄은 농사와 맞물려 새로운 농경이 시작되는 계절이기도 하기에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이러한 농경의 풍요를 비는 육지부의 풍농굿은 대부분 정월 대보름(上元)을 중심축으로 하여 펼쳐진다. 그런데 제주도의 풍농굿인 입춘굿은 입춘날에 이루어지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입춘은 광범위한 농경세시이다. 중국에서는 입춘을 다아춘(打春), 교춘(咬春)이라 하여 예로부터 농사력과 관련하여 중요한 세시풍속으로 여겨 왔다. 특히 흙으로 소를 만들어 이를 채찍으로 때리는 데서 유래한 다아춘(打春)은 전통적으로 농경사회였던 중국인들에게는 새로운 농사가 시작되는 봄을 맞이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하게 여겨졌고, 넓은 지역과 많은 인구수에 걸맞게 다양한 입춘절행사가 치러져 왔다. 현재 중국에서는 입춘에 봄을 맞이하는 것이 예전처럼 성대하게 치러지진 않지만, 각 지방마다 특이한 방식으로 입춘을 맞이한다. 예를 들면 ‘봄맞이’(打春),‘봄을 물다’(咬春),‘바람개비를 달다’(掛風車),‘탑청’(踏靑) 등이 있다. ‘봄맞이’(打春)의 풍습은 황궁에서 제일 처음 나타났다고 한다. 입춘에 황궁 안팎에서는 성대한 경축을 진행하며 황궁 문 앞에 있는 흙으로 빚은 ‘봄맞이 소’(春牛)를 부수어 버린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일부 농촌에는 흙으로 빚은 ‘봄맞이 소’를 부수어 버리는 풍속이 전해진다고 한다. 입춘 전에, 흙으로 소 인형을 빚은 것을 ‘春牛’라 하는데, 아낙네들이 아이를 안고 ‘봄맞이 소’를 세 바퀴 돌면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풍속보다 하나의 오락으로 간주되고 있다. ‘봄을 물다’는 의미의 교춘(咬春)은 입춘에 민간에서 무, 생강, 파, 밀빵을 먹는 풍속에서 유래했다. 입춘엔 봄날의 신선한 야채를 먹어야 하며 이는 병을 예방하고 또한 새로운 봄을 맞이함을 의미한다. 

일본에서의 입춘은 세쓰분(節分)이라 해서 입춘 전날 2월 3일 밤에는 볶은 콩을 집안과 집 밖으로 던져 귀신을 쫓아내고 복을 맞아들이는 행사를 한다. 이날 밤에는 각 가정에서 “귀신은 밖으로 복은 안으로”(は外,福は內)라고 외치는 소리와 집 안팎으로 콩을 뿌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는데, 이 행사는 계절이 바뀔 즈음 귀신(사악한 것이나 불행)은 집 밖으로 나가고 복(행운이나 행복)은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바람이 깃들어 있다. 콩을 뿌린 다음, 남은 콩을 가족 전원이 각기 자신의 나이만큼 먹기도 한다. 일본 전 지역에서 이러한 입춘절의 풍습은 현재에도 매우 다양하게 열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전통적인 농경국가로서 입춘을 중시했지만, 육지부에서는 입춘첩(立春帖)을 써 붙이는 일이 입춘 민속의 전부다. 오히려 정월 대보름은 매우 성대하게 인식하지만, 입춘은 그 의미와 행사가 매우 축소되어 기록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제주도만큼은 입춘을 매우 중히 여겨 입춘굿이 전승되어 왔다. 이는 제주문화의 정체성과 연관 지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최근 탐라문화권 정립사업 등에서도 입춘굿이 제주문화에서의 지위는 높을 수밖에 없다.

제주도 유일의 전승문화축제

입춘굿에 대한 기록은 이원조(李源祚)의 『탐라록(耽羅錄)』, 김석익(金錫翼)의 『심재집(心齋集)』, 김두봉(金斗奉)의 『제주도실기(濟州島實記)』, 진성기의 『남국의 무속』등에 실려 전하고 있는데,春耕의 풍속은 고대 탐라왕 때의 親耕耤田의 유습이며, 탐라국 이후 1841년까지도 왕이 몸소 밭갈이하는 모습을 보여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던 농경의례가 전승되고 있었다(문무병)고 한다.

현재 제주도에서 연중 행해지는 축제들 중에서 전통문화축제라 자칭·타칭하는 축제들은 많으나, 진정 과거로부터 그 맥을 잇고 있는 전승문화축제라 칭할 수 있는 것은 입춘굿뿐이다. 일제시대 민족문화말살정책에 의해 단절된 것을 민속학자인 문무병 박사가 1999년에 복원하였다. 완전히 맥이 끊긴 축제가 제주굿의 원리적 복원의 이론과 현대적인 도시축제의 골격을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입춘굿은 탐라국시대부터 전승되어 오는 장구한 역사와 유래를 지니고 있는 축제로서, 잊혀진 제주의 고대국가인 탐라국의 유습이자 제주문화의 장기지속의 문화적 표증이기도 하다. 오랜 역사성과 고대의 미학적 전통성을 지니고 있는 제주도의 유일한 전통문화축제인 것이다. 이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전통문화축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전통성을 내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를 살려내는 일은 지역문화의 정체성 문제를 포함하여 그 의미가 중요하다. 최근에 만들어진 탐라문화제나 칠십리축제·칠선녀축제 등은 전통문화를 주요 콘텐츠로 하고 있으나, 이는 전통문화를 콘텐츠로 하고 있을 뿐 축제 자체의 전통성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제주도는 과거 고대왕국으로서의 탐라국의 존재를 역사자료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현재에도 제주인의 문화정체성의 근간이 되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제주문화의 유구한 전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문화적 존재로서의 입춘굿축제의 존재 가치는 그 어떤 전통 소재의 축제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축제를 위해 기획하고 만들어낸 여타의 전통축제들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 일제강점기 입춘굿 재현 장면. 심방과 관기들의 춤추는 장면. ⓒ박경훈

우리 문화를 회복하는 문화사적 의미가 크다

입춘굿은 90여 년의 단절을 겪은 전통문화축제이다. 특히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의해 중단된 축제로서 이를 제대로 복원한다는 일은 일제의 식민잔재를 청산하고 우리의 고유문화를 회복한다는 문화사적 의미가 크다. 여전히 우리는 문화적·의식적 식민의 그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근대의 초입,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은 우리 문화의 근대적 이행·변화에 근본적인 장애로 작용했다. 특히 문화적인 식민지배는 전승문화의 강제적 단절을 통한 일제문화의 주입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는데, 우리의 경우 왕조지배질서가 무너지고, 일제에 의한 식민지 근대가 시작되면서 전 시대에 행해져 오던 많은 문화적 유산(유·무형의)들의 전승이 끊기는 비극적 상황을 맞게 된다. 탐라국입춘굿 역시 일제시대에 전승이 끊어지게 되며, 해방이 되어서도 전통문화에 대한 전근대적 시각과 무속에 대한 미신타파명목의 새마을 운동이 이어지면서 문화적·의식적 식민지배를 벗어나지 못했다. 1998년 처음으로 입춘굿이 복원되면서 비로소 단절되었던 전승의 맥을 잇는 노력이 시작되었는데, 여전히 과거의 입춘굿의 위상을 제대로 복원해내지 못하고 있다. 입춘굿놀이축제를 대표축제화하여 탐라국시대로부터 전승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축제의 의미를 살린다면, 이는 단순히 대표축제의 발굴뿐만 아니라 민족문화의 올바른 복원을 통한 문화정체성의 회복으로, 곧 식민지배의 흔적을 청산하는 역사적 의의도 가지는 것이다. 

전도적 차원의 공동체성·지역정체성 강화에 적합

축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동체성 강화에 기여함을 그 제일의 목적으로 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축제는 제의적 성격과 놀이적 성격을 동시에 아우른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일제의 강제병합에 의한 전승문화의 근대문화로의 진입 단절은 전근대시기의 전승축제들을 현대적 축제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또한 서구문화의 무비판적 수용으로 인해, 우리 문화를 경시하고 모든 전승문화가 전근대적이고 비문화적인 것으로 치부 당해 해방 후부터 이어진 현대사회의 구축기 동안에 문화가 비주체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자기 안의 문화마저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상황이 겹치면서 우리의 공동체를 더욱 문화적 동질성 공유와 동의에 의해 조직화하지 못하고, 군대문화의 잔재인 동원식·운동장식문화가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주민들 스스로도 축제로부터 소외당하는 비주체적인 축제를 양산하게 된다. 이러한 잘못된 축제문화의 현대화는 결국 국적 없는 축제, 전승 없는 전통문화(박제문화)라는 부정적 측면의 문제점들을 양산해왔다.

▲ 입춘탈굿놀이의 여러 모습들. ⓒ박경훈

특히 과거의 전통적인 마을을 기반으로 했던 전통문화축제들은 전승시기와 전혀 다른 여건 속에서 이루어지면서 원래의 문화원형이 왜곡·굴절·파괴되는 양상을 보인다.

아파트와 자동차로 상징되는 현대 한국자본주의 도시공간의 폭력적 입지와 장소성을 상실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주민들의 삶은 그에 걸맞은 새로운 공동체적 질서가 필요하며, 이는 단순히 행정체계와 법적 규범 외에도 문화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강력하고 장구한 규범은 오히려 문화적일 때 그 영향력이 지대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을 기반으로 했던 우리의 기초단위의 공동체적 질서는 아직까지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문화적 질서를 구축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문화의 황폐화와 비인간화로 나타난다. 결국 이러한 황폐화된 공동체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축제가 필요하다. 즉, 단순히 놀고 마시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적 가치관을 확인·공유하고 이를 주민 모두의 참여로 새롭게 구축하는 데 축제를 통한 문화적 공통성을 확인하는 일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제주도는 2007년 7월 1일자로 제주특별자치도로 승격했다. 그러나 이는 행정가들이나 공무원들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일반 주민들에게는 피부에 와 닿지 않는 행정사건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후 제주특별자치도를 아무리 행정에서 선도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문화적 동의과정이 존재하지 않기에 늘 그렇고 그런, 행정이벤트의 하나로 인식되어 버린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 축제는 그 어떤 사회적 노력보다 그 위력이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입춘날이면 으레 목관아 대청마루에 자리를 잡아, 무료로 얼굴 그리기 봉사에 여념 없는 한국의 대표 만화가 박재동 화백. ⓒ박경훈

입춘굿은 전통시대에도 바로 이러한 제주공동체의 일체화와 문화적 소속감, 정체성을 체현하기 위해 관민합동의 대축제로, 공간적으로도 전도적 차원에서 출발하여 제주목의 상징공간이었던 목관아 앞마당인 관덕정광장에서 열렸던 것이다. 이러한 참여의 폭과 전도적 공간의 범위는 제주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데 이 축제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21세기인 현재에도 입춘굿축제가 과거에 수행했던 이러한 역할과 가능성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

입춘굿, 도정에서 직접 건사할 때가 되었다.

입춘굿은 요즘 제주사투리로 ‘다슴애기’ 꼴이다. 80여 년 만에 어렵사리 복원한 축제였지만, 매년 찔끔찔끔 예산을 만들어 왔다. 거기에 비해 들불축제나 여타 기관장이 주목하는 축제들은 예산부족타령을 하면서도 언제나 분에 넘치는 예산을 받아 치렀다. 입춘굿축제의 예산은 그런 축제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그러니 다슴애기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고대에는 탐라왕이 직접 주관했던 국제(國祭)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목사가 직접 주관했던 전도적인 입춘굿이 강도들에게 나라를 빼앗겨 전승의 맥이 끊긴 것을 어렵사리 복원한 민간의 노력에 비해 오늘날 과거의 <제주목>에 대응되는 <제주도정>은 전통시대의 주체들에 비해 너무 무책임하다는 볼멘소리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적어도 민간에서 고문서 뒤져가며, 축제의 원리를 연구하며 어렵게 복원해냈다면, 그 다음은 적어도 도정에서 책임져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제주시 차원의 축제로 동네축제로 방치(?)해버린 것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가 요구된다.
입춘굿은 단순히 전통문화의 재미있는 콘텐츠를 재구성해서 새롭게 만들어 낸 여타의 현대축제가 아니다. 적어도 문헌상으로는 탐라시대부터 면면히 탐라의 맥을 이어 온 장구한 역사를 가진 축제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제 도민사회가 이 축제의 진로에 대해 책임 있는 답을 낼 시기도 되지 않았을까?

입춘굿은 완전히 복원된 축제가 아니다. 99년도에 복원해 처음으로 축제를 개최할 때부터 복원 당사자였던 문무병 박사는 “이 축제는 20%만 복원된 거우다. 앞으로 연구에 연구, 고증에 고증을 거치고 예술적 상상력을 불어 넣어 21세기 도시축제로 완성해 나가는 것이 우리덜이 할 일이우다.”라고 선언했었다. 하지만, 입춘굿은 찔끔예산에 매우 더디게 상장해 왔다. 언제나 예산에 허덕이고, 복원 연구비는커녕 축제 개최행사비도 모자라 당시 민예총 회원들은 문화운동이라는 미명하에 재능기부로 함께 했다. 하지만, 그 후 올해까지 14년 동안 축제 예산은 제주도내 10여 개 이상의 작은 마을단위 축제의 평균예산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일관했고, 작년과 올해는 그에서도 30% 이상 깎인 상태에서 진행하고 있다. 또한 축제의 개발과 연구를 진행할 수가 없으니 축제의 원형복원이란 과제도 요원해졌다. 물론 주관측에서도 지역상권과 주민들과의 튼튼한 결속을 토대로 한 축제의 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은 비판 받아야 할 대목이다. 이런 양면적인 문제점들로 인해 매년 제주특별자치도 축제육성위원회의 우수축제로 여러 번 선정되었지만, 입춘국수에 돼지고기(이 돼지고기는 사실 문헌에 나타난, 마을마다 흑우 한 마리씩을 내어 축제를 치렀다는 데서 기원한다.)를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도 고민거리가 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실제 국수 관련 재료비 단가는 뛰고 예산은 10년 전 그대로이니 결국 무료국수에서 1,000원을 받는 천냥국수로, 작년엔 천냥국수에서 ‘천냥멸치국수’로 바뀌어 치러졌다. 이 내용을 잘 모르는 도민들은, 특히 예전부터 단골로 참여하셨던 주민들 중에는 주최 측에 볼멘소리를 한다.“왜 공짜로 주던 국수값은 받으며, 고기국수는 어디 가고 멸치국수냐”고. 흐~참!.

제주특별자치도는 이번에 <(가칭)대탐라전>을 준비하고 있고, 또한 다른 어느 도정보다 탐라문화에 대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먼저 <탐라국입춘굿놀이축제>부터 건사해주길 부탁한다. 무엇보다 이 축제는 탐라국 그 자체에 기원을 둔 오래된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고, 1999년 80여 년 만에 복원된 축제는 잃었던 과거를 어렵지만 스스로 되찾은 우리의 진정한 탐라문화이기 때문이다.

▲ 박경훈 제주전통문화연구소 소장.

어쨌든 올해는 흑룡의 해란다. 그것도 60년 만에 돌아오는 흑룡의 해이니, 용이란 원래 전설 속의 때가 되길 기다렸다가 하늘로 승천하는 영물이리라. 그동안 우리사회는 많이도 어지러웠고 충분히 스트레스를 받는 시간들이었다. 우리 제주도 역시 아직도 골머리 아픈 일들이 지천이지만, 그래도 흑룡의 해라니 모든 분들이 밝은 꿈, 오랜 꿈 한 아름씩 싸안고 승천하는 기운생동의 한해가 되길 바란다. /전통문화연구소 박경훈 소장

<제주의소리/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