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안따라가기(16)] 협재해안

옹포리와 협재리의 경계인 '썩은개'에 이르렀다. '썩은개'는 옹포리와 협재리 사이에 있는 작은 만(灣)으로 제주의 해안 지명 중 '썩은개'라는 곳이 많다. 일반적으로 '썩은개'라고 불리는 지명이 붙은 곳은 해조류가 파도에 많은 떠 밀려와 쌓이는 곳이다. 이 곳도 곳곳에 떠 밀려온 해조류들이 쌓여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주 외에는 불가능한 것이 해조류 거름이다. 어릴 적 부모님과 같이 해안에 쌓인 해조류를 모아서 한 곳에 쌓아두었다가 밭에다가 거름으로 주었던 기억이 있다. 기록에 보면 바다 가까이에 있는 밭에는 바로 밭으로 가져가 퇴비로 사용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해조류에 뭍은 소금기가 밭작물에 치명적일 수 있는데, 제주에서는 어떻게 작물이 죽지 않고 오히려 양분이 될 수 있었을까? 제주의 토양은 물이 잘 빠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제주의 토양은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화산회토가 대부분이다. 화산회토는 쉽게 말하면 화산활동시 연기처럼 뿜어져 나오는 화산재가 쌓여서 된 것인데, 육지부의 일반적인 토양에 비해서 일정 부피당 무게가 2분의 1정도라고 한다. 때문에 수분이 쉽게 빠지는데, 해조류에 포함된 염분도 빗물에 씻겨서 작물에 영향을 주지 않는 지하로 금방 내려가기 때문에 소금기가 없는 해조류가 천천히 분해되면서 거름역할을 할 수 있다. 만약 육지부의 땅에 해조류를 이용해서 거름을 한다면, 염분이 토양에 장기간 남아있어서 농작물이 자랄 수 없다. 제주지역의 독특한 농업환경에서 나오는 지혜로운 생산기술이다.

▲ 옹포리와 협재리의 경계점 썩은개, 썩은개는 파도에 밀려와 쌓이는 해조류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홍영철
'썩은개'를 지나 서쪽으로 100여m를 가면 오른쪽에 작은 폭낭(팽나무)쉼터가 나온다. 이 쉼터 앞으로 시멘트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면 협재포구를 만난다. 협재포구는 '큰개창'과 '족(아래아)은개창'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포구도 최근에 확장공사를 하고 매립해서 예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없다. 다행히도 내가 어린시절을 이곳에서 성장했고, 지금도 부모님이 계시는 곳이라 어린 시절 기억을 어렵게 더듬어 낸다. 이 곳 협재는 조개껍질로 이루어진 '패사'가 덮혀 있고, 바다로 길게 뻗어나간 평평한 바위들과 협재리에 포함되어 있는 비양도가 포근한 느낌을 주는 곳이어서 여름철 피서객들이 많이 오는 곳이다. 여름에는 관광객들이 수영복을 잘 차려 입고 백사장을 거닐다가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채 수영복도 없이 팬티만 입고 모래밭 멸치떼 마냥 놀고 있는 우리들 모습을 보며 신기해 하는 모양에 부끄러워 백사장을 포기하고 개창으로 숨어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기억 속의 포구는 돌담으로 허수룩 하게 쌓여진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어주던 포근함이 있었고 포구에 매어둔 배위에서 뛰어 내리기, 배 밑 통과하기, 헤엄으로 포구 돌아오기 등 좋은 놀이터였다. 지금은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포구주변은 모두 시멘트로 발라져 있고 포구바닥의 빛나던 모래는 퇴색하였다. 이제 나의 여름날의 개창은 내 기억속에만 희미하게 빛난다.

▲ 협재포구의 모습, 포구 주변의 조간대가 점차 매립되고 있다.ⓒ홍영철
또 하나의 '개창'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이 곳에서 가까운 뒷당을 찾아보았다. 예전 어른들이 절대로 이곳의 제물을 먹거나 가져오지 말라고 하는 말을 흘려버리고 헤엄치다가 실증나면 가끔식 들렀던 곳이다. 하지만 돌담만이 남아있고, 그 안에 있었던 신목과 돌은 선인장과 풀들에 묻혀 버렸다. 단지 그 옆에 야트막하게 다시 쌓은 듯한 돌담이 그 곳을 대신하고 있다는 추측만 가지고 물러나왔다. 이 신당에는 여기에 모신 신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 곳에 살던 고씨 조상이 풍선(돛단배)을 타고 중국 무역을 갔다 올 때 뱀이 따라와 이 곳 구멍으로 들어가자 신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한다. 이후 고씨 집안에서 대대로 조상신으로 모셨다. 이에 따라 '고칩당'이라고도 한다. 뱀신을 어업신으로 모신 당은 거의 볼 수 없는데, 제주도 사람들도 뱀신이라면 무언가 이상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제주에서는 특이하게 뱀신을 모시는 당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전통적으로 뱀은 집안의 곡식을 축내는 쥐를 쫓아주어 풍요를 지켜주는 동물로 인식되어왔다. 기독교 사상이 전파되면서 뱀은 사탄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혐오의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적 동네 사람들이나 부모님들이 뱀을 보면 손을 감추라고 하고 손을 보이면 손이 썩는다고 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손을 내밀어 뱀을 헤치지 말라고 하는 속뜻이 있는 듯하다. 뱀에 대한 혐오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 왼쪽은 새로운 신당으로 보이는 장소, 오른쪽은 예전 협재뒷당으로 추정되는 장소.ⓒ홍영철
협재는 모래로 유명하다. 겨울철 초등학교 등하교 길에 북서풍에 실려 얼어붙은 얼굴을 때리는 모래바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집 안에 도착하여 귀 속에 든 모래를 먼저 털어 내야했던 기억이 난다. 바람과 해일 등에 의해 이 곳은 해안에서 3km이상 바다모래로 덮혀 있다. 모래바람을 막기위해 해송을 촘촘히 심었는데 그 때 나무를 심는 것을 사방공사(砂防工事)라 했다. 이 나무들을 잘 자라게 하기위해 대나무 집게를 만들어 솔나방 유충인 송충이를 잡던 일과 가마니를 나무 중간에 덮어 송충이 알들이 거기에 붙게하여 태웠던 기억도 떠오른다. 협재마을은 지금은 모래로 인해서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곳이지만, 모래와 끊임없이 씨름을 한 곳이다.    

▲ 조개껍질이 부서진 패사로 이루어진 협재 모래사장.ⓒ홍영철
협재마을의 또 하나의 특징은 동굴이 발달하였다는 것이다. 한림공원 안의 협재굴, 쌍용굴, 황금굴과 재암굴, 한라산 쪽으로 소천굴, 초기왓굴 등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동굴군락을 이루고 있다. 또한 협재리 서쪽의 마을인 금능리의 한들굴 등 이 지역은 지하에 거대한 혈맥처럼 동굴이 뻗어있다. 이 지역의 동굴은 또한 용암동굴이면서도 석회질성분의 모래가 빗물에 녹으면서 용암동굴 내부에 석회동굴의 특징을 보이는 '위석회동굴(僞石灰洞窟)'이어서 천연기념물 2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주의 용암동굴은 한림읍 협재리 지역과 구좌읍 김녕리 지역에 발달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이 두 곳이 공통적으로 점성이 적어 잘 흐르는 '파호이호이용암'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용암동굴은 용암이 흐르면서 공기와 접촉하는 부분은 빨리 식고, 내부는 식지 않고 흘러서 빠져 나오기 때문에 형성되는데, 점성이 적으면 용암이 멀리 흘러가기 때문에 규모가 크고 긴 동굴군이 형성된다. 협재해안 가까이에 있는 재암굴은 동굴내부에서 솟아나오는 용천수로 유명한데 한 여름에도 5분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시리다. 이 곳은 여름철에는 동굴내부에서 음식을 팔기도 해서 동굴의 보전에 문제가 되고 있다.

▲ 재암굴 입구와 재암굴 내부의 용천수.ⓒ홍영철
※ 홍영철님은 제주의 새로운 관광, 자연과 생태문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대안관광을 만들어 나가는 (주)제주생태관광(www.ecojeju.net )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제주의 벗 에코가이드칼럼’에도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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