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2년 2월5일 한라산에 추락한 특전사 군수송기 사고현장을 찾기 위해 동원됐던 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의 양송남씨.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뉴스 後]②인터뷰-'봉황새작전' 사고현장 목격자 양송남씨

 

[기사수정]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의 양송남(58)씨는 30년전 그날. 세차게 몰아친 눈 만큼이나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어젯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군용수송기 추락 하루 전 어리목 산장에서 모 대학교 산악부와 잠을 자고 퇴근한 양씨는 1982년 2월4일 오전 가족들이 있는 제주시 용담동의 집으로 향해 꿀 맛같은 잠을 청했다.

그런 그에게 밤 11시경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청와대에서 경호원들이 6일 한라산 성판악 코스로 등반을 하니 약속된 시간에 출근하라는 당시 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의 전화였다.

창밖을 바라보던 양씨는 "이런 날씨에 무슨 한라산 등반이야"라는 생각으로 다시 잠을 청했다. 몇시간이 지난 뒤 다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옷을 차려입고 새벽3시까지 용담로터리로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등산복과 장비를 모두 사무실에 두고 온 양씨는 집에 있는 옷을 대충 차려입고 용담로터리로 향했다. 느닷없이 5톤 군용트럭이 양씨를 맞이했다. 트럭 카고에는 당시 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 직원 2명과 낯선 인물들이 보였다.

5.16도로를 향하던 트럭은 갑자기 학교 운동장에 멈춰섰다. 지금의 아라초등학교였다. 교실 안 현장에는 제주도 전체지도와 현황판을 걸어 놓고 브리핑이 이뤄지고 있었다.

알수 없는 군인들의 지휘가 끝난 후, 양씨는 다시 영문도 모른채 버스를 타고 군인들과 한라산으로 향했다. 영하의 날씨에도 아랑곳 없이 군인들의 눈에는 비장함이 엿보였다.

전날 내린 눈이 얼면서 한라산을 향하던 버스는 수차례 미끄러지고 고랑에 빠졌다. 버스에는 최모 소령이 이끄는 특전사 47명과 양씨가 있었다. 한라산 지리에 훤했던 양씨의 임무는 군인들의 안내였다.

운행이 불가능해지자 최 소령은 "걸어서 가자"며 양씨를 재촉했다. 40분 가량 걸어 관음사 관리사무소(현재 휴게소 자리)에 도착한 최 소령은 현장에 공주대 산악부 학생들에게 대뜸 "5일 오후 3시 큰 폭음 소리를 들었냐"고 물었다.

양씨는 그때서야 "무슨일이 벌어졌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1982년 2월5일 오후 3시께 특전사 대원 등 53명을 태운 C123기 군수송기가 한라산에 추락한 후 정확히 12시간만에 양씨가 수색에 동원된 것이다.

 

▲ 양송남씨는 당시 눈바람이 몰아치던 그날은 비행기가 뜰 날씨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아수라장 같았던 사고 현장의 목격담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30년의 세월이 지난 2012년 2월5일 양씨를 한라산 관음사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양씨는 "관음사에 도착하니 눈이 50cm나 쌓여있고 눈바람이 강하게 몰아쳤다"며 "아무리 군용기라도 도무지 비행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이어 "공주대 산악부 학생들이 폭음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하자 곧바로 특전사 47명과 함께 한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며 "무릎 위까지 오는 눈을 헤치는 러셀작업을 하는데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양씨는 "탐라계곡 대피소까지 오르니 다른 대학 산악부 학생들이 있었고 그들은 그 폭음 소리를 들었다고 대답했다"며 "이후 흙붉은오름 방향으로 수색작업을 진행하던 중 삼각봉 근처에서 잔해를 발견했다는 무전이 들어왔다"고 밝혔다.

사고 장소인 개미등 바위계곡에 도착하자 시계는 한바퀴를 돌아 6일 오후 4시3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양씨의 눈앞에 들어온 현장의 모습은 너무나 잔혹했다.

양씨는 "추락지점 인근 나무는 모두 잘려 나가고 비행기 기체들이 조각나 있었다"며 "좀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수송기 동체에서 불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시신들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나무가지에도 걸려있었다. 얼굴이 온전한 시선은 단 한구도 없었고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면서 잘려나간 팔과 다리에서는 피조차 흐르지 않은체 얼어 있었다"며 전쟁터 같았던 당시 모습을 회상했다.

양씨는 "최 소령이 함께 등반한 47명의 대원들에게 시신수습을 지시했으나 선뜻 나서는 특전사가 없었다"며 "최 소령이 전원 집합을 시키고 호통을 친 후에야 대원들이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또 "다시 무전이 오가자 다른 군인들이 광목과 마대를 가지고 사고현장에 도착했다"며 "이후 시신을 마대자루에 넣은체 지금 휴게소가 있는 관음사 관리사무소로 옮겼다"고 밝혔다.

양씨가 관음사 관리사무소에 도착한 바로 그때. '군인 53명이 순직했다'는 자막이 숙직실 TV에서 흘러 나왔다. 그때 까지도 군인들은 양씨를 향해 이날 보고 들은 내용은 절대 발설하지 말고 무덤까지 가져가는 말을 전했다.

양씨는 "사고 발생후 유족들이 현장을 찾아 유품과 수송기 잔해들을 가지고 온다. 30년이 지났으나 지금도 조각들이 나온다. 완전한 수습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매해 빠지지 않고 한라산 관음사를 찾아 눈물을 흘리는 유족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고 마음 한구석이 찡하다"며 "나는 그만 두지만 그날의 일은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제주 봉황새작전'의 사고 현장을 직접 확인한 민간인이었던 양씨는 올해 정년퇴직하고 지난 40년간 함께 해온 한라산 지기를 마무리한다.<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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