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을 제외하고 평시 작전 중 최대 숫자인 53명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사건이 1982년 2월5일 발생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경호를 위해 이른바 '봉황새작전'을 펼치던 특전사 대원 등 53명을 태운 수송기가 한라산 1060m 고지에서 추락, 수송기에 타고 있던 군인이 전원 사망했다. 천안함 침몰 사고 때보다 무려 6명이 더 숨졌지만 여전히 정부와 군 당국은 실체적 진실을 밝히지 않고 있다. <제주의소리>가 사고 30년을 맞아 4회에 걸쳐 '봉황새작전'을 연재한다.

[뉴스後] ④53명 사망사건 단신 처리...'대침투작전' 거짓 보도

 

▲ 제주도 한라산에 추락해 장병 53명이 순직했다는 1982년 2월5일자 <동아일보> 석간 사회면(11면)보도내용. <출처:네이너 뉴스 라이브러리>

한라산에 추락한 C123 수송기에서 시신을 수습한 특전사 대원들이 관음사 관리사무소에 도착한 바로 시각. 1982년 2월6일 오후 9시 TV뉴스에 한줄짜리 속보가 떴다.

 

'공군 비행기 제주훈련 중 추락...'

2월5일 오후 3시께 한라산 관음사 코스 개미등 바위에 처박힌 군용 수송기 C123기의 추락소식이 사고발생 30시간 만에 처음으로 언론에 알려진 순간이었다.

한줄짜리 자막이 노출된 이후 무슨일인지 사고소식은 방송뉴스에 소개되지 않았다. 언론지면에도 추락 소식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사흘이 지난 1982년 2월8일. <동아일보> 석간 사회면(11면)에 '軍用機(군용기) 추락 將兵(장병) 53명 순직'이란 제목으로 군수송기 추락 소식이 짧게 전해졌다.

당시 동아일보는 보도 내용은 이렇다.

'5일 오후 3시경 제주도에서 작전중이던 군용기 1대가 추락, 이 비행기에 타고 있던 53명의 군장병이 모두 숨졌다고 국방부가 6일 저녁 발표했다. 이 군용기는 대침투작전훈련이었으며 사고원인은 악천후로 인한 추락으로 일단 보고 있다. 군당국은 6일 오후 4시경 한라산 정상북방근처에서 기체잔해를 발견, 탑승장병들은 모두 순직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공군 C123수송기 추락사고로 순진 육군병장 47명과 공군소속 승무원 6명 등 53명의 사망자명단은 군사정에 의해 발표하지 않고 유가족에게만 통보한 것으로 8일 알려졌다'

보도내용은 당시 국방부의 발표자료를 그대로 인용하는데 그쳤다. 순직한 군장병 53명의 임무도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호인 일명 '봉황새작전'이 아닌 '대침투작전'으로 명시돼 있다.

다름 아닌 군사정권의 보도통제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그렇게 정권에 의해 철저하게 위장되고 은폐됐다.

사고현장에도 언론은 있었다. 수송기 추락 당일인 2월5일 당시 제주신문 편집국 연통(현재 연합뉴스) 텔레타이프(수신신호가 자동적으로 인쇄문자로 기록되는 기기)에 '제주해역에서 공군 훈련 비행기 추락'이라는 속보가 떴다.

추락사고 다음날인 6일 제주신문의 서재철(당시 35세)사진기자는 자진해서 한라산 사고현장에 올라가겠다고 했다. 그는 이날 오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제주공항 준공식과 연두순시 취재를 마친 뒤였다.

 

▲ 1982년 2월5일 오후 3시30분께 군수송기인 C124기가 봉황새 작전을 위해 제주로 이동하다 한라산 해발 1060m 지점 개미등 계곡에 추락해 탑승자 53명 전원이 사망했다.<제주의소리>

곧바로 한라산 관음사 관리사무소로 향한 그는 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 직원이자 군인들과 함께 사고 현장을 목격한 양송남씨를 만나 추락지점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관음사 코스 주변에 특전사와 육군 대원들의 수색이 이뤄지자 그는 현장 철수 후 7일 새벽 다시 관음사를 찾았다. 그의 옆에는 사고 소식을 듣고 전날 서울서 단숨에 내려온 <경향신문> 기자 2명도 동행했다.

2시간여 후 해발 1060m 개미등 계곡에 오른 서 기자의 입에서 탄식이 나왔다.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한마디로 처참했다. 53명의 특전사들은 숯더미로 변해 있었다.

서재철 기자는 "현장에 도착하니 비행기는 종이조각처럼 널브러지고 시신과 포탄이 뒤엉켜 있었다. 시신들은 불에 타고 포탄 주변으로 숯덩이가 돼 있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 와중에도 손가락은 본능적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특전사들이 현장에 다시 올라온다는 소식에 카메라 렌즈를 쉴세없이 주변을 탐색하고 역사를 기록하기 바빴다.

순식간에 흑백필름 5롤를 소진한 서 기자는 등산객으로 가장해 재빨리 하산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필름은 신발과 옷 안에 숨겼다. 관음사 관리사무소(현재 관음사 휴게소)에 다다르자 광목이 나란히 밖에 놓여져 있었다.

사고현장에 후송한 시신들임을 직감했다. 그는 "산천단까지 내려오는데 기자들을 찾는 특전사와 만나 가슴을 졸였다. 용진각에서 1박을 하고 내려오는 등반객이라고 거짓말을 한후 현장을 빠져나왔다"며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당시 제주시 탑동 인근에 위치한 <제주신문> 사무실에 도착하자, 필름을 모두 가져오라는 사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그는 재빨리 필름 5롤에서 1개를 빼고 4롤을 사장에게 반납했다.

그는 "그날 이후 5공시절 내내 추락사건은 단 한줄의 기사로도 내보내지 못했다"며 "사고 현장에 함께 갔던 경향신문에서도 사고 소식이 지면에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군사정권은 국민들의 알권리인 보도통제도 모자라 사실도 왜곡했다. 당시 사고 수송기에는 육군 제7787부대 소속 특전사 47명과 공군 제5672부대 소속 승무원 6명 등 모두 53명이 타고 있었다.

 

▲ 서재철 전 제주신문 기자(65)가 1982년 2월7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직접 촬영한 추락 군용기 사진. 이 사진은 민주화운동이 시작된 이후 1993년 제민일보 기사에 처음으로 사용됐다. <출처:서재철 전 제민일보 부국장>

이들은 임무는 '봉황새작전' 즉, 각하(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호였다. 그러나 사고발생 이틀 후 군당국은 유족들에게 대통령 경호 임무가 아닌 '대침투작전훈련 도중 사망'했다고 공식 통보했다.

 

국방부 역시 대침투작전훈련 도중 장병들이 사망했다는 왜곡된 내용을 6일 오후 대변인을 통해 공식 발표했다.

다음은 <동아일보> 1982년 2월5일 사회면에 실린 국방부의 군용기 추락사고 발표 전문이다.

'지난 5일 오후 3시경 제주도 지역에서 대침투작전 훈련 중 병력이 탑승한 C123군용기 한대가 악천후로 인해 추락됐다. 이 사고는 대침투작전훈련도중에 발생했고 이 수송기에는 육군 제7787부대 장병 47명과 공군 제5672부대 승무원 6명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6일 오후 4시경 기체잔해가 발견됨으로써 이들은 순직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고 원인은 이 수송기가 착륙하기 위해 제주도 해안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강한 북서풍에 의한 이상기류에 휘말려 한라산 정상 북방 3.7km지점에 추락했으며 자세한 사고원인은 조사 중에 있다. 주영복 국방장관은 이번 대침투작전훈련도중 C123기 추락 사고에 대해 국방책임자로서 순직한 유가족여러분과 국민여러분에게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길 없다고 말하고 사후처리 문제에 유감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유가족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한다고 말했다'

국방부의 발표와 달리 유족들은 자신의 아들이자 남편, 동생인 사상자들의 사고경위와 시신확인에서 철저하게 배제당했다.

이재영(85) 특전사 제주 2.5유족회장은 "아들(이민호 상사. 당시 27세)이 죽고 이틀 후에 부대에서 사망소식을 알려왔다"며 "사망 원인에 대해서도 군당국은 대통령 경호가 아닌 대간첩작전중 사망이라는 얘기만 했다"고 밝혔다.

당시 사고로 남편(김영용 소령. 당시 31)을 잃은 김귀선(61)씨는 "사고 현장 확인을 요청했으나 가지 못하게 했다. 부대에서 준 빈박스만 가지고 장례식을 치렀다"며 "박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몰랐다. 지금껏 남편 시신을 확인조차 못하고 살아왔다"고 흐느꼈다.<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 한라산국립공원 관음사 코스에 마련된 C123기 수송기 잔해 보관함.ⓒ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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