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을 제외하고 평시 작전 중 최대 숫자인 53명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사건이 1982년 2월5일 발생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경호를 위해 이른바 '봉황새작전'을 펼치던 특전사 대원 등 53명을 태운 수송기가 한라산 1060m 고지에서 추락, 수송기에 타고 있던 군인이 전원 사망했다. 천안함 침몰 사고 때보다 무려 6명이 더 숨졌지만 여전히 정부와 군 당국은 실체적 진실을 밝히지 않고 있다. <제주의소리>가 사고 30년을 맞아 4회에 걸쳐 '봉황새작전'을 연재한다.

[뉴스後] ⑤국방부의 엉터리 사고 수습...30년 지나도 땅 파면 유해 나와

 

▲ 1982년 2월5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추락한 항공기 잔해. 30년이 지난 아직도 땅을 파면 나온다고 유족들은 주장한다.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한 이른바 ‘봉황새작전’을 수행하다 한라산 중턱에서 군용기가 추락, 53명의 꽃다운 생명을 잃었지 30년이 지났다.

 

당시 생명을 잃은 특전사 대원의 평균 나이는 20대 후반. 사고로 아들을 잃은 부모들은 이제 80대 중반이 되었고, 20대의 풋풋했던 미망인들은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지난 오전 10시 한라산 관음사 등반로 옆에 특전사 ‘충혼비’에서는 한라산에서 희생된 특전사 장병 53명을 위한 30주년 위령제가 열렸다.

이날 30주년 위령제에는 사랑하는 아들과 남편을 잃은 유가족 18명이 참석했다. 30주년이여서 특별하게 찾은 것은 아니었다. 유족들은 매년 2~3차례씩 사고 현장과 충혼비를 찾아 억울하게 먼저 간 희생자를 위로하고 있었다.

관음사 등반로 인근 특전휴게소에서 만난 유족들은 엉터리 사고 수습 과정과 철저하게 숨긴 군사정권에 대해 울분을 쏟아놓았다.

 

지난 5일 한라산 관음사 옆 충혼비에서 열린 30주년 추모제

특전사는 1982년 2월6일과 7일까지 이틀 동안 마대자루에 시신 53구를 급하게 수습하는 선에서 수색작업을 마무리했다. 국방부는 사고 이틀 후인 7일 유가족에서 사망사실을 알리고, 9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유해를 안치했다. 불과 5일만에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일사천리로 끝내버린 것이다.

 

하지만 사고로 믿었던 아들과 가장인 남편을 잃은 유가족은 청천벽력이었다. 송파구 거여동 특전사령부 관사에 살고 있던 김귀선(61, 남편 김영용 소령)씨는 “사고 명단을 적은 게시물이 붙여졌는데 무서워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며 “명단에 남편의 이름이 올라갔을 때에는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김씨는 “국립묘지에서 합동 장례식을 치렀는데 부대에서 준 유골함만 가지고 장례식을 치렀다"며 "유골함이 빈 박스였는지 진짜 유골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몰랐다. 지금껏 남편 시신을 확인조차 못하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당시 주영복 국방장관은 “이번 대침투작전훈련도중 C-123기 추락 사고에 대해 국방책임자로서 순직한 유가족여러분과 국민여러분에게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길 없다”며 “사후처리 문제에 유감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유가족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한다”고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또한 거짓말이었다. 특전사는 사고 후 100일이 지난 5월15일 한라산 관음사 코스에 ‘추모비’를 세웠다. 유가족들을 불러 추모제를 지냈지만 사고현장에는 가지 못하게 막았다.

 

▲ 27살이 나이에 남편을 잃었다는 최광선씨(57)가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결혼 한 지 3년만에 돌 지난 아들을 두고 있었던 최광선씨(57, 故 김준식 소령)는 “추모제를 지낸 후 군인들 몰래 매달 제주에 내려와 사고 현장을 살펴봤다”며 “사고 현장에는 군화 신은 발의 뼈와 시계, 타다남은 군복 등 유품이 널브러져 있었다”고 엉터리로 사고를 수습했다고 고발했다.

 

최씨는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꿈을 꾸면 비행기 폭발로 다리와 몸통, 팔이 떨어져나간 시신이 나오는 악몽을 꾼다”고 몸서리쳤다.

사고로 동생을 잃은 이재수씨(62)는 “지금도 사고 현장에서 땅을 파면 비행기 잔해가 나온다”며 “국방부장관이 사후처리에 유감이 없도록 하겠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고 성토했다.

이재영(85) 특전사 제주 2.5유족회장은 “아들(이민호 상사, 당시 27세)이 강원도 대관령에서 한달간 스키훈련을 받고 나서 하루 밤을 집에서 자고 나갔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며 “2월7일 대간첩 작전 중 전사했다고 통지를 받았고,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3개월이 지난 후에야 전두환을 경호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가 변을 당한 사실을 알았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 이재영(85) 특전사 제주 2.5유족회장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 회장은 “1982년 2월5일 당시 기상상황이 좋지 않아 공군에서 수송기를 띄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두차례나 권고했는데 청와대 경호실장이던 장세동씨가 강했다”며 “결국 우리 아들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전두환 군사정권”이라고 비판했다.

 

군 당국이 작성한 자료에 의하면 전두환 전 대통령은 2월7일 사고수습대책본부가 있던 제주방어사령부를 찾아 사건을 보고 받은 후 “이번 사건은 조종사의 착각으로 빚어진 사고”라며 “인명은 재천인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밝혔다.

또 전 전 대통령은 “병사들의 사기진작 대책을 강구하고 제주도 취약지역 수색활동 등의 훈련을 실시한 후 모든 것을 잊고 복귀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 경호작전 ‘봉황새작전’으로 희생된 특전사 장병 53명에게 정부는 훈장과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자신을 위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에게 사과는커녕 추모제 때 조화한 번 보내지 않았다.

이 회장은 “죽어서 훈장받고 특진하면 무엇을 하느냐”며 “앞으로 살날이 많지도 않은데 마지막 소망은 우리 유족들에게 전두환 대통령이 사과 한마디를 듣는 것”이라고 한탄조로 말했다.

아들을 잃은 부모세대 유족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또한 살아남은 유족들은 건강이 좋지 않아 더 이상 추모제에도 참석할 수 없다고 한다. <제주의소리>

<이승록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