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악산에서 바라본 산방산의 모습이다. 우뚝선 모습에서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장태욱
고려시대 혜일법사가 불상을 봉안한 이래 암자로 이용되어온 산방굴사의 모습이다. ⓒ장태욱
산방산에서 바라본 서쪽 해안의 전경이다. ⓒ장태욱
산체 외벽은 주로 주상절리를 이룬다. 외벽이 뜯겨 허물어진 것은 바닷 바람에 의해 바위가 허물어졌기 때문인데, 이를 타포니라고 한다. ⓒ장태욱
용암이 수축될 때, 바위에 수직으로 금이 생겼다. 산방산 외벽은 이런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주상절리 구조를 이룬다. ⓒ장태욱
산방산의 형성과정을 설명한 그림이다. <손영운의 우리땅 과학 답사기>에서 발췌. ⓒ장태욱

<장태욱의 지질기행 6> 백록담을 집어던져서 생겨났다는 산방산 

▲ 송악산에서 바라본 산방산의 모습이다. 우뚝선 모습에서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장태욱

유행가 가사에 흐르는 세월이 야속하다고 했다. 누구든지 나이가 들면 주근깨가 눈 밑으로 가뭇가뭇해지고, 검버섯이 얼굴 가득 피고 쪼글쪼글하게 주름까지 지면 얼굴은 괴죄죄해지게 마련이다. 흔히 “청춘이 아프다”고들 말하지만, 청춘의 아픔이 어디 노인의 것만 하겠나? 아픔을 이겨내는 지혜가 청춘에게는 부족할 뿐이다.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해안에 수문장처럼 제주섬 서남부를 지키는 산이 있다. 한때는 제주도 최고봉으로 자신을 뽐내기도 했지만, 한라산에 그 자리를 내 준지도 오래다. 지금은 오랜 세월 바람과 파도에 쪼개지고 구멍 난 상처들이 무성할 뿐이다.

지금 제주섬 전역이 현무암으로 뒤덮여 있지만, 약 40만년 동안은 조면암이나 안산암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약 80만 년 전 조면암질이나 안산암질 용암이 제주섬 서남부에서 집중적으로 분출되었기 때문이다. 산방산은 초기 조면암 분출에 의해 형성된 산으로 각시바위오름, 울라봉, 제지기오름, 문섬, 숲섬, 범섬, 가파도 등과는 동갑내기다. 이들은 제주섬에서 최고참 산체들이다.

백록담이 날아와 만들어진 산방산
 
산방산은 나이에 걸맞게 많은 사연들을 품고 있다. 그중에서도 산방산 형성에 관한 전설은 세간에 잘 알려졌다.

옛날 한 포수가 한라산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잘못해서 한라산 산신의 궁둥이를 활로 쏘았다. 화가 난 산신이 손에 잡히는 대로  뽑아 던졌는데, 뽑힌 봉우리가 날아와 산방산을 만들었고, 봉우리가 뽑힌 자리에 생긴 빈 공간이 백록담이라는 것.

이는 백록담 분화구와 산방산의 크기와 모양이 산방산과 비슷해서 만들어진 이야기이지만, 과학적으로 보자면 순서가 맞지 않는다. 산방산이 제주도 초기 화산활동 과정에서 만들어진 반면, 한라산 백록담은 제주화산체 형성의 마지막 단계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록담과 산방산의 산체가 조면암질 용암돔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전설의 내용이 전혀 허망한 것도 아니다.

▲ 고려시대 혜일법사가 불상을 봉안한 이래 암자로 이용되어온 산방굴사의 모습이다. ⓒ장태욱

산방산 화산체 남쪽 중심부인 해발 약 180m 지점에는 천연동굴이 자리 잡고 있는데, 천장 높이가 약 5m, 수평 깊이는 약 20m에 달한다. 고려시대 혜일법사가 불상을 봉안한 이래로 이 동굴은 암자로 이용되어 왔다. 제주 사람들은 이 암자를 ‘산방굴사’라고 부른다.

조선 숙종기에 병와 이형상이 제주목사 재임시(1702~1703)에  남긴 <탐라순력도>에는 산방산을 소재로 삼은 작품도 들어있다. 산방산의 굴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을 화폭에 담아 그 제목을 ‘산방배작(山房盃酌)’이라 했다. 조선시대에는 이 굴이 선비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던 관광명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굴에 이르기 위해서는 가파른 계단을 따라 한참을  걸어 올라야 하는데, 그 수고의 대가는 너무도 황홀하다. 이 굴 입구에 서면 용머리와 형제섬이 바로 발아래 있고, 멀리 있던 가파도와 마라도가 눈앞에 성큼 다가온다. 게다가 송악산을 향하는 해안도로변에 즐비한 집들이 구름사이로 옹기종기 다정하고, 대정의 너른 평원이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마치 신선이 되어 구름을 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 산방산에서 바라본 서쪽 해안의 전경이다. ⓒ장태욱

산방산은 오름이면서도 제주의 다른 오름과는 달리 정상부에 분화구가 없다. 분출된 용암이 멀리 이동하지 못하고 화구를 채우거나 화구 주변에서서 굳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화산체를 ‘용암원정구(lava dome)’라고 한다.

산체의 형성과정
 
산방산은 가파른 산의 모양 때문에 교과서에서 종상화산을 설명할 때 단골 모델로 등장한다. 산방산이 둘레에 비해 높이가 상대적으로 큰 이유는 산을 만든 용암의 높은 점성에 있다. 용암의 점성은 이산화규소의 함량에 비례하는데, 조면암질이나 안산암질 용암은 현무암질 용암에 비해 이산화규소의 비율이 높다.(산방산의 경우 전체 질량에서 이산화규소가 차지하는 비율이 대략 60%에 이른다.) 산체의 형성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산방산의 형성과정을 설명한 그림이다. <손영운의 우리땅 과학 답사기>에서 발췌.

이는 백록담 분화구와 산방산의 크기와 모양이 산방산과 비슷해서 만들어진 이야기이지만, 과학적으로 보자면 순서가 맞지 않는다. 산방산이 제주도 초기 화산활동 과정에서 만들어진 반면, 한라산 백록담은 제주화산체 형성의 마지막 단계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록담과 산방산의 산체가 조면암질 용암돔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전설의 내용이 전혀 허망한 것도 아니다.

1. 화산가스 폭발 : 점성이 큰 조면암질 마그마가 화구를 채우며 분출되기 시작하는데, 이때 마그마에 포함되어 있던 가스가 폭발하면서 화구 주변에 화산쇄설물이 쌓인다.

2. 용암분출 : 가스가 제거된 용암이 화구 위로 솟아 오른다. 그러고 나면  새로운 용암이 먼저 나온 용암을 뚫고 올라오면서 용암돔 (dome, 반구모양)을 형성한다.

3. 용암돔 성장 : 용암의 점성이 높기 때문에 먼저 분출한 용암은 주변으로 흐르지 못하고 화구 주변에 있다가, 새로운 용암이 분출할 때 가해지는 압력에 의해 위로 밀어 올리었다. 그리고 그 압력은 먼저 나온 용암을 옆으로도 밀어냈는데,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용암돔의 내부는 양파와 같이 여러 겹을 이루는 구조를 띠게 된다.

4. 주상절리 구조 형성 : 마지막으로 돔이 냉각되면서 수축작용을 일으키자 외벽에 주름이 생기면서 주상절리가 만들어졌다. 산방산의 동쪽, 서쪽과 남쪽 외벽에는 지름이 2m,높이 50m 규모의 거대한 절리대가 폭넓게 분포한다. 산방산 주상절리 외벽에서는 바닷바람이 할퀴어 군데군데 생채기 자국이 선명한데, 이를 풍화혈(타포니, tafoni)이라 부른다. 해수가 암석의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앉은 후에 동결과 융해를 반복하면서 암석에 힘을 가했고, 바닷물 염분이 암석을 부식시켜서 바위 겉면이 힘없이 허물어진 것이다.

▲ 용암이 수축될 때, 바위에 수직으로 금이 생겼다. 산방산 외벽은 이런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주상절리 구조를 이룬다. ⓒ장태욱

풍화의 흔적들

산방산 주상절리 외벽에서는 바닷바람이 할퀴어 군데군데 생채기 자국이 선명한데, 이를 풍화혈(타포니, tafoni)이라 부른다. 해수가 암석의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앉은 후에 동결과 융해를 반복하면서 암석에 힘을 가했고, 바닷물 염분이 암석을 부식시켜서 바위 겉면이 힘없이 허물어진 것이다.
 
산방산에는 파도가 남긴 흔적도 적잖이 남아있다. 산방산은 생성 초기부터 파도의 침식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돔의 바깥쪽은 사라지고 가운데 부분만 남게 되어 산체의 경사는 더욱 급해졌다. 그리고 바위의 틈이 집중적으로 파도의 공격을 받아서  해식동굴(산방굴사)을 만들었다. 지금 산방굴사가 해수면 보다 한 참 위에 있는 것은 신생대 제4기 이후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일대 지형이 융기했기 때문이다.

산방산의 가파른 외벽에는 구실잣밤나무, 참식나무 등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데, 바위와 더불어 장관을 연출한다. 이 바위 위의 식생은 천연기념물 376호(삼방산 암벽 식물지대)로 지정되었다. /장태욱


 
   
장태욱 시민기자는 1969년 남원읍 위미리에서 출생했다. 서귀고등학교를 거쳐 한국해양대학교 항해학과에 입학해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의 42년 후배가 됐다.    1992년 졸업 후 항해사 생활을 참 재미나게 했다. 인도네시아 낙후된 섬에서 의사 흉내를 내며 원주민들 치료해준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러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제주대학교 의예과 입학해 수료했다. 의지가 박약한 탓에 의사되기는 포기했다.    그 후 입시학원에서 아이들과 열심히 씨름하다 2005년에 <오마이뉴스>와 <제주의소리>에 시민기자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2010년에 바람이 부는 망장포로 귀촌해 귤을 재배하며 지내다 갑자기 제주도 지질에 꽂혀 지질기행을 기획하게 됐다.  
<제주의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