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의 제주신화> ⑩ 제주신화 속의 여성

“땅 가르고 물 갈라 살림 분산합시다” 공정한 분배를 요구하는 여신들 

제주신화에서 여신은, 농경과 관련되는 지식, 종자 등을 가지고 외지에서 들어와 결혼하고, 지금까지의 수렵문화 중심의 생활을 비집고 들어와 농경사회의 질서를 연다.  

이 새로운 질서는 토착 수렵문화와 끝없이 갈등을 일으킨다.

땅에서 솟아난 목축의 남신과 외지에서 종자 등을 가지고 들어와 결혼한 농경 여신 또는 해안마을 여신의 결혼생활은 맞지 않는다. 여타 현실의 결혼생활처럼 자주 갈등이 생긴다. 본성이 다른 둘이 만났으니 바람 잘 날 없다.

▲ 왼쪽, 입춘 굿 축제장의 사농바치(사냥꾼을 일컫는 제주어). 가운데, 일제 강점기 화전마을의 가죽옷을  입은 사농바치의 모습. 오른쪽, 목축과 농업의 결합인 바령 장면(송당 신화축제에서 재현한 장면). ⓒ김정숙
앞서도 살폈지만 이들 부부는 밭을 갈 때 이용할 소를 목축신인 남신이 먹어버리거나 또는 해안마을의 임신 중인 여신이 돼지고기의 냄새를 맡거나 먹어버려서 별거, 이혼하게 된다.

관례도 구태도 깨버리는 제주 여신들

이혼은, 이제는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계속 지켜져 온 관례를, 여신들이 깨면서 이루어진다. 게다가 여신들은 ‘땅 가르고 물 갈라’ 살림을 나누자며 자신의 소유권을 당당하게 요구한다.
 
제주신화는 제우스의 본능이나 헤라의 질투 같이 인간의 본능과 감정을 개념화시키면서 찬양하는 그리스신화와 다르다. 견디고 양보하면서 살았는데도 칠거지악과 같은 일방적인 악습으로 덜렁 보따리 하나와 함께 문 밖에 쫓겨나야만 했던 한반도 지역의 신화와도 다르다.
 
백주또는 남의 소를 잡아먹은 남편에게 “아니, 우리 집 소를 잡아먹는 일이야 예사로 있는 일이지만 남의 집 소를 잡아먹는 것은 소도둑놈, 말도둑놈 아닙니까? 우리 땅 가르고 물 갈라 살림 분산합시다” 이야기한다.

가믄장아기는 “난 부모님 덕에도 먹고 살지만 내 운명으로도 먹고 산다”고 부모에게 이야기했다가 쫓겨난다. 그녀는 부모의 생각을 거역하고 그들의 생각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만, 그런 그녀의 행동은 기존의 관례적인 효 관념에 반하는 것뿐이지 불효는 아니었다. 부자가 된 그녀는 거지잔치를 벌여 부모님에게만이 아니라 세상의 많은 가난한 부모,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효, 창조적인 효를 실천한다.
 
자청비의 부부관계는 파격적이기까지 하다. 자청비는 온갖 고생 끝에 사랑하는 문도령과  결혼하고는, 그렇게 사랑하는 문도령을, 자신들의 결혼 때문에 희생당한 여자에게 한 달의 반, 보름 동안을 보낸다.

이처럼 제주신화는 자식, 부모, 형제, 부부 같은 친밀하고 일차적인 관계에 대해 새롭고 다양한 시각을 보여준다. 달라진 관계, 새로운 관계에 대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나눈다. 막강하게 지켜지는 무서운 관례도, 질리는 구태도 깨버린다. 습속이 굳어져 악습으로 군림하는 상황에 그녀들은 고분고분하지 않는다. 위반하고 뒤집는다.
 
제주신화에서는 남성지배-여성순종과 같은 익숙한 질서들, 고착화된 관계와 가치들에 대한 위반과 전복 행위가 심심치 않게 나타나 주목을 끈다. 이런 것들이 제주신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만큼, 제주사회에 오래도록 있어온 '역사적인 정신성'이지 않나, 생각하게도 한다. 

▲ 바람의 신화(제주신화 형상화 작업을 하고 있는 홍진숙의 그림). ⓒ김정숙
‘자유로운 너와 나’의 가치를 꿈꾸며 사는 우리들에게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남성지배-여성순종의 모습, 고착화된 관계와 가치들은 우리를 질리게 한다. 나와 우리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럽고 끊임없이 용서하면서, 남의 것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비난하고 내리치는 것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바람난 남편에 대해 아내가 소리 질러야 할 대상은 우선은, 바로 옆에 있는 남편인데도 아내는 대뜸, 그리스여신 헤라처럼, 상대 여성의 머리채를 뽑아놓으러 보무도 당당하게 나간다. 또 그렇게 망가진 관계 이후 느끼는 환멸과는 별도로, 아내는 말없는 아침상을 내놓고 그녀의 자리를 보전한다. 자신에게 또 상대에게 질리지 않을 수 없다.

관계의 불공정함을 어떤 형태로든 느끼고 있고, 그럼에도 그 불공정한 관계의 눈치를 보느라 나와 내 마음이 불일치해지며, 질리는 구태 속에 여전히 하루하루 넘기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로 가야 한다는 것은 그것의 실현 여부와는 별도로, 공리(公理)이지 않은가. 나와 우리를 덜어내고 고착화된 관계와 가치들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물론 소란스러울 것이지만, 가야할 길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제주의 여신들, 가믄장, 자청비, 백주또가 그러했듯…. /김정숙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