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 해변의 롯데리아와 엔제리너스 커피점. ⓒ양기혁
칭다오 기차역과 영업용인 삼륜 소형승용차. ⓒ양기혁
칭따오역 대합실의 풍경. ⓒ양기혁
칭다오에서 시안 가는 열차의 잉워처(硬臥車) 내부 모습. ⓒ양기혁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4 시안(西安)으로 가는 열차에서

 

▲ 칭다오 해변의 롯데리아와 엔제리너스 커피점. ⓒ양기혁

길 건너편에 반가운 간판을 보게 되었는데 한국계 패스트푸드점인 롯데리아와 엔제리너스 커피점이 한 건물을 반씩 나누어 간판을 달고 있었다.

길을 건너 커피점으로 들어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손님이 없고 자리가 비어 있어서 1층의 창밖 해변도로와 바다가 훤히 내다 보이는 곳에 넉넉하게 자리 잡고 앉을 수 있었다. 커피 한잔과 아침 식사로 햄버거 하나를 주문했다. 한참 동안을 거기에 앉아서 향기로운 커피와 햄버거로 아침 식사를 하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햄버거는 12원, 아메리카노 커피 한잔 20원. 느긋하고 안락한 시간을 보낸 것에 만족했으나 커피 한잔 가격은 중국의 물가수준을 고려할 때 한국의 커피전문점에서와 같이 꽤 비싼 가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시간 여유는 있었지만 배낭을 짊어지고 가게를 나왔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모퉁이를 돌아가자 바로 기차역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지도에서 보고, 멀지 않은 곳에 있구나 생각했는데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다.

▲ 칭다오 기차역과 영업용인 삼륜 소형승용차. ⓒ양기혁

기차역을 바라보면서 걸음을 떼는데 뒤에서 누가 툭 친다. 뒤를 돌아보니 아까 커피점에서 서빙을 하던 소녀가 급히 달려온 듯 발그레 상기된 표정으로 해맑게 웃으며, 안경이 든 케이스를 내민다.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안경을 놓고 나왔던 것이다.
“셰셰.”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다행스럽다는 표정으로 뒤돌아서 간다.

기차역 안에서 남은 시간을 보낼 생각으로 역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대합실 입구에서부터 표 검사를 하여 기차표를 가진 승객만 들여보내고 있었다. 기차역이 누구나 들 어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이 아니었다. 승객들만으로도 기차역 대합실은 넘쳐나고 있었다. 표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휴대한 짐을비행기 탈 때와 같이 엑스레이 검사기로 확인을 하고, 몸수색까지 하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칭따오역 대합실의 풍경. ⓒ양기혁

대합실은 지하 2층으로 내려가야 했다. 긴 여행이므로 대합 실로 가는 도중에 있는 차오스(超市)에서 생수, 컵라면, 맥주,  과자 등 먹을 것들을 사고 배낭 속에 챙겨넣었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서는 구멍가게 이름이 슈퍼로 바뀌었는데 슈퍼마켓을 줄여서 슈퍼로 불리는 것을 보고, ‘슈퍼(super)’란 단어가 한국의 구멍가게에서처럼
굴욕적인 모습으로 사용되고 있는 예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서도 슈퍼마켓이란 뜻의‘차오지스창’을 줄여서‘차오스(超市)’라 쓰고, 보통의 가게들은 다 차오스란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중국에서 기차여행은 그 나라의 땅덩어리만큼이나 긴 여행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짐보따리와 함께 먹을 것들을 잔뜩 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개찰구에 줄을 지어 선 사람들의 손에는 한결같이 먹을 것이 든 비닐 봉지가 들려 있는 풍경이 이채로웠다.

기차를 탈 시간이 가까워오자 안내방송이 나오고, 사람들이 개찰구 앞으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이윽고 기차가 들어왔는지 개찰구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을 따라 계단을 다시 올라가자 기차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각 차량 앞에 승무원들이 입구에 도열해 서 있었다. 내가 탈 차량 입구에는 곱상하고 좀 어려 보이는 여승무원이 서 있었는데, 승무원에게 표를 보여주며 기차에 올라 안으로 들어가니 거기 아래위로 세 칸씩 나누어 누울 수 있게 만든 침대열차가 모습을 드러내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내자리를 물어보고 나서 그제서야 내 좌석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
었다.

‘ 잉와처(硬臥車)’는‘누울와(臥)’자로 알 수 있듯이 좌석이 침대로 되어 있는 차량이다. 앉는 의자로 된‘잉줘처(硬座車)’에 비해서 가격이 좀 비싼데 먼 거리를 밤새 기차 타고 가야 하는 여행이라면 잉와처를 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래위 세 칸 중에서 내 침대는 맨 위칸이었고, 그것을‘샹푸(上鋪)’라 하는데 겨우 몸을 누일 수 있는 공간밖에 없고 고개를 들어 책을 보거나 음식을 먹을 수조차 없어 보였다.

‘중푸(中鋪)’는겨우몸을일으킬수있는정도‘, 시아푸(下鋪)’는넉넉하게 앉아서 대화도 하고 음식도 먹으며 편안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당연히 시아푸가 가장 비싸고, 샹푸는 제일 싸다. 아래 칸인 시아푸는 잠을 잘 때는 혼자 자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다른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되기도 하였다.

샹푸에는 잠을 잘 때만 올라가서 자고 그렇지 않을 때는 통로의 작은 의자에 앉아 여행을 게 된다. 매표창구의 여직원이 (上), 종(中), 시아(下) 중 어느 것으로 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무심코 상이 나으리라고 생각했던 선택이 거꾸로 최악의 선택을 한 것이다.

▲ 칭다오에서 시안 가는 열차의 잉워처(硬臥車) 내부 모습. ⓒ양기혁

기차가 출발하고 나는 줄곧 통로의 좁은 의자에 앉아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창밖으로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와 고가도로 같은 대규모 건설 공사가 펼쳐지고 있었는데, 여행기간 동안 지나치는 도시들에서는 한결같이 오래된 낡은 벽돌집들을 철거하고, 수십 층에 달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지어지는 건설공사를 쉽게 볼 수 있었다.

기차에서 산 현지 신문은 배춧값 폭락을 주요뉴스로 전하고 있었다. 작년 한국의 배추파동으로 폭등했던 배추가격이 올해는 수요가 없어서 작년에 4毛/斤하던 가격이 올해는 1.5毛에도 상인들이 사려고 하지 않는다고 전하고 있다. (*毛(mao): 중국화폐단위, 1원(元)의 1/10, 角(jiao)와 같음) 기차가 한 시간여 달리고 도시를 벗어나자 광활한 농촌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잘 정리된 밭에선 녹색의 채소들이 자라고 있고, 드물게 보이는 농부들은 그동안 많이 가물었는지 밭에 물을 주는 모습이 보인다.

간간이 모여 있는 농촌의 집들은 하나같이 붉은 기와를 얹은 단층벽돌집들로 과거 사회주의 공동체를 연상케 하는 획일적으로 똑같이 지은 집들이 계속 이어졌다.

비좁은 통로에서 승객들은 자연스럽게 어울려 대화를 할 수 있었는데, 한국 사람이 말도 서툰데 혼자 기차 타고 여행한다는 데 큰 관심을 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들의 중국어 발음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으므로, 그들에게 질문을 써줄 것을 부탁했고, 중국어로 내 수첩에 몇 가지질문을 썼다.

“일본 핵누출로 인해서 한국에 염이 발생되지 않았는지?”
“한국사람들은 조선(북한)에 대해서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가?”
“중국에서 한국 TV드라마가 유행하고 있는데, 나도 한국드라마를 좋아한다).”

어제 저녁 식사 중에 최 군이 나에게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에 관하여 도발적인 질문을 했던 것처럼 중국 사람들은 남북한 관계에 대해서 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북한 김정일과 김정은의 세습정권에 대해 서는 매우 냉소적인 반응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핵발전소의 방사능 누출 사고가 중국에서도 연일 방송에서 다루어지고 있었고 중국보다 일본에 더 가까운 한국이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궁금해하였다.

자신의 성이‘한’이라고 밝힌 한 사내는 나에게 더 친근감을 느끼는지 기차가 도착하는 곳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뤄양 처에 소림사(少林寺)로 유명한 곳이 있다고 했는데 가이드북에 쑹산(嵩山)으로 소개된 곳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기가 가본 곳 중에서‘핑야오’란 곳이 가볼 만한 곳이라면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꼭 한 번 가볼 것을 추천하였다.

핑야오는 내가 가진 가이드북에도 명•청대의 성과 마을이 거의 원형 대로 보전된 곳으로 관광지로는 뒤늦게 알려졌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관광객들이 많
이 찾는다고 나와 있다.

여행을 출발하기 전 한국에서 미리 중국에서의 일정을 확정하여 유스호스텔을 예약할 수 있었던 것은 칭따오와 시안까지뿐이고 나머지는 개략적인 방향, 즉 우루무치까지 간다는 것만 정하고 구체적인 것은 현지에서 코스와 일정을 조정하기로 하였으므로 방향만 맞으면 핑야오에 들러서 하루 정도 구경하고 싶었다.

그러나 핑야오는 뤄양에서 북쪽으로 기차 타고 10시간 넘게 가야 하는 곳으로 내가 가는 방향과 반대 쪽에 있어서 시안을 갔다가 뒤돌아서 거기를 갈 수가 없었다.

뤄양을 지나 시안에 다가갈 쯤‘통관(TongGuan)’이라는 곳에이르자 그는 내 수첩에다 ‘成語’라면서 짧은 문장을 썼다.
‘한 사람이 관문을 막아서니, 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 관문을 열지 못하였다.’
그는 나에게 통관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싶어 했으나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동관은 시안과 뤄양 사이에 있는 요지로 후한 말 군벌들이 정립한 혼란기에 동관전투라는 이름으로 조조가 크게 승리한 곳으로 유명하며 중국 역사상 여러전쟁과 정변에서 전략적인 요충지로 자주 이름이 등장하는 곳이었다.

저녁 10시가 넘어서자 실내의 등이 모두 꺼졌고, 침대 옆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내 침대칸에 간신히 몸을 누이고 어쩔 수 없이 잠을 청해야 했다.

/양기혁

 

   
필자 양기혁은 1958년 서귀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상경해 도시 생활을 시작했다. 중앙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서울에서 바쁘게 살다 중년에 접어들고서 고향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다. 제주시에서 귀농 생활을 즐기다 우연치 않게 방송통신대 중문과에 입학해 중국어를 공부했다. 이왕 공부한 김에 중국 횡단 여행을 다녀와 <노자가 서쪽으로간 까닭은?>이라는 책을 냈다. 노자는 어쩌면, 필자 자신인지도 모른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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