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현 칼럼] 국가의 '맨 얼굴'을 보여준 그들에게 "감사합니다"

  # 이승만의 ‘나라만들기’와 문학

  이헌구라는 문학평론가가 있다. 2002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와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선정한 친일문학인 42인 명단에 포함된 인물이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1939년 일제의 국책문학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됐던 조선문인협회의 간사를 맡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공보처 차장, 이화여대 교수 등을 역임하고 후에 예술원회원으로 선정되며 대한민국 문화계의 ‘거목’이 된다.

  그가 해방 4주년인 1949년 『민족문화』라는 잡지에 ‘민족문학항쟁사’라는 글을 기고한다. 이 글에서는 그는 해방 4년간의 문학공간을 좌익에 대한 대립과 투쟁의 역사였다고 회고한다. 이 글에서 그가 정의하는 문학은 ‘민족정신을 지켜 작품화’하는 것이었다. 이헌구의 글은 ‘문학’조차 좌익과의 투쟁의 최전선에서 복무해야 했던 시대적 현실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1945년 해방 이후 ‘친일청산’과 ‘나라만들기’가 시대적 과제로 떠올랐다. 이 과정에서 남한 내의 ‘친일청산’은 좌절을 겪었고 ‘나라만들기’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굴절된 역사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이승만 식 ‘나라만들기’의 과정에서 ‘문학’도 자유로울 수 없었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동조했다는 사실을 이헌구의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문학’조차 이승만식 ‘나라만들기’ 즉 ‘건국’의 기치를 들어야만 했던 시대의 엄혹함 속에서 ‘건국’에 방해되는 모든 시도들은 좌익으로 빨갱이로 처단되어야만 했다. 해방 후 남한 현대사의 과정이 ‘건국’으로 수렴되고 있던 현실 속에서 제주의 비극은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 국가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동안 역사적 비극의 실체를 밝히고, 그 비극을 증언하는 목소리에 주목해왔다. 이러한 일련의 운동 속에서 제주 4․3 항쟁은 미약하나마 지금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우리가 던지지 못했던 질문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건국’ 즉 이승만식 나라만들기에 의한 정체(政體), 더 나아가 국가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근본적 회의일 것이다. 즉 국가의 불법적 폭력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제도가 필연적으로 그 내부에 폭력을 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국가라는 당연한 현실에 회의해야 하는 일이다.

  벤야민은 국가의 본질은 폭력이며 이러한 폭력은 국가가 유일한 입법권자이자 집행권자로 군림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벤야민의 이 같은 견해는 국가가 법을 만들고 국가가 법을 집행하는 당연한 현실을 우리는 그동안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왜 국가인가. 왜 국가이어야만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있다고 반문할 수도 있다.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있고 대한민국의 헌법에도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다시 묻는다. 정말 그러한가. 아니 정말 그러하다고 믿는가.

  폭력을 행사하는 국가

막스 베버는 근대국가가 물리적 폭력을 독점한다고 정의한다. “국가는 정당한 물리적 폭력행사의 독점을 실효적으로 요구하는 인간공동체”라는 것이다. 베버의 정의에서 출발해보자. ‘정당하다’는 수식어와 ‘물리적 폭력’이라는 대상이 서로 나란히 놓여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물리적 폭력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폭력은 폭력일 뿐이다. 또한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물리적 폭력의 정당함이 민중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에 의해서 정의된다는 사실이다.

폭력의 정당함이 폭력을 행사하는 이에 의해 규정된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우리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가 스스로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규정하는 사례를 수없이 보아왔다. 강정에서 평활활동가들을 폭압적으로 진압한 경찰이 엄정한 법집행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 않는가.

이처럼 물리적 폭력의 정당성이 인정된다면 강정에서 벌어지는 공권력의 폭력은 ‘정당한’ 것일 수밖에 없다. 국가의 물리적 폭력에 대항하는 저항, 대항폭력은 처절한 응징의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논의를 확장한다면 용산참사도, 쌍용차 파업의 폭압적 진압도 더 나아가 제주 4․3에서 빚어졌던 국가 폭력도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일상화된 국가 폭력

  ‘정당화’된 국가 폭력의 일상적 행사를 우리는 늘 목격하고 있다. 대단히 사적인 공간인 페이스북에서조차 제주의 경찰은 강정에서의 평화활동가들을 폭력적이고 불법을 자행하는 집단으로 묘사한다. 경찰에 대한 그들의 대항은 응징의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망치를 들어도 폭언을 해도 문제가 될 것 없다고 인식한다. 이 같은 사실은 불행하게도 그들이 일부 네티즌들이 풍자하듯, 경찰이 아니라 ‘견찰’이어서가 아니다.

   국가가 법을 정하고 그 법을 행사하는 이상 이 같은 악순환은 계속될 수 있다. 그렇다. 국가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최소한 다르지 않은가라고. 이러한 질문은 국가를 정권과 동일시하는 근본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김대중정권과 노무현정권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정권과 나쁜 정권이라고 구분할 때 우리는 국가가 곧 정권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이러한 논리는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는 민간인들을 ‘사찰’하는 것이 결코 국가 권력의 불법적 행사가 아니라 ‘국가’를 위한 애국심으로 포장되는 논리와 동일한 작동구조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불법사찰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기자회견장에서 지극히 당당하게 호통을 치는 전 청와대 비서관의 모습에서 우리는 ‘애국심’의 광기를 발견한다.)

  김대중정권과 노무현정권이라는 그나마 ‘민주적 정권’의 통치 시대를 거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국가폭력이 자행되는 것을 지켜보지 않았는가. 소위 진보정당에 대한 사정당국의 폭압적 검거와 평택 대추리에서의 폭압적 진압은 민주정권에서도 여전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해방 이후 남한 정부는 사실상 경찰국가체제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일찍이 푸코는 근대국민국가 체제의 버팀목으로 학교, 군대/경찰, 감옥을 꼽았다. 그리고 남한은 근대국민국가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70∼80년대 학창시절을 상기해보라. 학교에서 우리들은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며, ‘국민’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지킬 것을 다짐했다. 국민교육헌장이라는 정신적 무장뿐만 아니라, 교련이라는 군대식 훈련의 일상화를 통해 우리의 신체까지도 충실한 ‘국민’으로 탈바꿈해야 했다. 많이 민주화됐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학교는 자본주의적 국가체제에 ‘적응’하는 ‘국민’의 양성이라는 임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훈육의 방법만 달라졌을 뿐이지 본질은 똑같다. 학생인권조례를 예로 들어보자. 서울시교육청이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자 보수언론과 일부 교원단체들은 ‘교권침해’ ‘교실붕괴’ 등의 자극적 수식어로 문제를 제기했다. 학생인권조례를 교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학생을 완성된 인격체가 아닌 불완전한 인격체, 교정되어야 할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할 때

  다시 ‘국가’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문제는 좋은 정권과 나쁜 정권이 아니다. 국가를 정권의 선의에 맡겨두는 것보다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국가라는 제도, 민주주의라는 제도 그 자체에 대한 회의와 성찰이다. 4년마다 한 번 국회의원을 우리 손으로 뽑으면서 우리는 주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분도 채 안되는 시간에 주권을 행사하고 그리고 수많은 시간을 그 주권을 위임하면서 우리는 주권행사자의 임무를 다했다고 자부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의문을 가져야한다. 물론 선거제도가 가진 순기능적 기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제도 자체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우리로 하여금 지금의 민주주의를 완벽한 형태로 인정하거나 또는 그보다 더 나은 제도가 없다고 하는, 즉 새로운 제도에 대한 상상을 멈추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회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얼마 전 소위 진보적 언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한 인터넷 매체에서 4․11 총선 전망에 대한 대담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 한 정치평론가는 한명숙 체제의 민주통합당이 지리멸렬한 이유를 진단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권심판론을 이슈로 삼아야 하는데 한미 FTA문제와 제주해군기지 문제를 이슈화함으로써 전략에 실패했다.” 이와 같은 발언을 접하면서 소위 진보진영의 정치적 프레임의 적나라한 속내를 본 것 같아 씁쓸했다.

  아마 이런 발언을 한 정치평론가는 내심 민주진보진영의 총선승리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에 대한 총선 전략의 부재를 지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발언은 제주해군기지 문제를 정략적 사안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이는 정권을 잡기 위해서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는 태도이다. 또한 이러한 인식은 민주진보정권의 유지라는 대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폭력적 상황인식일 뿐이다.

  # 도민을 방패삼는 도지사

  더 큰 문제는 해군기지 문제를 이슈로 삼는 것이 총선승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발언이 한 개인의 오도된 현실인식이라고 보이지 않는 점이다. 좁게는 민주진보진영의, 넓게는 대의민주주의 제도의 성취와 근본적 한계를 동시에 안고 있다.

  논의를 좀 더 구체화해보자. 우근민 제주도지사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되었다. 제주도민들은 주권을 행사했고 그 결과 우근민 지사에게 도민의 주권이 위임되었다. 하지만 주권이 도지사에게 위임되는 순간, 그 권력의 행사와 집행은 오로지 도지사의 판단에 맡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종종 ‘도민의 선택’이라는 수식어로 포장된다.

  세계 7대자연경관 선정과정에서 드러난 수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의도적인 정치적 세력의 음해로, 더 나아가 논란을 계속하는 것이 제주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로 도지사는 도민을 방패막이로 삼아 도피했다.

  그리고 제주해군기지문제도 그러하다. 권한을 위임받았을 뿐인데도 도지사는 그 위임받은 권한을 행사하려하지 않는다. 숙고하고 고민하는 모습만 보일 뿐, 집행하지 않는다. 7대자연경관문제가 위임받은 권력의 남용이라면 제주해군기지 문제는 위임받은 권력의 집행을 거부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위임 받은 권력의 거부가 도지사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주해군기지문제가 5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누적되어온 결과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때 문제를 풀 수 있는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회의 한 축에 참여정부가 존재한다.

  당시 참여정부의 인사들은 노무현정권과 이명박정권에서의 절차적 차이가 크다며 참여정부의 과오를 의도적으로 외면한 채 이명박정권만을 공격하고 있다. 수많은 비판을 감수하고 이야기하자면 이 같은 태도는 자기기만이다.

  # 적에게 던지는 ‘투창’과 자신에게 던지는 ‘비수’

  중국의 대문호 루쉰은 적을 향할 때 ‘투창과 비수’가 동시에 필요하다고 말했다. 적 앞에서는 날카로운 투창을 던질 때 자기를 향해서 동시에 비수를 던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인의 비판은 늘 처절한 자기반성과 성찰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당시 책임질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인사들의 행동은 어떠한가. 문제를 키우고, 문제를 회피하다가 지금에야 와서 자신에게 던져야할 비수는 감춘 채 이명박정권에게만 투창을 던지고 있다. 적에게만 투창을 날림으로써 그들은 ‘원죄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 김동현
  자신을 회의하지 못하는 인간만큼 무서운 존재는 없다. 국가는 회의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닮아있다. 유일한 입법권자이며 집행권자로서, 모든 권한과 집행이 ‘민주적 절차’이고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판단하는 국가의 모습은 ‘괴물’ 그 자체이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는 국가라는 ‘괴물’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명박정권은 우리에게 커다란 선물을 주었다. 국가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실체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국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시작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성찰과 회의의 출발은 이번 총선이 될 것이다. /김동현 국민대 대학원 박사과정(현대문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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