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미의 문학카페> 7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목련꽃 그늘 아래 서면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는다" 와 같은 노래가 저절로 노래가 흘러나올 것 같은 봄날이다. 사방에서 풍겨오는 꽃향기에 벌과 나비들이 날아들고, 지나가는 새들도 나뭇가지에 깃들어 꽃에 물든 시를 노래하고 있다. 꽃과 바람과 시와 노래에 흠뻑 젖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머물다가도 갈 길이 바빠 얼른 일어서야 되는 게 늘 아쉽기만 하다.

 알고 보면 시가 노래가 된 게 참 많다. 시가 원래 노래이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시는 노래로 만들어져서 대대손손 불리어지고 있으니 이 또한 예술은 영원하다는 말의 산증이기도 하다. 또한 문학이 회화나 영상예술의 모체가 되는 원예술임을 보여주는 예이다.

 우리 가곡 '4월의 노래'는 박목월의 시에, 정미조의 '개여울'은 김소월의 시에, 송창식의 '푸르른 날'은 서정주의 시에, 안치환의 '귀뚜라미'는 나희덕의 시에 가락을 붙여 노래가 된 것들이다. 그렇다고 시만 노래가 된 것은 아니다. 소설의 주인공이 노래의 주인공이 된 예도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파랑새'와 '로라'라고 할 수 있고, '모모'도 우리에겐 친숙한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이다.

 '모모'는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의 소설 제목이면서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가끔 오래 전 들었던 노래들이 흥얼거려지는 경우가 있는데, 김만준의 노래 '모모'가 그 중의 하나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바늘이다~" 흥겨운 것 같으면서도 슬픈 노래이다. 특히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단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에서 목이 메기도 한다.

「자기 앞의 생」의 저자는 에밀 아자르라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쓴 로맹가리이다. 로맹가리는 1956년 「하늘의 뿌리」라는 작품으로 이미 프랑스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는 콩쿠르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런데 1975년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을 발표, 또 한 번 콩쿠르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 이외도 '포스코 시니발디', '샤탄 보가트'라는 이름으로도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독자나 평단에 객관적으로 읽히길 원했다. 필명이 갖는 객관성을 확보하려 애썼고, 작품으로만 말하겠다는, 일종의 유명세가 갖는 편견에 맞선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인 모모는 창녀 출신인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프랑스까지 쫓겨 온 창녀 출신의 늙은 보모였다. 젊어서는 창녀였지만 나이가 들면서 창녀들의 아이들을 돌보며 일정한 보수를 받고 있다. 모모도 그렇게 해서 로자 아줌마와 만나게 되었다.

 모모는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다. 다만 매달 우편환으로 돈이 로자 아줌마에게로 들어온다는 것을 알 뿐이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우편환이 끊기고 만다. 조숙했던 모모는 우편환이 들어오지 않는 대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돌보며 로자 아줌마의 일손을 덜어드리는 일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 주변에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 살고 있었다. 로자 아줌마를 비롯한 창녀들, 아우슈비츠수용소에 끌려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유태인 의사 카츠 선생님, 혼자 사는 아랍인 하밀 할아버지, 전직 권투선수였던 성 전환자 롤라 아줌마 등. 대부분이 외롭고, 늙고,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곳엔 절망이라는 말은 아예 없는 것처럼 무심한 듯하면서도 웃음과 대화, 보살핌이 끊이질 않는다. 온갖 병을 앓고 있는 로자 아줌마의 병세가 심해지면서부터는 주변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많아졌다. 카츠 선생님은 늙은 몸을 이끌고 매일 왕진을 오고, 롤라 아줌마는 돈을 털어 장을 보고 집안일 해놓고 가기도 한다. 치매기가 있는 하밀 할아버지는 이슬람교도로서 모모에게 좋은 말을 많이 해준다. 이를테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단다.”와 같은 말이다.

 하지만 모모는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세상에 하나뿐인 로자 아줌마를 잃을까봐서다. 더 이상 창녀의 아이들도 돌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아이들도 다 떠났고, 모모 혼자서 로자 아줌마 곁을 지킬 뿐이다. 모모는 어느 날, 로자 아줌마의 처녀 시절 사진을 보고 슬픔에 잠긴다. 너무나 젊고 아름다웠던 로자 아줌마, 이제는 늙고 병들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한 때를 기억하는 자는 누구인가.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잊혀야 할까.

 영화의 리와인드 장면처럼 모모 아줌마의 인생도 되돌려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가 한 말을 기억한다. “이 세상에 전적으로 희거나 검은 것은 없고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 색을 숨기고 있으며 또한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단다.”라고 말하던 것.

 작품 속 책갈피...

“로자 아줌마는 이 세상에서 제일 못생기고,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불행한 여자예요. 다행히 제가 돌봐주고 있어요. 왜냐하면 아무도 거들떠보려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왜 이 세상에는 못생기고 늙고 돈도 없고 병까지 난 사람도 있고, 그 반대로 그런 나쁜 것은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공평하지가 않은 걸요. 내 친구 중의 하나는 모든 경찰의 우두머리이고,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요. 그 친구는 어디를 가든지 제일 힘이 세고 가장 훌륭한 경찰관이에요. 그는 너무나도 힘이 센 경찰관이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왕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길을 같이 걸어갈 때는 마치 아버지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가요. 내가 어렸을 적에는 암사자가 여러 번 내게 와서 얼굴을 핥아주곤 했어요. 난 그때 열 살이었고,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었죠. 그런데 학교에서는 내가 네 살 더 먹은 걸 몰랐고, 거기다 생일이 언제인지 몰랐기 때문에 나이가 안 맞는다고 나를 내쫓았지요. 그리고 그때는 유세프 카디르 씨가 영수증을 가지고 나를 데리러 오기 훨씬 전이었지요. 양탄자 장사로 유명한 하밀 할아버지는 내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준 분이에요. 지금은 장님이 되었지요.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의 책을 갖고 다녀요. 나도 크면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해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거든요.”

 주변의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저 세상으로 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로자 아줌마도 결국은 죽음을 맞이했다. 둘만이 아는 지하실 방에서 잠자듯 조용히. 모모는 지하실에서 로자 아줌마의 시신과 함께 3주를 더 지낸다. 아직 어린 모모에게 사랑하는 로자 아줌마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로자 아줌마의 얼굴에 화장을 해주고 향수를 뿌리지만 부패된 시체 냄새 때문에 결국 사람들에 의해 발각되고, 모모는 언젠가 길에서 만났던 영화 찍는 나딘 아줌마네로 들어가게 된다. 나딘 아줌마는 세상을 거꾸로 돌아가게 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열네 살 소년의 아름답고 슬픈 성장기, 꽃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다. 책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거운 생의 짐을 짊어지고 있다. 역사의 수렁으로부터 쫓겨나와 창녀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던 로자 아줌마, 부모의 버림으로 늙은 보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던 모모, 평생 혼자 살면서 빅토르 위고의 소설 한 권을 손에 쥐고 산 하밀 할아버지, 이 모두 인생의 희망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생이지만 그들에겐 책임지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책 한 권일 수도 있고, 생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떻게 이곳까지 흘러들어왔는지 그 근원을 알 수 없으나 주어진 것을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생의 기쁨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 바로 「자기 앞의 생」이다.

 그리고 하밀 할아버지가 얘기해준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말처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일 것이다. 그것은 부모나 형제자매가 아닐 수도 있다. 실제로 모모가 의지하고 사랑한 사람은 부모가 아니다.

 이웃해 있는 창녀와 노인들, 성전환자, 세상이 거꾸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 찍는 사람들이었다. 모모는 그들을 통해 부모가 아니어도, 계층과 종교, 나이, 지위가 달라도 한 가족처럼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산 경험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로자 아줌마는 죽고 말았지만 모모의 생 앞에 놓인 미래는 담담하게 펼쳐질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열네 살의 소년은 어쩌면 생의 축소판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세상에 대해 관찰자적 시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말처럼 빅토르 위고에 버금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더 내려갈 곳 없는 그의 생에 축복이 있기를! 또한 바라는 게 있다면 모모와 같이 세상에 비빌 언덕이 없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이 세상이 조금은 더 착해졌으면, 그런 착한 사람들이 승리하는 그날이 반드시 왔으면 하는 소망이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바늘이다.” /강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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