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후 칼럼] 대의와 신념을 갖고 투표에 임하자

4월11일은 앞으로 4년 동안 국민의 권한을 위임받아 국가정책을 담당할 국회의원을 뽑는 날이다. 유권자들은 개인과 공동체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 할 대변자를 선정하겠다는 생각으로 한 표를 행사 할 것이다. 국민 모두가 간절히 기도하고 염원하는 심정으로 선거에 적극 참여 한다면 옛 현인들이 말하는 공동선과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여 천하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정치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좋은 정치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비관론도 있다. 그렇지만, 선거라는 행위를 통하여 인간의 정치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

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들은 통치자이자 피치자라는 숙명적 모순을 안고 있다. 장 자크 루소는 “국민은 투표하는 순간에만 주인이지 투표가 끝난 순간부터는 노예가 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시각 뒤에는 정치 혐오증이 도사리고 있고, 결국은 민주주의를 무력화 시킬 수도 있다. 민주주의는 근대 국가가 형성되면서 인류가 피땀흘려 이룩한 빛나는 유산이다. 몇 세기에 걸쳐 쌓아올린 문명사적 성과를 스스로 부정하게 된다면 인질이 인질범에게 동조하고 감화를 받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지는 것과 같은 파국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투표율이 낮아야 득을 보는 세력에게는 환호작약(歡呼雀躍)할 일이기도 하다.

현대 민주주의는 시민의 참여ㆍ동의와 위임에 의한 지배체제로 대의제와 선거가 핵심이다. 시민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당과 정치가의 경쟁체제인 것이다. 정당의 리더쉽은 계층적 이익을 대변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에서 정치와 시민 사이를 잇는 주요 소통 수단으로서 미디어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유권자는 미디어라는 창을 통해 선거에 관한 정보를 얻고 분석ㆍ평가하고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4.11총선을 보도하는 언론은 정파성과 흥미위주의 상업적인 보도태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미디어는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주자에 집중하는 ‘경마중계식’ 보도, 후보자들의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는 ‘인물중심’ 보도, 상대방의 흠집을 까발리는 ‘선정적’ 보도들을 쏟아냈다. 각 정당들은 상대편을 비난하는 막가파식 네거티브 전술을 써가며 선거에 승리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국정운영의 비전과 국민들의 삶을 좌우할 각 당의 공약들은 실종되어 버린 셈이다.

이번 선거는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먼저, 과거에 실패한 선거의 트라우마는 유권자에게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안겨 준다는 점이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인간의 투쟁이다”고 말한 것처럼 아픈 과거를 되살리는 회고적인 흐름이 나타났다. 경제 성과 및 민간인 사찰 등과 관련 ‘정권심판론’ 대 ‘전정권책임론’과 같은 프레임이 확산되고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둘째, 경제민주화와 복지 정책에 대한 정파 간의 차별이 엷어졌다. 실천 가능성은 미지수이지만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지금보다는 확장된 복지정책을 내놓았다. 경제민주화와 복지체제가 양극화와 같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최소화하고 사회 갈등과 분열 없이 공동체의 안정과 번영에 기여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최근 발표한 유엔의 ‘세계 행복보고서’는 행복의 크기를 경제보다 정치적 자유, 사회 안전망 같은 사회적 요소들이 좌우한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행복지수는 156개국 중 56위에 그쳤다.

셋째, ‘세대’투표가 선거의 최대 변수로 등장했다. 2040세대와 5080세대, 즉 미래지향과 과거 회귀의 싸움이 되었다. 선거결과는 어느 세대가 투표장에 많이 나가느냐에 달려있다. 전통적으로 나이가 많을수록 투표를 많이 한다. 투표율이 올라간다는 것은 젊은 유권자들이 투표장으로 많이 간다는 의미다. ‘세대’라는 중요한 변수에 SNS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SNS가 젊은 세대의 이목을 집중시켜 선거에 쉽게 뛰어들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SNS는 광범위한 여론을 형성하고 선거결과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매우 커졌다.

넷째, 종북좌파, 빨갱이, 수구꼴통 같은 낙인찍기와 ‘북풍’의 효력이 거의 소멸되었다는 점이다. 걸핏하면 종북좌파로 모는 냉전시대의 소구 기법은 극소수 사람들에게만 효과를 미치는 박물관의 유물이 되고 있다. 많은 국민들은 이러한 매카시즘적인 폭력성의 실체를 제대로 분별하고 인식하게 되었다. 종북좌파란 구호속에 감추어진 자유와 인권을 유보할 수 있다는 부정적 의미를 간파한 것이다. 체질적으로 권위주의 문화를 거부하는 젊은 세대에게 이념적 레토릭은 낡고 퇴영적인 행태로 받아 들여졌다.

마지막으로 유권자들은 각 당이 제시한 공약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매우 높은 안목으로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다. 제주지역의 모든 후보들이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제주신공항 건설을 공약하고 있다. 공항 건설은 제주도민들에게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사안이다. 신공항 건설 이후 제주의 각종 관광 인프라와 자연 여건을 따져볼 때 과연 수용 가능한 최대 관광객은 얼마가 될 것인가. 그리고 현재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제주-전남 해저철도 건설과 크루즈선 등 제주로 오는 다양한 뱃길도 신공항 건설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현재 관광객은 늘어도 관광수입은 제자리 걸음이라고 한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된다면 자연훼손과 환경파괴, 물자원 낭비, 흑자 도산 등 많은 문제들이 예상된다. 전국에서 한해에만 팔당댐 17개를 가득 채울 38억톤의 지하수를 펑펑 쓰고 있다고 한다. 지반이 내려앉는 여러 지역도 생기고 있다. 무제한의 관광객 유치는 필연적으로 무제한의 지하수 개발을 필요로 한다. 신공항이 돈먹는 애물단지가 될 수도 있다는 의견도 많다. 지역사회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 도민들의 여론을 집약하고 사전 면밀한 검토를 거쳐 추진해야 될 사업이다. 자칫하면 제2의 해군기지가 될 수도 있다.

4월 11일, 우리는 투표장에 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공동체의 선과 정의를 주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투표장에 가기를 주저할 필요는 없다. 대의와 신념, 균형적 판단을 갖고 투표에 임한다면 과거의 실패한 투표에 따른 공허함과 정치혐오라는 저주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자신이 바라는 것이 진정으로 자신이 바라는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투표지에 도장을 꾹 눌러야 한다.

▲ 권영후 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장. ⓒ제주의소리

우리가 투표를 하는 이유는 유권자로써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투표에 앞 서 세익스피어의 <존 왕>에 나오는 말을 상기해 보자. “누구의 소유물이 되기에는, 누구의 제2인자가 되기에는, 또 세계 어느 왕국의 쓸 만한 하인이나 도구가 되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고귀하게 태어났다.” /권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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